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계급투표’라는 환상과 새로운 ‘공동전선’ / 강부원

어떤 ‘착시효과’?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파면 이후 새로운 세상은 도래할 것인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조치 덕분에 조기에 치러지는 21대 대선은 일찍부터 예견한 대로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 보인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힘이 패배하는 가장 큰 이유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과 탄핵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계엄과 탄핵, 파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까발려진 극우 세력의 망상과 비합리를 지켜보며 끓어오른 전 국민적 반감이 정권교체를 이뤄낼 공산이 크다.

윤석열 탄핵이라는 절대변수로 인해 간단하게 이뤄낼 민주당에 의한 정권교체는 손쉽게 정당성을 확보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이재명 vs 반이재명’ 양자 구도만 부각되고 있는 이번 선거는 별반 정책적 변별점이나 미래를 위한 특별한 기대를 찾아볼 수 없다. 내란 종식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위해 다른 모든 이슈들은 숨죽어 있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뒤로 밀려진 셈이다.

탄핵과 파면 이후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던 진보적 성향의 유권자들은 대선 국면에 접어들며 오히려 급진적 변화에 대한 기대를 한풀 꺾은 채 온건한 정권교체를 지향하고 있다. 1987년 체제를 극복하고 뛰어넘기 위한 7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위한 개헌 의지도 힘을 잃고 있다. 탄핵과 파면이 그저 또 다른 절대 권력자를 불러내는 주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이재명 정권의 탄생이 탄핵 이후 한국정치의 최종 귀착점이 될 수 있는가. 광장에서 보여준 빛의 혁명과 시민들의 영성은 결국 부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던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더 나아가 윤석열 정권의 종식은 차별적 성장과 독점적 권력만을 승인했던 이승만-박정희 신화의 종말을 선고하고, 검찰 독재 정권을 비호해 왔던 이명박-박근혜 체제의 완전한 해체를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광장의 빛무리들이 간절히 바라던 변화를 이재명 정권이 온전히 이끌어가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문재인 정권이 보여준 과오를 반복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이들이 내세운 청년-노인들을 위한 일자리, 복지 정책과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여성 정책은 현실을 그저 봉합하거나 더 나빠지지 않게만 붙들어 놓는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소득자에 대한 과감한 증세정책 없이는 보편적 복지정책은 공회전할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비정규직,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공약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아마 탄핵 국면에서 분열된 좌우 세력에 대한 문제가 너무 거대해 보이기 때문에 ‘국민통합’이라는 명분만을 앞세운 채 이 같은 근본적이고 시급한 문제들은 끝내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민주당의 이재명은 드러내놓고 중도 보수 지향을 표방하고 있다. 광장의 빛무리들을 그대로 물려받아 당선될 민주당 정권은 보수 기득권 세력의 자기보전과 재생산에 본의 아니게 다시 한 번 기여할지도 모른다. 광장에서 요구하던 새로운 민주주의와 정치변화는 이제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위어 버렸다. 수구기득권은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아무리 좋은 평가를 해보려고 해도 이번 대선 국면은 광장의 빛이 지향하는 가치를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금번 대선을 통해 입법-행정을 동시에 장악하게 될 울트라 민주당 정부는 1987년 체제 이후 40년 가까이 지속된 양당체제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권력 구조를 누릴 것이다. 누군가는 이번 대선의 뻔히 예상되는 결과를 놓고 “승리”를 자축하자며, 조심스레 “희망”을 언급하기도 한다. 다소 성급하게 외쳐진 그 ‘희망’은 윤석열 정권이 망쳐놓은 숱한 구조적 절망의 데이터들 때문에 기댓값이 상당히 축소된 형태에 불과하다. 광장의 빛이 이끌어낸 탄핵이라는 결과만 놓고 보면 우리 사회는 한 걸음 전진했지만, 이번 대선을 통해 다시 반걸음쯤 후퇴해서는 안된다. 윤석열 파면이라는 승리의 경험이 현실변혁의 훌륭한 자원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이번 대선은 ‘빛’의 승리라기보다 내란 세력의 패배에 가까운 것 같다.

     


‘계급투표’의 불가능성과 계급배반투표     

빛의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노동자‧비정규직‧저소득층과 같은 하층계급을 대변하겠다는 진보정당들이 득표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계급투표가 요원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선거판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이제는 정말, 아무도, ‘계급’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입에 담지 않는다. 보수정당의 정치인들이야 애초에 계급 개념의 필요를 부인하는 족속들이었지만, 이제는 진보진영의 인사들도 ‘계급’이라는 용어를 쓰기 저어한다. 그것은 마치 마법사들이 ‘볼드모트’의 이름을 함부로 발설하지 못하는 두려움과 유사해 보인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에 ‘계급’이라는 말이 소환하는 정치적 긴장과 사상적 충격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는 뜻이겠다. ‘계급’이라는 호명은 마치 주술처럼 적색공포를 환기하는 동시에 현대사의 박제된 유령을 살려낸다.

또한 역대 수많은 선거결과에서 보듯 ‘반(反) 계급투표’ 혹은 ‘계급배반투표’가 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특정계급을 겨냥하는 정책이나 강령은 효력이 없는 것을 넘어 반작용을 일으키는 요소로 간주되곤 했다. 하층계급의 많은 사람들이 보수정당에 표를 준다. 하층계급이 복지와 분배 정책에 관심이 적은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현상은 고전적인 계급이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게다가 내란 세력의 재등장을 막아야 한다는 제일의 목표가 한국정치가 해결해야할 복잡한 이해관계와 다양한 이슈를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여전히 ‘사표방지’ 논리만이 투표의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 셈이다. 물론 철저하게 와해된 진보정당이 대선캠페인 초기부터 주체적으로 청년, 젠더, 생태, 성소수자, 복지 이슈 등을 선점하지 못해 바람을 일찍 일으키지 못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사회대전환 연대회의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선명한 정책을 특화해 내세우기보다는 천편일률적으로 보수 공격에 치중하다 보니 기존 보수적의 양당과의 정책 차별성도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렇듯 복잡하게 얽힌 정치지형의 다양한 역학 때문에 원론적인 계급담론은 좀처럼 확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특히 현실정치 영역에서 계급정체성은 정치적 선택의 절대변수로 작용하지 않을 때가 많다. 개인의 정치적 의사결정은 매우 복잡한 자기반영과 계산의 산물이다. 사람들은 ‘계급’으로 통칭되는 경제적 조건만으로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섣부르게 지지하지 않는다.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가치관’에 따라 투표한다. ‘저소득층’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하게 정의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복지정책의 차별성만을 근거로 정당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들의 결정에는 도덕적 신념이나 종교 등도 무시못할 영향을 준다. 또한 전통적 젠더질서뿐만 아니라 출신지역과 학연, 지연 등 봉건적인 관행들도 자신이 속한 계급이 지향해야 할 정치적 입장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선택을 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하층계급은 때론 진보적 정치결사체를 지지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반발심리도 가지고 있다. 소위 ‘먹물들’로 구성된 진보정치인들이 보여주는 사회비판적 태도와 행동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습득한 복종문화와 안정적인 생활을 지향하는 정서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난 18대대선 TV토론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오히려 표가 떨어지는 역효과를 낸 사례가 있다. 이후 진보후보는 “싸가지가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평가를 공공연히 들어야 했지만, 지난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는 날카로운 공격력을 유지한 채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진보후보에 대한 부당한 고정관념을 비교적 수월하게 피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진보진영의 공동후보인 권영국 후보는 전혀 존재감이 없고, 아무도 그와 그의 정책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인상비평보다 더 큰 민심배반의 요인은 따로 있다. 진보엘리트들은 정파투쟁에 매몰돼 일반시민들은 구분할 수조차 어렵게 여러 정당으로 분열돼 있거나, 대중이 별반 관심이 없는 사상적 논쟁에 사활을 걸기도 한다. 서민을 위한 정책입안이나 현실문제 해결에 나서기보다 갈등과 분열만을 거듭하는 모습만 보여주었기 때문에 하층계급에게 정치적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요컨대 ‘반계급적 선택’으로까지 보이는 하층계급의 투표성향은 생활과 경험의 차이가 빚어낸 문화적 습속 및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진보엘리트들이 사회적 약자를 배반하는 정치행태를 보임으로써 실천할 능력이 있는 ‘계급정당’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1대 대선에서 사라진 키워드: 여성, 청년, 노동, 대학     

21대 주요 대선후보들이 유권자들의 각 가정에 발송한 정식 공약집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청년과 여성, 노동자, 대학, 인문학 분야의 공약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너나할 것 없이 구체적인 목표액을 상정해가며 기초연금 수령을 늘려 노인들을 위한 복지 정책은 강화하겠다고 하지만,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미래를 위한 도약을 준비하게 해주겠다거나, 추상적인 차원에서 주거와 자립을 보조하겠다는 수준에 머문다.

여성 및 젠더 관련 정책은 정말 이번 대선에서 금기어로 설정이나 된 듯, 모든 유력후보 캠프에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생략해버렸다. 물론 선거운동 과정이나 TV 토론에서 일부 언급되기는 했으나, 페미니즘에 관련된 입장이나 태도를 문제 삼아 상대 후보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수준에 불과했다. 동덕여대 사태에 대한 개입이나 중재를 정치가의 적극적 임무로 여기기보다, 학생들이 처한 사법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후보자가 마치 치명적 약점을 가진 것처럼 몰아붙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래 산업의 인력 시장 재편의 과제와 국민 연금 개혁 과정에서 모수가 되는 인구 산출 문제를 젠더 갈등과 여성 지위 향상에 따른 부정적 양상이나 저출생의 대립적 결과로 엮는 등 전근대적인 수준의 동물학적 인구 관점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절망적이다.



대학 관련 정책 역시 전무하다시피 하다. AI 기술 개발과 보급, 확산에 수십조~200백조 원을 투자한다거나, 100만이나 200만이니 인력을 양성한다는 허무맹랑한 공약은 남발되고 있지만, 기초과학이나 인문학과 관련된 투자나 지원에 관한 이야기는 공식 공약집은 물론 선거운동 과정에서 단발적으로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대선 후보들에게 이 같은 주제는 관심 대상도 아니며, 별로 득 될 게 없는 영역이라는 판단이 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 처참한 지경이다. 청년과 대학에 대한 구체적인 공약은 하나도 없는 후보가 앞장서 대학 식당을 방문해 청년 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는 투어를 강행하고 있는 모습은 블랙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여성 혐오 정서를 부추겨 얻어낸 2030 남성들의 지지를 자기 존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후보가 청년을 대표하는 정치지도자로 인식되는 문제는 비루하고 꼴사나울 정도이다.


노동자 정책 관련해서도 최저임금 정책의 조정 문제와만 결부돼 마치 누가 더 시장 친화적인지를 경쟁하듯 선전하는 주제로만 소비되고 있다. 토론에서 보여준 노동 문제 발언들은 마치 노동자의 희생과 양보를 많이 얻어내 자신이 더 기업 투자를 늘리고 국가 경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적임자라고 주장하는 대결처럼 보일 지경이다.

 


계급담론의 남성중심성과 ‘계급환상’이라는 덫     

그런데 이 사라진 키워드 여성, 청년, 노동 등이 ‘계급’이라는 표상을 갖추고 선거운동 현장에서 매우 절박하게 사용되는 국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예컨대 민주당은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이라는 대전제 아래 “노동이 존중받고 모든 사람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라는 노동공약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었다. 하지만 선거 기간 내내 이들은 철저하게 정규직, 남성중심적 노동조건만을 개선하는 데에만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10대 공약 중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관련 공약은 전무하고, 선거운동 기간 보충적인 입장만 제시하고 있다. 빛의 혁명을 이끈 여성과 청년 세대의 기대와 희망을 저버린 셈이다.

한편 군대 관련 공약 역시 모든 정당들이 대동소이하다. 너나없이 복무기간을 파격적으로 줄이는 공약을 통해 남성 청년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려 하고 있다. 징집에 기반한 한국 군대제도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거나 평화 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기보다 그저 국가에 동원되는 남성 청년 노동력에 적당한 대가를 보장하거나 기간을 줄여주겠다는 수준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청년세대들의 사회 도약을 보조하기 위해 기본소득을 보장하고, 금전적 지원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는 주장 역시 모든 후보가 유사해 선명한 차별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현재 한국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청년을 착취하고 노인을 학대하는 방식으로 지탱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은 청년-노년 노동에 헐값을 지불하고, 또 여성과 남성 노동의 가치를 차별하는 방식을 통해 유지된다. 이는 하층민 내부의 계급연대를 막고, 세대전쟁과 젠더전쟁에만 몰두하게 만든다. 여성노동이 남성노동에 비해 값싼 대우를 받는 한국의 현실에 대한 예리한 접근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떤 후보도 동일직군에서 동일노동을 수행하는 비정규직과 여성들이 정규직과 남성에 비해 2/3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받는 현실을 날카롭게 파고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대선국면에서는 젠더 담론과 여성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글을 인터넷게시판에서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이것이 203040 정치고관여자 남성들이 주로 활동한다고 알려진 ‘에브리타임’과 ‘블라인드’, ‘오유’, ‘엠엘비파크 불펜’, ‘디시인사이드’, ‘에펨코리아’ 등과 같은 인터넷커뮤니티의 실상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한국에서 계급담론은 ‘다수라는 환상’ 및 ‘국민정서’를 가장한 남성집단의 이기심을 보존하거나 유예하는 수단으로 도용돼왔다고 할 수 있다. 선거전략의 절대진리로 간주되는 ‘보편’을 지향하고 ‘중도’를 포섭하는 전략은 사실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는 방식을 통해 달성되는 폭력에 가깝다. 그리하여 노동자와 하층계급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젠더문제를 비롯한 소수자들의 이슈는 서슴없이 격하된다.

이번 대선기간 사회대전환 연대회의 민주노동당 권영국 후보의 인지도와 지지율이 급격히 올라갔던 순간은 TV토론회에서 내란 세력을 단호하게 공격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젠더적 약자와 성소수자를 적극 보호 ·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였다. 동성애 이슈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바탕으로 차별반대 합법화 논쟁에서 선명한 찬성 입장을 보여주었을 때, 지지는 폭등했다. 이와 반대로 이재명과 민주당은 여성 정책이 대선의 주요 이슈로 부상하는 것을 저어하는 태도가 노골적이다. 민주당의 스피커 노릇을 하는 인사들의 공공연한 발언들과 유튜브 방송들 중 여성학자와 여성활동가들을 노골적으로 비토하고, 젠더 갈등에 함구하라는 조언을 공공연히 하고 있는 점은 특히 심각하다. 민주당이 젠더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기피하는 까닭은 ‘청년’과 ‘민중’이라 명명되는 대주체의 강박적인 자기계급 정위와 남성중심적인 정치적 무의식이 다수를 차지하는 온건진보와 중도보수 진영 내부에서 여전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국사회의 가짜진보와 중도보수 세력이 수권을 유지하는 전략은 여전히 보편성을 표방한 남성-이성애 정치주체들의 정치적 환상만을 따르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사회에서 계급담론은 여성을 비롯한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가 받는 고통을 외면하거나 미뤄두는 방식으로 활용될 때가 많다. 소수자와 약자를 포함하는 ‘계급연대’를 논하는 순간 ‘보편’과 ‘중도’라는 괴물의 거센 공격을 받아야만 한다. 현재의 계급담론이 남성-이성애 중심 사회의 경제적 계급모순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보편 · 중도 지향은 역설적으로 여성과 성소수자가 차별받는 현실을 뒤로 감추는 반지성적 ‧ 반민주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층계급’이라는 표상이 때로는 이 ‘포함되는 배제’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계급환상’으로 왜곡될 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차별 없는 공동전선     

그렇다면 도용된 계급담론의 허상을 넘어, 현실정치의 장에서 하층계급의 공동전선을 견고하게 구축할 방법은 없을까. 지난 선거들에서 진보성향 표의 상당수가 재외국민투표와 사전투표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아직까지 ‘부정선거’를 믿는 사람들은 아래 내용은 보지 않아도 된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해야하는 재외국민투표율이 점점 높아져 이제 79.5%를 기록한 점은 놀라울 정도다. 재외국민투표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18대 대선 때 40.3%였던 것과 비교하면 폭발적 증가세다. 이번 선거에서 투표 가능 연령을 18세로 낮춘 것도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지 주목할 요소다.  

선거일에 투표하기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이 미리 투표를 할 수 있게 만든 사전투표제도 역시 많은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분석이 타당하다면, 하층계급은 어쩌면 계급배반투표만을 행하는 모순덩어리가 아니라 현실정치의 변혁을 이끌어낼 역량을 충분히 보유한 저항의 주체일 수도 있다.

선거당일에도 일하는 편의점 알바와 택배기사들, 휴양지와 식당, 술집 등지에서 온종일 값싸게 부려지는 숱한 하층계급 노동자들을 우리는 쉽게 목격할 수 있다. 하층계급 대부분은 특정일에 투표할 수 있는 기회를 실질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열등한 경제조건과 척박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정상근무에 따른 추가수당’을 ‘투표권리’와 교환해야 하는 비루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사전투표제도가 하층계급 노동자들이 투표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이들의 투표율을 높이는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극우보수들이 사전투표를 극단적으로 불신하는 이유는 바로 이같은 맥락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 관심을 갖거나, 훼손된 가치들을 바로잡기 위해 내린 정치적 의사결정을 손쉽게 ‘사표’로 간주하는 판단은 분명히 잘못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젠더와 생태, 성소수자 이슈 등을 청년노동-노인복지의 문제와 결합해 사고하는 태도이며 진보정당은 이 새로운 정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 안아야 한다. 사회적 약자가 처한 위험을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만 오직 계급의 문제로만 이해돼온 ‘갑을갈등’ 혹은 ‘수저론’과 같은 사회모순과 부조리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을남’이 ‘을녀’를 차별하지 않고 ‘남성흙수저’가 ‘여성흙수저’를 혐오하지 않을 때, ‘갑’과 ‘금’도 비로소 긴장하게 된다.

그렇지만 10여년 전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에서부터 출발해 광범위한 사회적 요구로 당당히 등장한 여성들의 사회적 분노와 큰 목소리가 큰 영향력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지만, 반동 역시 만만치 않다. 여성과 성소수자들의 정치적 부상을 찍어 누르려는 남성-이성애 중심 기득권의 강고한 압력은 더욱 거대해지고 있다. 진보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일한 대선 후보 민주노동당 권영국이 대선 초기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대선후보 TV 토론에서조차도 사라진 키워드 여성, 청년, 노동, 대학을 다시 상기하게 하기보다, 극우 세력을 심문하고 질책하는 역할에만 한정된 모습으로 소비되는 현실도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진보 후보가 서로 보수임을 자처하는 모든 후보들 사이에서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애처로움과 응원의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공동전선’이라는 거대한 연대의 책임을 단 한 명의 진보진영 군소후보의 어깨에만 짊어지우는 것은 부당하다. 선거 막판 2-30대 여성들이 중심이 돼 보수 일변도 정책 대결에 제동을 걸고, 청년, 여성, 노동자 유권자들이 진보 후보를 선택하는 실천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이처럼 젠더감각의 성숙 및 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전 사회적으로 보충돼야만 진정한 의미의 공동전선 구축이 가능하다.

한국사회가 변혁을 향한 열정을 보여주었던 역사적 사례들을 살펴보면, 그것의 가장 큰 동력은 극단적으로 소외되었던 사회적 약자들의 끈질긴 저항과 투쟁이었다. 1970년대의 여공들로부터 시작해 전 생애를 걸고 사회적 금기에 맞서 싸웠던 철거민‧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유가족‧성소수자들의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누구 하나 빠짐없이 공평하고 자유로우며 안전해야 하듯, 그렇게 이룬 ‘공동전선’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정치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진짜 희망을 품게 해줄 것이다. 선거는 비록 거대정당 후보의 낙승으로 끝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진보’의 이름으로 계속 싸워야 할 많은 과제들이 우리 앞에 남겨져 있는 셈이다.

강부원(작가)
강부원(작가)

Comments


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Thanks for submitting!

  • White Facebook Icon
  • 화이트 트위터 아이콘

© 2019. RIKS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