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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사료 총서의 지성사 - 매천야록(1955)에서 삼봉집(1961)까지 / 노관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1집은 1955년 삼일절에 발간된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이다. 매천야록? 뜻밖이다. 매천야록은 ‘야록’이다. 야록이 사료, 그것도 한국사료총서의 제1집에 어울리는 글인가? 이선근(국사편찬위원회장 문교부장관)의 서문을 들어보자. 이 책은 ‘고종과 척신의 난정’, ‘탐관오리의 비행’,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악행’을 규탄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왜적과 투쟁하다 쓰러진 의병과 의사’를 기록한다. ‘일제의 간계와 중국과 러시아의 흉계’를 폭로한다. 이야말로 춘추필법의 역사서이다. 독자는 의분을 참지 못한다. 절로 애국심이 치솟는다. 그러하니 매천야록은 공공 분야(정치, 교육, 행정 등) ‘일반 인사의 교양서’이다. 중등 교육 ‘역사 교원의 참고서’이다. 간행 취지가 명확하다. 지금도 매천야록에 기대어 이승만 시절의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일은 없는지 의심할 일이다. 


총서는 서문과 함께 사료 간행 경위를 알려주는 해설을 수록했다. 매천야록 해설 집필자 신석호는 저간의 사정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1939년 의병 사료를 수집하러 전라북도에 출장을 갔다가 남원 사는 박정식 집에서 우연히 매천야록 사본을 발견했다. 곧바로 황현의 본가에 찾아가 원본의 차람을 청했으나 그런 책이 없다고 거절당했다. 결국 조선사편수회에 돌아와 그 사본의 부본을 작성하고 이를 비밀로 했다.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 이번에는 국사편찬위원회 총서 간행의 사명을 안고 다시 황현의 본가에 찾아갔다. 이 때 비로소 매천야록 원본 및 김택영의 교정본까지 실견했으니 사료 간행의 준거 문헌을 확보한 셈이었다. (참고로 황현의 벗 김택영은 일찍이 조선시대 역사서 한사경(韓史綮)을 편찬하면서 매천야록의 존재를 공개했다. 조선으로 유입된 한사경은 유림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켰고 매천야록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 

신석호 회갑 기념 초상화
신석호 회갑 기념 초상화

신석호의 해설은 총서 간행의 초기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사편수회 시절 필사한 사료가 있다면 이를 활용하되 원본을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도록 한다는 것. 그렇지만 매천야록은 운이 좋은 사료였다. 총서 제6집으로 간행된 어윤중의 종정연표(從政年表)와 김윤식의 음청사(陰晴史)는 끝내 원본 확인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종정연표는 1930년 어윤중의 일족 어익선의 소장 원본을 등사한 사본이라는 것, 음청사는 1938년 김윤식의 어떤 후손의 소장 원본을 등사한 사본이라는 것, 그런 내력을 밝히는 데서 그쳤다. 신석호는 사본 제공자의 인적 사항을 모르거나 알아도 주소나 생사를 모르는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총서 제11집으로 김윤식의 속음청사(續陰晴史)를 간행하면서 그 기분이 조금 풀렸을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김윤식의 증손 김주룡(서울 성북구)이 소장한 김윤식 친필 원본의 입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만 속음청사의 내용이 방대해서 제목 그대로 날씨의 음청(陰晴)만 기록한 일기, 동일인의 일상적인 왕래를 기록한 일기, 그리고 일기에 포함된 한시 등은 총서에 넣지 못했다. 그는 속음청사의 차람을 주선한 성균관대 임창순의 도움을 잊지 않고 적었다.


총서의 간행은 사료의 이미지를 제공하는 영인 출판이 아니라 텍스트를 제공하는 활판 출판이었다. 원본 대조 없는 사본 간행도 문제이지만 교정 보증 없는 원본 간행도 위험이 있었다. 그렇게 볼 때 신석호가 가장 안심했을 총서는 제3집으로 간행된 이기의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아니었을까. 그는 서울대 김상기를 통해 정인보가 교열한 원본을 구한 다음 총서 간행이 의결되자 이를 조금도 변경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 출판했다고 밝혔다. 교열자의 권위가 간행자의 수고를 덜어준 셈이다. 다만 그는 이기의 후손을 만나지 못하고 해설 원고를 쓰게 되어 미안해했고 지면으로 사과했다. (참고로 그는 총서 제12집 박제가의 정유집을 간행할 때에는 후손을 찾기 위해 신문 광고를 누차 냈다.)


신석호의 미안함은 총서의 발간에서 사료 채방(採訪)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사료의 수집과 공간(公刊)을 하나의 역사 드라마로 본다면 그 드라마의 필수 장면으로 총서 해설 필자와 사료 소장 유족의 만남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신석호에게 가장 인상적인 추억을 선사한 사료는 총서 제4집 장지연의 위암문고(韋庵文稿)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1940년 역시 의병 사료를 조사하러 경상남도 마산에 갔고 현지에서 장지연의 장남 장재식을 만나 문집 원본을 차람했는데 역시 부본 하나를 작성했지만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국사편찬위원회 총서 발간의 사명을 위해 다시 원본의 행방을 찾았고 장재식의 손녀 장남수의 소재를 알아냈다. 이에 그는 경상북도 왜관에 내려가 칠곡 교원 강습회를 마치고 그곳에서 칠곡 북삼 국민학교 교사 장남수를 만났다. 그는 장남수의 안내를 받아 장지연의 유적을 탐방했고 장지연의 초상 및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사진 촬영도 마쳤다. 이은상이 빌려간 문집 원본은 이미 그 일부가 분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오래 전에 작성한 부본은 완전한 원본 대조를 얻지는 못했지만 역으로 불완전해진 원본을 보완하는 중요한 이본의 성격을 얻었다.


총서의 발간은 때로 외부의 요청에 의해 움직였다. 총서 제7집 민영환의 민충정공유고(閔忠正公遺稿)는 본래는 총서 후보에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민영환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안국동사거리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다시 이듬해 국사편찬위원회 총서 발간 형식으로 유고가 간행되었다.(현재는 이 동상이 충정로사거리에 있다.) 동일 인물의 기념 사업으로 동상 건립과 문집 출판이 순차적으로 나란히 이루어진 셈인데, 이러한 사례는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다. (일례로 인삼왕의 별칭을 얻은 개성 문인 손봉상 역시 동상 제작(1937, 김복진)과 ‘소산집(韶山集)’ 발행(1939, 공성학)이 나란히 성사된 사실이 확인된다.) 다만 신석호는 민충정공유고의 해설 원고를 쓰면서 조금 난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에 앞서 해학유서 해설 원고를 쓰면서 이기의 개혁사상으로 ‘민씨 일당의 간악한 정치가들을 제거’함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전술했듯이 ‘고종과 척신의 난정’은 총서 매천야록의 이선근 서문에서도 발신된 바 있었다. 다만 민영환의 자결은 국난에 직면해 결단한 숭고한 처의(處義)를 상징하는 사건이었고, 총서 민충정공유고의 서문은 이 점에 착안해 한국 국민의 애국 정신과 민족 정기의 앙양을 기대했다. 


총서의 사료는 대체로 조선 말기(대한제국기 포함)의 시대 상황을 증언했지만 예외도 있었다. 매천야록(1집), 기려수필(2집), 해학유서(3집), 위암문고(4집), 대한계년사(5집), 종정연표·음청사(6집), 민충정공유고(7집), 임술록(8집), 수신사기록(9집), 동학란기록(10집), 속음청사(11집), 정유집(附 北學議, 12집), 삼봉집(13집)...이 흐름에서 제일 돌출적인 자료는 박제가의 정유집(貞蕤集)과 특히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이다. 공교롭게 양자는 공통점이 있었다. 총서 삼봉집 서문에 따르면 ‘군사혁명’ 이후 국사편찬위원회는 정조시대 ‘북학론자’ 박제가의 정유집과 조선왕조 ‘개국 원훈’ 정도전의 삼봉집을 발간했다. 북학(北學, 새 문명 수용)과 개국(開國, 새 나라 건설)이 이 당시 한국 사회에 절실한 키워드라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정유집은 그렇다 치고 삼봉집이 과연 총서 기준에 부합하는 사료인지는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다. 총서는 간행 대상 저본을 처음에 모두 서울대 소장본으로 정했으나 박제가의 경우 시집은 성균관대 임창순 소장본으로 북학의는 통문관 주인 이겸로 소장본으로 변경했다. 총서 간행을 도운 임창순의 직위가 성균관대 교수(총서 11집 속음청사)에서 성균관대 강사(총서 12집 정유집)로 변화했음이 눈에 띈다. 신석호의 총서 해설은 임창순의 서로 다른 두 직위를 굳이 명기함으로써 4.19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그가 5.16 군사쿠데타로 해직까지 당한 사실을 드러냈다. 


매천야록(1955)에서 삼봉집(1961)까지. 지금까지 역사학자 신석호의 안내를 받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의 옛이야기 일부를 간략히 적었다. 매천야록, 삼봉집은 옛날 고문헌일지 모르나 총서 매천야록(1955), 총서 삼봉집(1961)은 엄연히 현대 사료집이다. 현대사학사에서 그 의미를 추구할 수 있을까. 이로부터 사료로 보는 한국사학사의 재인식이 성립할 수 있을까.


노관범(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노관범(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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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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