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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교실 2026 , 새 학기를 맞이하는 교수자들께 / 오영진

1990년대 후반에 〈폭력교실 1999〉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영화가 있었다. 원제는 <Class of 1999>이고, 학교가 갱단과 폭력에 잠식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삼는다. 영화가 상상하는 미래 교실의 공포는 폭력이다. 복도와 교실에서 학생들이 폭력으로 대화를 하고 질서가 무너진다. 이에 대한 학교의 해법이 물리적 대응으로 제안된다. ‘인간 교사로는 감당이 안 된다’는 진단이 먼저 나오자 그 공백을 메운다는 명목으로 사이보그 교사가 투입된다. 기계 교사는 웃지 않고 망설이지도 않으며 곧바로 처벌을 일삼는다. 영화보다 훨씬 더 미래인 오늘날 2026년의 교실을 떠올리면, 영화가 보여 준 장면은 정말 너무도 낡은 공포처럼 보인다.

지금 교실의 위기는 총과 칼이 아니라 기계문장의 그럴듯함과 상호의심이 만들어 가고 있다. 폭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폭력의 형태가 바뀐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다. SF영화 속 폭력은 학생과 선생이 서로의 전쟁을 벌이며 발생했다면, 지금의 폭력은 상호신뢰의 순환이 끊어지며 학습과정의 흔적이 지워지며 발생한다. 이제 학생과 선생은 서로를 의심하고 뒷조사하는 심리적 전쟁을 벌인다. (당신 AI로 답변했지?, 아니 그러는 당신도 AI로 가르쳤지?) 우리는 이것을 유령학습(Ghost Learning)의 비극이라 불러볼 수 있겠다. 성적표와 제출물에는 학습의 흔적이 찍히지만, 학습자 내부에는 어떠한 학습 형성(formation)도 축적되지 않는 상태, 결과는 남는데 과정이 남지 않는 상태다.


이제는 수업 중에 필기하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학생들은 녹음해서 ai를 통해 수업자료를 만들고 있는데, 그렇다면 저의 수업내용이 계속 학습되고 있다는 것인지 우려스럽기도 합니다. 논술형 과제는 제가 수업에서 소개한 개념들이 아닌 글들로 가득하고, 그러한 내용은 비단 한두명이 아닙니다.

참가자 김0경


유령학습이 무서운 이유는 침투과정이 조용하기 때문이다. 문장은 점점 더 매끈해지고, 구조는 더 표준화되며, 반론과 참고문헌 형식까지 갖춘 결과물이 늘어난다. 누군가는 학부생도 연구자급 논문을 생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AI를 경유한 학습이 가속화되어서가 아니라, 학습의 표정을 만들어내는 비용절감이 가속화되어 나타나는 착시에 가깝다. 학습의 결과를 증명하는 문장 속에서 거친 초고가 생략되고, 막힘과 고민의 흔적이 사라지고, 수정의 이유가 사라지고 있다. 학생이 어디에서 막혔는지 교수자가 읽을 수 없게 되고, 학생 역시 어디에서 막혔는지 말할 기회를 잃는다.

교수자는 이제 무엇을 하게 될까? 피드백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판정을 수행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반대로 학생은 무엇을 하게 되는가. 탐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을 방어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면 교수자의 노동은 수사하는 행위로 이동한다. 이 논리에 이르니 갑자기 떠 오른 생각이 있다. AI가 갑자기 이런 교육풍경을 만든 것이 아니라 AI가 기존 교육의 치부를 가속화했다는 점이다. 지난 1월 초 서울과기대 논리적 글쓰기 콜로키엄 <ChatGPT 뒤에 선 학생, 그 앞에선 교수>의 교수자 청중 사전설문에서 주로 나왔던 표현은 '의심'이다. 이 키워드가 들어간 설문내용만 무려 34건이었다.



학생의 생각이 담긴 초고가 나오면 교수자의 피드백이 붙고, 수정이 일어난다. 이 관계에는 우리가 그동안 인지하지 못했던 신뢰가 작동한다. 모든 것을 자본으로 은유화하는 습관에 반대하지만 이 관계의 기능이 분명히 작동하고, 또 작동하지 않을 때 새로운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를 '신뢰자본'이라고 명명해 볼 수 있다. 반대로 신뢰자본의 교환이 깨질 때 교실은 검증의 전쟁터가 된다. 모든 문장이 직접 인간이 썼다는 담보를 요구하고 모든 과제가 증거를 요구한다. 그 순간부터 교실의 비용-교육공학 툴의 개발, 구독, 확산-은 폭증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당연히도 그 비용청구는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대개 현장의 교수자가 더 많이 떠안는다. 의심이 늘수록 검증이 늘고, 검증이 늘수록 피드백이 줄며, 피드백이 줄수록 학습은 더 얇아지고, 얇아진 학습은 더 많은 외주와 더 많은 의심을 낳는다. 유령학습은 악순환을 가속하는 엔진이 된다.



지난 제1회 서울과기대 교양대학 논리적 글쓰기 콜로키엄의 발표들은 금지와 허용의 입장 차이보다도 질문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실천적인 몸짓이었다. 안서현 교수(홍익대)는 윤리 가이드라인만으로는 이 사태가 정리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생성형 AI 문제는 사용자가 규범을 잘 몰라서 선을 넘는 구조라기보다, 애초에 레포트 제출을 자연스럽게 제안하고 숨바꼭질을 유도하는 설계를 품기 때문이다. 안교수는 본문을 판정하는 도덕재판보다 참고문헌의 실재 여부를 겨냥하자고 주장했다. 문장 톤은 얼마든지 인간처럼 고칠 수 있어도, 존재하지 않는 문헌을 그럴듯하게 꾸민 흔적은 사실 확인 앞에서 무너지기 쉽다는 판단이다. “이 참고문헌은 어디에 있었지”라고 묻는 쪽으로 교실의 질문을 바꾸기 위해 직접 노할루(No Hallu)라는 앱까지 만들었다. 교수자가 솔루션 소비자에 머물지 말고 규칙 설계자이자 도구 제작자가 되어야 한다는 안교수의 메시지는, 내가 앞에서 말한 신뢰자본의 문제를 아주 실무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신뢰는 마음의 선의로 지켜지기보다, 상호 확인 가능한 기술적 응대로 지켜진다.

노연숙 교수(서울대)의 발표는 AI 시대의 글쓰기 문제를 생성에서만 찾지 않겠다고 하면서, 이미 읽기가 무너진 자리에서 쓰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문제가 더 커진다고 보았다. 이 진단은 중요하다. 우리가 자꾸 최종 결과물만 들여다보며 의심의 눈을 키우는 동안, 학생들이 텍스트를 실제로 어떻게 읽고 어떤 문장에서 걸려 넘어지는지는 점점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교수는 퍼루절(Perusall)을 활용해 줄 단위의 주석과 반응을 수업의 재료로 남긴다. 그러면 질문도 달라진다고 한다. “AI 썼니”가 아니라 “어느 대목에서 어떤 반응을 했니”가 중요해 진다. 읽기의 흔적이 수업 안에 공동으로 남는 순간, 교실은 다시 탐구와 반응이 오가는 장소가 된다.

박숙자 교수(서강대)의 발표는 공동읽기의 또 다른 층위를 보태 준다. 그녀는 대학 초입의 학생들을 이미 능숙한 필자로 상정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자기 글을 써 보아야 하는 사람들, 아직 초고가 납작하고 논지의 골격이 약한 사람들로 본다. 그래서 자신감이 낮을수록 AI가 더 달콤한 유혹이 되고, 그 결과 경험은 사라지고 추상적 일반론만 늘어나 글이 더 납작해진다고 본다. 유령학습의 유혹에 약한 존재들이라는 말이다. 박교수는 금지냐 허용이냐의 이분법 대신, 글쓰기를 다시 사회적 행위로 배치하자고 주장한다. 박교수는 패들렛과 노션, 구글독스 같은 협업 공간에서 초안을 공유하고 동료 피드백을 돌리며, AI는 생성기보다 피드백과 토론 쪽에 더 강하게 놓는다고 한다. 특히 먼저 자기 머리로 쓰고 그다음 AI를 활용하는 순서를 설계해야 학습효과가 살아난다고 보는 대목이 중요해 보였다.(프롬프트 기반 AI생성물을 만들더라도, 1차적인 초고는 인간이 먼저!)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어 이해했다. 문제는 AI의 사용유무가 아니라, AI가 학생보다 먼저 생각의 형태를 선점하는 순간이다. 그 선점이 반복되면 학생은 자기 생각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외양을 가져다 다듬는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러니 생각의 탑을 쌓기 위해 AI를 사용하는 순서를 교육하는 일이 글쓰기 혹은 교양과목에서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은수 교수(서울대)의 발표는 한층 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읽고 쓰는 문제를 기술자에게 외주화하면 결국 실패한다고. 이 말은 지금 교실의 가장 위험한 유혹을 정면으로 찌른다. 문제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외주화를 꿈꾼다. 탐지 도구에 외주를 주고, 정책 문구에 외주를 주고, 플랫폼에 외주를 준다. 그러면 일이 정리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인 경우가 많다. 이교수는 읽기의 단계를 분리하고 연결을 강제하는 세미콜론이라는 플랫폼을 직접 만들면서, 혼자 읽기 단계에서는 타인의 흔적을 차단하고 먼저 자기 생각을 남기게 하며, 함께 읽기 단계에서는 다수의 생각을 시각화해 다시 연결했다. 규모가 커질 때 AI를 대체의 도구가 아니라 지도화의 도구로 쓰겠다는 태도다. 즉 AI는 생각을 대신 쓰는 기계가 아니라, 이미 나온 생각들의 지형을 보이게 하는 기술로 한정한다. 이 태도는 아주 중요해 보인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답안을 대신 생산하는 기계가 아니라, 학생과 교수자가 사고의 지도를 함께 읽을 수 있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유령학습의 반대는 생각이 형태를 갖추는 중간이 보이는 교실이다. 교실 속 신뢰자본의 회복도 바로 거기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의 문장을 무조건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교실이 서로를 판정하는 법정이 아니라, 서로의 중간을 읽어 줄 수 있는 생각의 작업장이 되게 하자는 말이다. 그래서 지금 더 많이 필요한 질문은 “이 문헌의 어느 대목이 네 문장 안으로 들어왔니?”, “어느 문장에서 막혔고 그 막힘은 어떻게 풀렸니?”, “처음 초고와 지금 문장 사이에서 무엇이 바뀌었니?” 같은 질문이다. 결과를 심문하는 대신 과정을 붙잡는 질문, 광택을 판정하는 대신 마찰을 그대로 기록하고 의미화하는 일이 교육에는 필요하다. 학습이 다시 순환할 수 있도록 교실의 구조를 짜는 일, 초고와 메모와 주석과 토론과 수정의 흔적이 성적표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게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교수자 한 명이 3-40명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은 학생을 두고 한 학기 수업을 진행하는 현실에서 그 중간과정을 읽을 시간은 어디서 확보할까? “어디에서 막혔는지 말해 보라”고 묻는 것은 아름다운 교육적 질문일뿐 저절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일일이 초고를 읽어야 하고, 주석을 확인해야 하고, 수정의 방향을 코멘트해야 하고, 학생마다 다른 막힘의 결을 구분해야 한다.(제 아무리 기술을 사용해도) 이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의 문제이고, 시간과 비용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문제를 단지 인간 교수자가 더 정성을 들이면 된다는 식으로 쉽게 처방하면 안된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익숙한 착취의 구조로 돌아간다. 시스템은 그대로 둔 채 교수 개인의 헌신과 소진에 기대어 문제를 버티게 하는 방식 말이다. 실제로 많은 대학이 지금도 거의 그런 방식으로 간신히 유지된다. 대형 강의와 과밀한 수강 인원, 연구와 행정과 평가가 한꺼번에 얹힌 교수노동, 점점 얇아지는 튜터링과 조교 체계 위에서, 교실은 이미 최소한의 균형으로 버티고 있다. 이 위에 “이제는 AI 시대이니 학생 한 명 한 명의 과정까지 더 정밀하게 읽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맞는 말이면서 무책임한 말이다. 더 적은 학생 수, 더 많은 지원 인력, 더 강한 튜터링 구조, 학습 피드백 노동을 실제 노동으로 인정하는 제도적 전환이 필요하다. 대학 시스템은 오랫동안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더 많은 학생을 한 번에 수용하고, 더 적은 인력으로 운영하며, 정량화하기 쉬운 성과를 앞세우고, 돌봄과 피드백과 과정 설계 같은 노동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부차적 노동으로 밀어낸다. 이런 구조 위에서 생성형 AI가 등장하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무슨 일을 당하는지) 우리는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문장 생산 비용이 급격히 낮아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문장을 검증하는 장으로 되돌리는 쪽으로 비용이 높아지려 한다.

곧 사람의 시간을 더 쓰지 않으면서도 공정함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육기술 장치가 나올 수 있다. 이를테면 더 정교한 탐지 시스템, 더 자동화된 판정 체계, 절대 피곤하지 않은 에이전트 교수자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버전으로 돌아온 사이보그 선생이다. 1990년대 영화가 금속 팔을 가진 교사를 상상했다면,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사이보그 선생은 플랫폼과 알고리즘과 자동화된 평가 규칙을 등에 업은 교수자다. 그는 지치지 않고, 편파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며, 방대한 제출물을 빠르게 가른다. 공명정대함의 대가로 교실은 더 깊이 법정화된다. 학생의 문장은 생각의 시도가 아니라 심사의 대상이 되고, 교수자의 역할은 성장의 동반자가 아니라 인증과 감별의 관리자 쪽으로 이동한다.

교육은 원래도 값싼 일이 아니었다. 학생의 성장에 필요한 시간, 교수자의 피드백에 필요한 시간, 서로의 중간을 읽어 주는 데 필요한 시간은 늘 교육의 핵심 비용이었지만, 대학은 그것을 자주 사명감이나 헌신의 이름으로 할인해 왔다. 생성형 AI는 그 숨겨진 비용을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만들었다.

AI가 교실에 들어왔기 때문에 무엇을 금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AI가 교실에 들어온 지금 어떤 종류의 인간적 관계와 노동을 끝까지 지켜내고 구조를 새로 짜 지불할 것인가를 제대로 묻자. 이 문제에 대한 공론장 세우기가 시급하다.


*퍼루절(Perusall)'은 학생들이 읽기 자료를 함께 읽고, 의견을 나누며 협력 학습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온라인 협업 독서 플랫폼이다. https://www.perusall.com

**세미콜론(semicolon)은 혼자읽기, 태깅, 함께 읽기 등 읽기를 여러 단계를 분리한 툴이다. 퍼루절, 하이포테시스같은 도구가 있지만 로열티를 내고 싶지 않고 교육 데이터는 우리가 관리해야 한다는 취지로 서울대 이은수 교수가 개발한 플랫폼이다. www.semicoloni.com

***안서현 교수가 만든 참고문헌 체크 앱 '노할루'의 깃허브 주소는 다음과 같다.


오영진(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교수)
오영진(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교수)




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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