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국회에서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었다. 대통령 윤석열은 내란죄와 직권남용 혐의의 피의자로도 입건되었으니, 살아있는 권력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법의 심판을 요구했던 검사 윤석열의 아이러니한 귀결이다. 게다가 압도적인 지지율의 차기 대권후보인 이재명 대표 또한 사법 리스크에 얽매여 있으니 대한민국의 운명이 온통 법원에 달렸다.
특정한 개개의 재판은 대체로 철학의 관심사가 아니지만 드물게도 어떤 재판은 숭고한 철학적 사건으로 격상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사형 재판이다. 이 과정을 기록한 크세노폰의 회상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고발 근거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민족의 옛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을 들여왔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타락시켰다는 점이다.
정치가였던 크세노폰은 첫 번째 고발 근거보다 두 번째 근거를, 보다 정확히 말해 두 번째 근거 이면에 숨겨진 당대의 정치역사적 상황을 더 강조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조국 아테네를 배반하고 스파르타와 결탁하여 과두정을 기반으로 한 폭정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이후 격렬한 내전을 통해 과두정을 물리치고 민주정을 회복한 아테네는 사태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따라서 크세노폰은 청렴하고 결백한 삶을 살았던 소크라테스가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서 무고하게 기소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은 후대의 연구자들에게도 이어져, 지금까지 소크라테스는 불합리한 누명에 타협하지 않고 재판관 매수나 탈옥과 같은 편법도 허락하지 않은 채 정직하게 죽음을 받아들인 철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크세노폰과 이후의 연구자들과는 달리 헤겔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소가 정당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니까 실로 소크라테스는 공동체를 갈라놓고 회복할 수 없는 해악을 불러일으킨 범죄자다. 아테네의 신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 다이모니온을 믿은 불경함이라는 첫 번째 혐의를 먼저 살펴보자.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항변하기를, 다이모니온은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신의 목소리이며 이는 신탁이나 추첨 또는 동물의 내장 위치나 새 날갯짓을 통해 전달되는 전통적인 신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리스의 신들을 배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 사적이거나 공적인 결정이 추첨이나 신탁에 의존했던 까닭은 그들이 단순히 신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인들에게 진실의 계시는 누구나 외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공식적인 형태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결정의 최종 심급은 인간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반면 다이모니온은 순전히 내면의 목소리이며,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주관적인 목소리를 결정의 최종 심급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을 행위의 주체로서 인정하게 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전통적인 신의 자리를 인간의 주관적인 자기의식으로 대체하는 전복을 행한 것이며, 결국 심대한 신성모독을 범한 것이다. 따라서 다이모니온의 목소리가 전통적인 신의 계시와 다르지 않기에 자신은 여전히 신실하다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헤겔이 보기에 실상 논점 이탈에 불과하며, 아테네인들의 고발은 소크라테스 철학의 전복적인 위험성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젊은이들을 유혹하고 타락시켰다는 두 번째 혐의에 대해서도 헤겔의 평가는 동일하다. 소크라테스는 변론하기를,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는 부모보다는 의사의 말을 듣듯이 자신은 배움에 있어서 전문가이고 배움에 있어서는 젊은이들이 부모보다 자신을 따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변론 또한 타당하지 않은데, 고발이 본래 지적하는 바는 단순히 제삼자가 부모와 자식 간에 개입했다는 점이 아니라 제삼자가 이러한 인륜적 연관을 파괴하고 양자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는 젊은이의 영혼에 불화를 심어서 아테네의 자녀들로 하여금 인륜을 저버리고 부모와 조국을 배신하게끔 하였으니, 아테네인들의 고발은 여전히 정당한 것이고 소크라테스의 자기변호는 그저 논점 일탈에 불과하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다만 아테네의 재판은 두 단계로 나뉘어 있어서, 유죄 판결 이후에는 배심원이 상응하는 처벌에 대해 다시 한번 평결을 내린다. 그 과정에서 피고는 다시금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으며, 소크라테스는 적은 표차로 유죄 판결을 받은 상황이었기에 처벌은 구류나 벌금 정도로 그다지 나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오히려 아테네인들의 사유에 크나큰 기여를 했으며 따라서 고발당할 것이 아니라 영빈관에서 대접받아야 한다고 주장해버린다. 배심원단의 심기를 거스르는 이 끔찍한 자기변호는 익히 알려진 대로 그에게 압도적인 표차의 사형 선고를 가져다주었다.
헤겔이 주목하는 지점은 마지막 구원의 가능성마저 걷어차버리고 끝까지 결백을 주장한 소크라테스의 자기파괴적 완고함이다. 이는 연구자들이 짚듯이 일정 부분 소크라테스의 정직한 품성에 의거한 것이겠지만, 더 결정적인 지점은 소크라테스가 “자기의식의 절대적인 법”을 그러니까 ‘자신의 원리를 정당하게 확신하고 이를 보편화할 수 있는 정신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1) 그러므로 헤겔이 보기에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당시 그리스 세계를 구성한 거대한 두 원리들이 충돌한 사건이다. 아테네 국가와 공동체에 의해 인정된 지배적인 관습이나 질서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사유한 법 이외에는 어떠한 외적 질서에도 복종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주체성을 맞세운다. 이제 인간은 자기 자신을 통해 진리에 도달해야만 하며, 이러한 주체성의 원리가 소크라테스 사유의 위대함이다.
소크라테스 사유의 핵심이 이러한 자기-진리에 놓여있기 때문에, 앞서 다이모니온도 전통적 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거나 젊은이들이 부모보다 나를 더 따를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논점 이탈이다. 소크라테스는 실로 사회를 혼란시키며 공동체의 가치를 전복시키고 신을 모독하는 확신범이자 더러운 죄인이다.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의 자기-진리의 원리가 기존의 전통과 관습에 궁극적으로 타락과 파멸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감하고 있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아테네 공동체의 관점에서 사형 판결은 그 자체로 정당하고 올바르다.
그러나 변증법의 중요한 원리 중 한 가지는 “더 고차적인 원리가 선행하는 원리의 타락으로 나타난다”2)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아테네인들에게 위험하고 경멸스러운 탈선으로 보였지만, 그럼에도 그 자기-진리의 원리는 그리스 공동체가 이미 잉태하고 있었던 타락이다. 예컨대 당대의 소피스트들은 자신의 순전히 주관적인 주장을 궤변으로써 정당화하고 관철하는 기술에 열중했었으니, 이는 보편에 맞서는 특수한 개인의 등장이었다. 따라서 아테네 공동체를 더럽히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실상 그 공동체에 내재된 분열을 첨예하게 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뒤늦게서야 자신들이 이미 이러한 분열 속에서 살아왔음을 깨달은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의 사형 판결을 철회하고 오히려 멜레토스와 같은 고발자들을 사형 혹은 추방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크라테스 사후 아테네의 몰락을 막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리스는 세계사에서 물러나지만 그럼에도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새로운 자기-진리의 주체성은 공동체의 새로운 원리가 되어 이후의 역사 속에서 실현되어 간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진리였으며, 소크라테스의 원리는 그리스 공동체 내에서 그리스 공동체를 침식시키는 그 공동체 자신의 고유한 원리였다. 아테네는 자신의 정신이 분열과 갈등 속에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에 무지했으며, 이미 죽은 그리스의 정신은 아테네의 멸망으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외상적인 진리였던 것처럼, 대통령 윤석열은 대한민국 보수의 진리다. 그의 비합리적인 자기파괴적 결단이었던 12.3 비상계엄은 자유민주주의를 숭상한다는 보수의 정신과 함께 두 시간 만에 공멸했다. 대한민국 보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미 첫 번째 죽음을 겪었으나, 기득권을 쇄신하고 새로운 자유의 가치를 창출한다는 진짜 해결책 대신, 신선한 외부 인사를 영입하고 여타의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손쉬운 가짜 해결책에 의존했다. 그렇게 철 지난 반공 이데올로기와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분열된 보수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망각해 계속 살아있는 《식스 센스》의 유령처럼 자신이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에 무지함으로써 게다가 완고하게 무지하고자 함으로써 계속해서 살아있을 수 있었다. 따라서 윤석열의 독재적 사고방식은 유령처럼 가냘프고 빈곤한 보수의 필연적인 종착지에 불과하다. 12.3 비상계엄은 전통적인 보수의 가치가 효력을 다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망 선고인데, 보수는 처음의 죽음을 제대로 죽어내지 못해서 마침내 두 번 죽어야 하는 운명에 부딪히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죽음은 어떤 새로운 추가적인 죽음이 아니라, 너는 이미 죽어 있다는 사실의 단순한 재확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여당 국민의힘은 운명을 외면하면 운명이 비껴가는 것인 양 기어코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 성급하게 탄핵을 해서는 안 된다, 민심을 곧바로 따르는 중우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잡범을 새로운 대통령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류에 대한 두려움은 이미 오류 자체이다”3). 국정 책임자였던 여당은 자신의 오류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태도 자체가 오류이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지 않고서 진리를 구해내겠다는 신념은 그 분주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상 진리와의 조우를 영원히 지연시키는 강박증적 태도와 다르지 않다. 이는 실로 오류 없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에 대한 직접적 인식에 근거하여 오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스스로의 오류를 인정하고 그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진리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언제나 오류의 진리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적 진리인데,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는 아포리아의 미로 속에 내맡김으로써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는 역설적 진리에 도달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무지와 실패 속에서도 여전히 가장 현명한 자일 수 있던 것이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탄핵에 찬성한 김상욱 의원에게 “윤석열의 주검 위에서 우리는 올바르게 설 수가 없어”4)라 말하며 그를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주검 위에서 자기-진리의 원리라는 세계사적 전환이 일어난 것처럼, 보수가 뼈를 바꾸어 끼고 스스로의 태를 빼앗음으로써(換骨奪胎) 고통스러운 죽음을 제대로 죽어낸다면,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 끝내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1) 남기호, 법철학적 관점에서 본 소크라테스의 죽음 - 헤겔의 『철학사 강의』를 중심으로, (2019): 24p.
2) Hegel,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Weltgeschichte, Meiner, (2015): 337p.
3)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Meiner, (2018): 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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