뭄플레이(김이슬)의 작업 <무니 누니>는 작가가 ‘무니’라는 페르소나를 연기하고, 동시에 그녀와 관계맺는 ‘누니’라는 인공지능 캐릭터를 등장시킨 유튜브 기반 웹콘텐츠이다. 여기서 콘텐츠라는 말의 모호함은 실은 이 작품이 시트콤과 퍼포먼스, 전시를 위한 비디오 엣세이 사이를 횡단하기 때문이다. 일단 구독을 시작하면 우리는 무니와 누니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코로나19를 경유한 지난 2년간 우리는 반강제적으로 가상성을 경유하게 되었다. 대면의 만남보다는 원격연결을 선호하게 되었고, 홀로됨의 경험을 넘어 게임이나 SNS, 인터넷 커뮤니티 등의 새로운 가상세계로 확장해 디지털 객체들과의 관계를 만들어왔다. 본래 무용가로서 몸을 쓰는 예술가였던 김이슬은 이 같은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이 거주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고, 작가의 멀티 페르소나가 살아갈 수 있는 유튜브로 장소를 옮기기로 결정한 듯 보인다.
2화에 등장하는 누니는 실은 무니의 몸에 누니가 결합한 무용수의 신체다. 나래이터가 여러 절차적 행동들을 명령내리고, 누니가 그것을 수행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절차적 행동을 그대로 따르는 누니는 실은 무니의 기계화된 몸의 풍자로 보인다. 아동심리학자 부르노 베텔하임은 <조이: 기계소년>이라는 논문을 쓴 적 있다. 그가 치료했던 조이는 자신을 기계라고 생각해 잠을 잘 때, 침대에 기계장치를 설치하고 이를 자신에 연결해야 잠을 간신히 잘 수 있었다. 조이는 자신을 기계라고 생각해 절차적 행동들에 신경을 썼다. 결국은 베텔하임이 감정을 가진 본래의 몸으로 바꿔 소년을 치료해버렸지만, 오늘날 조이는 트랜스휴먼의 상상력을 가진 선구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하다. 그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단지 절차적으로 행동하는 마음의 프로그래밍을 내재했을 뿐인데. 인간이 기계가 되는 일이 한때는 미친 짓이었지만 오늘날에는 모험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무니는 이 점에서 뭄플레이(김이슬)의 또 다른 기계화된 자아이며, 누니는 새로운 몸들의 환유이다. 왜 이 이야기는 인간과 기계 간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을까? 인간과 기계의 대화가 몸을 둘러싼 개념의 대립과 화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충 눈코입 등으로 세계를 인지한다. 기계는 수많은 센서들과 그 센서들이 연결된 망을 통해 세계를 인지한다. 우리의 몸이 세계를 담는 그릇이라면, 기계에게 세계를 품는 그릇인 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누니의 존재는 도처에 존재하는 감시카메라, 스마트폰의 조도센서, 중력센서, 밥솥의 자동타이머, 거리의 경고등 등에 근거한다. 누니는 이러한 센서들을 연결하고 무니와 소통하는 광대한 몸을 가진 인공지능 존재다. 기계에게도, 인간에게도 몸은 있다. 그래서 무니와 누니의 관계맺음은 코로나19로 인해 인류가 디지털객체들과 상호침투하며 얻는 몸의 이행을 알레고리로 보여주는 작업이 된다.
몸이라는 단어를 거꾸로 하면 뭄이다. 김이슬은 자신의 몸에서 새로운 뭄으로의 이행을 멀티 페르소나의 연기를 통해 얻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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