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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된 세계, 전도된 공동선 / 윤종환

소셜미디어 시대의 공동선


어떤 대상을 싫어하고픈 마음에 익명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만들어본 적. 그 계정으로 혐오와 냉소를 쏟아내는 사용자를 보게된 적. 이해되지 않는 이념과 현상에 욕 해본 적. 동조하는 게시물을 발견하면 관련 댓글을 확인하며 ‘좋아요’, ‘하트’, ‘공감’, ‘대댓글’ 수를 통해 다수의 생각을 염탐해본 적. 그중 하나에 수를 보태어 본 적. 익명의 공동체에 참여하며 사소하지만 분명한 즐거움이나 해방감을 느껴본 적. 이러한 경험이 실제로 있었든 없었든, 우리는 이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세상에 함께 살고 있다. 본래 어떤 것을 싫어하거나 싫어하고 싶다는 충동은 자기 보존, 경계 설정, 정체성 유지과 관계된 정서적 본능에서 비롯된다.

이는 단순한 성악 본성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기쁨을 감소시키는 원인에 대한 정념의 문제다. 그리고 이 정념은 또다른 사고(思考)와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앞서 든 행위와 반응은 개인의 경험이든 간접 경험이든 온전히 억압하기 어렵다. 그것은 온라인이라는 가시성의 네트워크에서, 익명의 불특정 다수가 형성하는 사회적 존재 방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념의 사회적 순환은 개인적 성향에서만 비롯되기보다는,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기술적 환경 속에서 특정 방식으로 매개되고 증폭된다.

문제는 이 과정이 ‘추천 시스템’으로 매개된다는 점이다. 우선 알고리즘과 추천 시스템은 엄밀히 같은 개념이 아니다. 기생적 포함 관계로 보아야 한다. 알고리즘이 ‘입력된 명령어에 따라 정해진 규칙과 단계를 거듭해 결과를 출력하는 절차’를 가리킨다면, 추천 시스템은 ‘사용자에게 무엇을 보여줄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설계’에 가깝다. 즉, 추천 시스템은 알고리즘을 도구로 삼아 사용자의 효율적인 선택과 결정을 유도하는, 보다 목적론적인 조작인 셈이다. 추천 시스템에는 알고리즘을 활용하고 있는 행위자가 분명히 있다는 뜻이다. 이를 고려컨대 ‘알고리즘에 이끌렸다’는 막연한 판단보다는 ‘누군가로부터 추천 받고 있다’는 감각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웹 미디어 상에서의 경험은 누군가의 적극적인 추천 조작이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는데, 이때 그 경험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사역성使役性을 고민해보는 것이다. 사용자가 온라인에서 무언가에 긍정, 공감, 동의할 경우 이게 온전히 자기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그리하도록 부추겨진 나’로서 그 추천을 대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피추천인 다수가 형성하는 소셜미디어라는 공적 공간은 제법 문제적인 공간으로 보여진다. 친한 친구에게 책 한 권, 음식 하나 추천하는 데에도 적잖은 시간이 드는데,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천 수만 명에게 단박에 추천을 잘해내는 판단의 권위자가 우리를 한 공간에 머물도록 했다면? 과연 그 공동체에서 기능 중인 공동의 선good이 무엇이며, 그때 공동선은 어떻게 다시 이해되어야 할까.



추천시스템이 아웃소싱한 공적 판단력


추천 시스템이 강력히 작동하는 온라인에서의 공동선은 어떻게 형성될까. 그것은 플랫폼이 가시화한 정동적affecive, 情動的 반응의 총량을 통해 대리구성된다. 즉, 공동선은 외주화된 공적 판단의 형식을 띤다. 공동선the common good은 이론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되어오긴 했어도 대체로 한 공동체에서의 가치나 이익으로 지시되어 왔다. 또한 ‘실현되어야 할 선’, ‘공동체의 목적’, ‘규범’과 같이 “무엇이 우리 공동체에 좋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이 답을 내리기 위해 기나긴 대화와 토론도 따랐다. 하지만 추천 시스템이 지배하는 웹 소셜 공간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공동선은 의미론적으로 기능하지 않고 형식적 장치로 작동한다. 쉽게 말해 사람들이 공공적으로 옳거나 좋은지를 물음으로써 장기간 형성되는 내용이 공동선인 게 아니라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시스템이 이미 ‘공공적이다’라는 선험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효과는 수치로 가시화된다. 반응댓글·대댓글·저장, 좋아요하트·최고예요, 재게시리트윗·리그램·공유의 수처럼 마치 가수가 선택한 의견의 집합처럼 보이게 한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의 판단이 합리적 이성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여러 연구가 밝혀온 사실이듯 판단과 결정에는 정서적 반응까지 깊이 얽혀 있다. 그런데 소셜미디어에서는 사유의 과정보다 그 결과 반응의 총량을 ‘좋은 것’으로 우선 배치한다. 이는 특정 감정을 사회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증폭시키거나, 나아가 당위적인 감정으로 표준화할 위험까지 있다. 물론 전체 인구에 비해, 한껏 양보해 웹사이트의 총 이용자수에 비하더라도 그들은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플랫폼 사회에서 그들이 소수라는 사실은 큰 고려사항이 못된다. 그들이 유사-다수pseudo-majority일지라도, 사용자 개인에게 압도적 다수처럼 보이고 그리 느껴지면 공공성은 정동적으로 부여되기 때문이다.

가령 근거가 부족한 단순성 게시물에 ‘좋아요’가 무려 4만 개가 눌려 있다고 하자. 댓글도 2천개씩이나 달려 있다. 한 개의 포스팅에 대하여 백 명의 관심 받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현실에서 4만 여개의 관심은 사용자 입장에선 집단적 합의처럼 느껴진다. 수가 압도하는 느낌·기분·분위기에 동요된 개인은 이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것을 ‘공적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이 과정이 바로 판단의 외주화이다. 세계에 대한 해석 이전에 해석의 방향을 정동적으로 학습하는 것도 문제지만, 거기에 동의/비동의나 윤리적/비윤리적이라는 판단을 더하고픈 욕구, 사회에의 참여 욕망을 느끼는 다수가 댓글창을 열어보며 유사-다수라는 공동체를 경험하는 점도 문제적이다. 그곳엔 ‘공감순’, ‘추천순’, ‘대댓글순’이라는 정렬 기능이 존재한다. 첫 게시물로부터 부수된 또다른 반응들이 정렬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심히 보면 이 정렬 방식이 결코 ‘객관적 내림차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정 관점의 댓글들이 우선 배치돼 있다. 사용자는 다수의 지지를 받은 듯한 게시물, 그리고 그 안에서도 다시 다수의 동의를 얻은 듯한 댓글을 반복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쾌로든 불쾌로든 정동적 변이를 즉각 경험한다.

그리고 이 즉각성이 사용자를 공동체에 계속해서 머무르도록 한다. 상위에 노출되는 댓글이 늘 충분한 근거를 갖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노출되는 이유는 사용자 개인의 알고리즘이 아니라 매체의 의도에 있다. 기본적으로 소셜미디어는 사용자를 그 안에 오래 잡아두어야 하는 매체다. 체류 시간이 길어야만 이용자 데이터를 수월하게 수집하여 사람들의 소비와 선전, 광고 전달을 효율적으로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유와 평등을 내세워 돈을 버는 가짜 구세군 역할도 마다치 않는다.

가시화된 유사-다수는 게시물의 진리성, 도덕적 정당성 판단, 사회적 숙고를 거쳐 형성되지 않는다. 대개는 자기 보존·경계 설정·정체성 유지과 관계된 본능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온라인 환경은 그것들이 공공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장치화되어 있다. 이때 사용자 개인은 FOMOFear of Missing Out1)에 자극 받는다. 혹은 그 집단적 공동선에 불쾌와 거부 동시 경험한다. 플랫폼은 이런 정동을 조작해 반응 데이터까지 능히 수집해내고, 여기에 오피니언 마이닝을 거쳐 더 정교한 맞춤형 추천 시스템을 구축한다. 이는 전형적인 기업의 프로세스와 닮았다. 아니, 기업의 프로세스 그 자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공공의 장이라 여기는 온라인 플랫폼은 모두 사기업인데, 사기업은 이윤 창출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 플랫폼들을 합리적인 담론 형성의 장으로 사용한단 의미를 부여해 그렇게 전유하고 또 그런 듯해도, 그러할 자율성까지를 소비자의 권리로 받아들여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무리 없이 안착되고픈 욕망을 피할 순 없다. 우리는 우리의 숨은 욕망을 전유하는 이 비즈니스 법칙을 쉽게 잊는다. 부러 잊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저마다의 닉네임으로 공동체원이 되었다 느끼는 작금의 상황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탁월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소셜미디어 시대의 공동선은 전통적 방식으로 형성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기존에는 ‘의미→정동→판단’의 흐름에 의해 공동선이 만들어졌다면, 이제는 ‘정동→의미→판단’의 순서로 뒤집어진다. 즉, 정동 정치에 의한 전도된 매커니즘이 작동하는 상황이다. 웹 플랫폼 안에서 어떤 의제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든 반대하는 사람이 많든, 기업의 이윤에는 사실 어떤 타격도 없다. 플랫폼 입장에선 가시화된 유사-다수를 둘러싼 사람들의 정동을 보다 잘 조작함으로써 공동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중이라는 환상이 사람들에게 지속될수록 좋을 뿐이다. 그 상징계를 지속시킬 수 있게 적절한 추천 시스템을 적시에 투입시키고 손 떼는 게 회사 입장에서도 편익하기 때문이다.




소극적 능력으로 전도된 공동선 탈환하기 


온라인 사회에서의 공동선의 위기는 시민의 도덕적 타락이나 개인적 이기심이라는 추상적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추천 시스템’이 생산하는 구조적 조건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소셜미디어에서 공동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개와 고양이 싸움으로 분열만 가속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면, 이는 자연스러운 감응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원인을 플랫폼과 자신이 맺는 상호반응의 구조로부터 찾지 않는다. 오히려 전이 가능한 특정 혐오 대상으로부터 찾는다. 특정 국가가 개입했다거나, 어떤 정치인·정당이 조작했다거나, 실체 없는 이념주의자들이 선동했다거나 하는 식이다. 또는 집단적 분노를 덮어 씌울 적절한 대상을 물색해 희생양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게다가 전이 대상을 곧장 찾도록 추천해주는 시스템도 이미 마련돼 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을 합리적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라 할 수 있을까? 그 안에 오래 머무르는 게 공동선을 형성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을까. 온라인 세계에서의 공동선은 붕괴된 것이 아니라 전도顚倒돼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무너진 적 없는 무너진 성을 다시 재건하자는 관점보다, 나도 모르게 빼앗긴 나의 성을 자각하고 성을 탈환할 의지가 요청되는 요즘이다.

따라서 온라인 추천 세계에서 전도된 공동선을 사유한다는 것은 대안적 규범을 새로이 발명하는 일보다도, 무엇이 공동체에 좋은지를 숙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조건 되묻기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첫째, 다수성으로부터 책임성으로의 전환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공동선은 책임의 문제와 자주 결부돼 있었다. 하지만 추천 시스템에서는 다수성에 의해 책임성이 잘 은폐된다. 사용자는 다수의 의견에 그저 한 사람으로서의 의견만 보탰거나 이미 누구나 그렇게 느끼는 것에 자기 감정을 덧붙인 것일 뿐 아무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한다. 이를 적극 유도한 플랫폼 역시 알고리즘적 중립성을 주장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익명의 일개 한 사람일 뿐’이라는 자기 인식이 유사-다수를 발생시키는 데에 기여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둘째, 표현의 자유에서 노출의 윤리로의 전환이다. 살펴왔듯 추천 시스템이 작동하는 사회에선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 유무보다 정동적 증폭의 매커니즘이 문제다. 이곳에서의 문제는 표현의 권리가 억압되느냐 마느냐보다, 무엇이 다수의 반응인 듯 노출되는가가 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좋은가?’ ‘옳은가?’를 따지기보다 ‘왜 나에게 이런 게 보이지?’, ‘무엇에 의해 노출되지?’를 반복해 묻는 태도가 절실하다.

셋째, 즉각성으로부터 소극성으로의 전환이다. 추천 세계에서의 즉각성은 핵심 동력이다. 정동적 반응, 가시성의 실시간 피드백, 판단 자동화의 매커니즘 모두 여기에 의존한다. 기존의 정치철학에서는 자본주의가 거리의 팽창을, 사회주의가 시간의 재구성을 도모한다고 보았지만, 온라인 플랫폼 세계에서는 자본주의가 시공간 그 자체를 즉각적 경험의 조건으로 점유한다. 이에 정동적 거리화나 숙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시인 존 키츠John Keats가 말한 ‘소극적 능력negative capability’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소극적 능력이란 ‘사실과 이성의 작용에 따라 성급히 도달하려 들지 않은 채, 불확실성·신비·의심 속에 머무를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이 개념은 영미문학게에서 오랜 시간 수동성의 지표로 간주되거나 낭만주의 미학의 한계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미적 정치를 꿰하는 중요한 감수성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유종호도 일찍이 이를 세계와 사물의 복합성을 인식하는 능력으로 재해석하며 소극적 능력이 사실 “주체성의 징표”임을 강조(「가망 없는 희망」, 『문학의 즐거움』, 민음사, 1995)한 바 있다. 우리는 소셜미디어 공간에서의 소극적 사용자가 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 느린 공동체원으로서 공동선의 조건을 다시 물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온라인과 소셜미디어 플랫폼 세계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는 그 사용자로서, 그 안팎에서 구성되는 존재이자 동시에 그것을 재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다. 추천 시스템의 정동 정치가 일상화된 시대, 감정적 판단이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는지 사유할 수 있는 반성적 주체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공동선 회복 가능성은 제도적 개혁이나 기술적 수정 이전에, 각자가 어떤 추천 구조 속에 배치돼 있는지 그 조건을 물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기계적 중립성 운운하면 그만인 알고리즘이 아니라 그 세계 내의 존재인 우리에게 윤리적 책임이 귀속될 것이다. 귀속된 책임을 다시 화두로 꺼내올리며 논의를 만들어가야할 것이다. 이 계절이 공동선을 만드는 권리를 탈환해내기 가장 좋은 계절이 아닐까. 그 계절은 다시 오고 또 온다.



*이 글은 투고원고로서, 릴레이칼럼에 손님자격으로 게재합니다. -웹진 편집위

1) FOMO는 원래 ‘소외될까봐 두려운 마음’을 뜻하며 약자 증후군·고립 공포를 지시하는 말이었으나, 소셜미디어가 전방위로 영향을 미치며 화제성을 이끄는 오늘 날 그 유행이나 조류에 뒤처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까지 넓은 차원에서 이해된다. 



윤종환(시와 평론을 쓰는 한국문학자. www.JonghwanYoon.kr)
윤종환(시와 평론을 쓰는 한국문학자. www.JonghwanYoo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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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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