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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 진출한 «채식주의자», 책과 그림 / 김보슬

다른 나라를 자유롭게 드나들던 시절이 어느새 까마득하다. 그간 쌓아둔 먼 나라 체류기를 다시 펼쳐볼까 한다. 이국에서 이루어진 문학가들과의 만남, 한국어 번역에 관한 현지에서의 대화들을 꺼낼 셈이다. 터키 국립 에르지예스대학교(Erciyes Üniversitesi)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괵셀 튀르쾨주(Göksel Türközü)는 서울대학교에서 한국어교육학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 현대소설을 터키어로 번역해 왔다. 내가 에르지예스 대학을 방문 중이던 2016년, 마침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했고, 이스탄불의 출판사가 이 작품의 번역‧출판을 앞두고 있었다. 번역을 맡은 괵셀을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여운이 남는 작품, 한국의 여러 특징이 드러나는 작품이 좋아"

나: 한국문학 번역하고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나.

괵셀: 소설 읽기를 좋아했다. 단편작을 읽으면서 한국어 어휘를 공부했고, 꾸준히 현대문학을 가까이했다. 한국 유학 시절, 공지영의 «고등어»를 접했을 때 한국문학을 터키어로 번역해야겠다는 마음을 처음 먹었다. 하지만 학업 스케줄에 쫓겨 시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당시에는 터키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이 한 편도 없었고,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가 터키의 그것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그 분야를 개척하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원작뿐 아니라 영화, 연극으로 접하면서 터키에서 인기를 끌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번역은 한국에 있을 때 시작했지만 유학을 끝내고 터키에 귀국한 후에야 마칠 수 있었다. 첫 번역이었고, 공동 번역이었다.

한국 소설에 그려지는 한국인 등장인물들은 터키인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국과 터키의 문화적 유사성, 정서적 동질감은 내가 한국문학을 번역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가장 직접적인 동기이다. 작품 속 공간과 언어가 터키의 독자들의 일상과 동떨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주목했다.

[사진 1. 괵셀 튀르쾨주, 2016년 «채식주의자» 번역 중]

나: 그간 번역한 작품으로 어떤 것이 있으며, 앞으로는 어떤 작품을 번역하고 싶은가. 작품이나 작가를 고르는 기준이 있는가.

괵셀: 이문열로 처음 시작한 번역은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손홍규의 «이슬람 정육점», 김형오의 «술탄과 황제», 이희철의 «터키» 등으로 이어졌다. «채식주의자» 번역 의뢰가 들어왔을 때에는 안도현의 '연어'를 번역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고등어»는 아직 손대지 못했으니, 미련이 남는다. 그리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박완서의 작품에도 욕심이 있는데, 특별히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김애란, 하성란, 한강, 김영하, 해이수, 박상후, 박민규 같은 젊은 작가들에게도 관심이 있다. 예전에는 터키와 같은 분위기, 예를 들어, 고통이나 가난이 드리워진 슬픈 분위기가 주조를 이루는 작품들에 끌렸는데 요즘은 보다 신선한 것, 보다 실험적인 것, 신인들의 것을 즐겨 읽는다. 단편을 가장 좋아하지만, 대체로 장르 구분 없이 읽고 있다. 읽고 나서 여운이 남는 작품, 터키인으로서 공감이 가는 작품, 한국의 여러 특징이 드러나는 작품이 좋고,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가 좋다. 이러한 개인적 취향이 개입하겠지만, 아직 번역의 대상을 선택하는 뚜렷한 기준은 없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나: 과연 한국의 작품은 터키 독자들에게 정서적 장벽이 낮은 편인가.

괵셀: 비교적 그렇다. «원미동 사람들»로 예를 들자면… 앙카라도 80년대에 도시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주민들이 겪었던 혼란과 애환이 원미동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했다. 나는 앙카라 출신인데, 연작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두 마치 앙카라 어느 동네의 이야기 같았다. ‹원미동 시인›에서 엿볼 수 있는 가부장제도와 남아선호사상은 여전히 터키의 일상이다. 딸만 연달아 낳은 집에서 막내는 꼭 아들이기를 바라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방울새›는 수감 중인 어느 사회운동가의 아내 이야기인데, 터키에서도 80년대에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 일로 남편을 옥에 보낸 여자들이 많았다. 한국 소설이 현실을 더 사실적으로 담아낼수록, 거기에 터키가 드리워진다. 번역하면서, '그래, 터키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지' 하고 회상에 잠길 때가 많다.

"번역본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나: «채식주의자» 터키어 번역본을 펴내는 출판사는 어떤 곳인가.

괵셀: 앙카라에 있는 ‘에이프릴 퍼블리싱 하우스(April Publishing House)’라는 곳인데, 출판과 광고기획을 겸한다. 2000년 중반에 문을 열었고, 젊은 편집인들이 중심이 되어 해외에서 각광 받는 작품들을 발굴하고, 터키에 소개하는 일에 중점을 둔다. Kurt Vonnegut, Akhil Sharma, Tibor Fischer, Laura Hillenbrand, Jodi Picoult, David Duchovny, Adam Fawer와 같은 작가들을 소개한 곳이다. 홍보 감각이 좋은 것 같다. 터키에서 최초로 도서소개 영상을 제작했고, 책 주제가도 발표하고 있다고. 터키도 출판 시장에서 마케팅이 갈수록 중요해지는데, «채식주의자» 홍보에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나: 최근의 터키 독자들에게서 감지되는 특징이나 경향이 있는지, 외국 문학의 입지는 어떤지 궁금하다.

괵셀: 책 소비의 대부분이 문학 계통에 분포해 있다. 베스트셀러에 편중이 심했는데 요 근래에 젊은 층에서 외서를 많이 읽으며 시장의 폭이 넓어지는 기미를 띤다. 외국 작품 중에서도 이전에는 거의 유럽쪽 작품들만 읽혔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과 아시아의 작품에도 관심이 쏟아진다. «원미동 사람들»을 번역할 당시만 해도 사정은 전혀 달랐다. 관심도 홍보도 부진했기 때문에 판매로 이어지리란 기대도 적었다. 지금은 한국문학에 대한 인식와 관심이 비교할 수 없이 개선되었다. 독자 입장에서도 그렇고, 당연히 출판사 입장에서도 그렇다. 한편, 터키에서 시집은 거의 팔리지 않게 된지 오래다. 20-30년 전과 비교해 보면 크게 다르다. 그때는 시낭송회가 열리던 시절이었고, 시문학 향유층이 지금과 달리 두터웠다. 같은 문학 계열 안에서도 소설은 꾸준히 소비되고 있는 반면, 시는 2000년대 들어와 눈에 띄게 발표가 적어졌다. 그리고 자기계발서 같은 것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그다지 많이 읽히지 않는다. 종합적으로 볼 때, 소설이 강세다. 전 연령층에서 장편소설이 가장 많이 읽히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나: 한국의 한강과 터키의 오르한 파묵(Orhan Pamuk)과 나란히 맨부커상 후보에 올랐으니, «채식주의자»가 번역은 관심을 모을 수 밖에 없을 듯하다.

괵셀: ‘에이프릴’ 편집인은 «채식주의자»의 수상 훨씬 이전부터 이에 대한 호평을 터키 안팎에서 여러 경로로 확인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출판사 직원들도 각국의 서점에서 «채식주의자»의 영어 번역본을 자주 접했다고. 이들이 내게 번역을 제안한 것은 약 6개월 전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맨부커상 수상 후보로 결정되었다. 우리는 탁월한 선택이었다면 뛸 듯이 기뻐했다. 더구나 한강과 오르한 파묵이 나란히 후보가 되었으니 더욱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빨리 번역되었으면 좋겠다는 이메일을 많이 받는다. 번역본 출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출판사에도 평론가나 다른 관계자들로부터 출간 시일을 묻는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아직 학기 중이라 여러 가지로 신경 쓸 게 많은데, 완성에 좀 더 박차를 가해야겠다. (웃음)

나: 양국의 작가가 함께 맨부커상 수상 후보로 선정되어 뜨거운 관심을 모은 것이 이번 번역에 계기를 제공했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예상 밖이다.

괵셀: 훨씬 이전에 이미 결정돼 있었고, 오랜 시간을 두고 검토했다. 편집인의 결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작품이 한국 안팎에서 꾸준히 확보해 온 관심이었다. 그리고 한국문학이 아직 우리나라에 충분히 소개되지 않았다는 점, 특히 «채식주의자»처럼 초현실적인 작풍은 더욱이 희소하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나: 번역자로서 이번 번역에 도전하는 이유는?

괵셀: 제목부터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터키에서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의아해하는 시선과 질문을 받기 일쑤다. 채식주의 안에서도 다양한 단계와 분류가 존재하고, 채식주의자들 저마다 다른 선택의 배경을 가지지만, 그들을 마주한 것은 그저 까다롭고 낯선 사람들이라는 편견뿐이다. 나도 한 명의 독자이고 보면, 책에 직관적으로 다가가는 면이 있다. '채식주의'라는 말 자체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의 명성을 알고 딸의 작품에도 막연한 신뢰를 품었다.

[사진 2. 나와 괵셀, 괵셀의 연구실에서, 2016년 5월 9일]

"딸의 선택에 간섭하는 현실, 터키 독자들에게는 생경할 것"

나: 당신은 한국어 전문가이고 한국 생활도 경험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한국어에 능숙하고 한국적 일상이 익숙하더라도, 이번 작품에서 그려지는 ‘한국’ ‘여성’의 감성/관점/세계관에 접속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한국인과는 또 다른 차원의 장벽이 있을 법한데…. 가령, 한국-터키 간 <문화적 간극>, 혹은 여성원작자-남성번역가 간의 <성별 간극>….

괵셀: 의외로 그런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특히, 성별의 이질감으로 고생한 것 같지는 않다. 워낙 여성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아서 그런가. 오히려 «채식주의자»는 상당 부분 남자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세 편의 연작 중 ‹채식주의자›가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남성 화자의 서술로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나머지 ‹몽고반점›과 ‹나무 불꽃›에도 남성적 관점이 관통하고 있음을 느낀다. 물론,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의 시선에 의해 서술되기 때문에, 다른 두 편에 비해 그걸 간파하기 어렵긴 했다.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원작자가 여성임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남성적 관찰력이 느껴져서 놀랍다.

나: 터키의 일반 독자들은 이 작품 속에 그려진 갈등의 어느 부분을 가장 생경하게 바라볼 것이라 예상하나.

괵셀: 터키 사람들 사이에 채식주의에 대한 선입견이 있긴 한데, 작품 속의 상황이 그렇듯 노골적이고 극단적이지는 않다. 선택을 강요 받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영혜의 가족이 영혜에게 그랬듯이,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애원하거나 강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기 힘든 딸의 결정을 부모가 따르는 것이 여기선 일반적인 거라고 본다.(이 글을 정리하는 중에 떠올라 필자가 덧붙이자면, 종교적 사안에서는 강요가 있을 수도 있고, 강제의 정도가 가문이나 지역별로 다를 수도 있다.) 영혜의 가족처럼 필사적으로 딸의 선택에 간섭하는 현실이 터키 독자들에게는 매우 생경할 것 같다. 작품 스타일로 보자면 ‹몽고반점›의 에로틱한 묘사와 분위기가 익숙치 않을 것이다. 아직까지 터키는 영화에서도 에로틱한 장면을 금기시한다.

나: 제목으로 쓰인 ‘몽고반점’이 터키 민족에게도 있나.

괵셀: 좋은 질문이다. (웃음) 우리들도 옛날에 몽고반점이 있었다고 한다. 여전히 더러 몽고반점을 가진 아이들이 있다. 한국-몽고-터키를 잇는 고리의 흔적이 언어에뿐 아니라 DNA에도 남아있다. ‹몽고반점›의 제목을 보고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터키 독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터키어로는 이걸 '탄생얼룩'이라고 부르지만.

"인간의 의지보다 신의 결정을 신뢰"

나: 이 소설에서 두 가지가 대립하고 있다. 하나는 영혜가 거부하는 '고기', 다른 하나는 그가 도취하는 '꽃잎'인데, 질문에 앞서, 설명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의 한국은 육식 문화가 발달된 곳이고, 완전한 채식 실천에는 어쩔 수 없이 불편이 따른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고기는 보편적이고 표준화된 삶을 은유하고 있지 않나 한다. 영혜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이는 가족은, 한국적 맥락에서 표준화된 삶에 그를 못 박는 것으로써 안정을 구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는 데에는 종교적, 생태적 도그마가 깔린 것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이 결코 될 수 없을 무엇'이 되고자 채식과 단식을 감행한다. 영혜가 탐닉하는 꽃잎은 곧 '증상'이다. 그러한 탐닉은 무엇인가 되기 위한 애절한 몸부림이라는 점만 떼어놓고 보면, 유혈낭자한 성형수술대마저 떠오른다.

고기와 꽃잎에 의해 상징된 한국의 현실, 터키인들도 그런 것에 부딪히는가.

괵셀: 터키도 육식이 주류인 사회다. 식단에서 고기를 배제한다는 발상은 터키에 80년대 이후에 소개된 개념인데다가 마땅한 용어조차 없다. 그래서 영어 발음 그대로 '베지테리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토록 낯설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채식주의를 존중한다. 터키인들이 한국인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관용이다. 명절에 희생물로 잡는 짐승에게도 지켜야 할 예절이 있고, 도축 광경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남은 가죽을 향해 애도를 표한다. 물론 이것은 이슬람의 영향이지만, 육식문화와 한 몸처럼 함께 발달한 것이 미물에 대한 예절과 존중이기 때문에, 영혜의 부모처럼 억지로 고기를 먹이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어쩌면 오스만제국 때부터 타민족과 다문화에 관대했던 전통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기성세대가 자식에게 기대하는 안정된 삶은 터키인들에게도 있다. 한국처럼 자식이 남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가정을 꾸려길 바라는데, 한국처럼 여기에서도 ‘적령기’ 개념을 적용한다. 그러한 점을 떠올려 본다면 터키 사회 또한 고기로 상징된 한국적 폭력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터키인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운명의존적이다. 노력을 통한 현실 극복을 우리들에게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것이 훨씬 터키적인 방식이다. 터키인들은 한국인에 비해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고, 실현 가능한 현실에 타협하려고 한다. '자신이 될 수 없는 무엇'이 되기 위해 죽을 각오로 임하는 모습은 터키인들 사이에서는 놀랄 만큼 드문 것이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고 사력을 다해 매진하거나,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에 좌절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신이 정한 운명 속에서 얼른 새로운 길을 찾는 데에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자살률도 낮다. 아직 터키 사회는 그렇다. 내가 만드는 나의 모습보다 신이 결정한 나의 모습을 신뢰한다.

앞서 말했듯, 터키인들게에도 보편적 삶의 기준이 있고, 타인으로부터 매겨지는 잣대가 있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이탈하는 것에서 받는 충격과 상처의 정도는 한국보다 덜할 것이다. 범죄나 도덕적 부패가 아닌 한. 터키 사회에서는 개인의 선택과, 그에 대한 탄압 사이의 긴장이 한국보다 느슨하다. 한국과 터키를 오래 경험한 나 같은 사람들이 느끼기에 양국의 문화에 차이점만큼 유사성이 무척 많지만, 한국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이 이 작품을 통해 접하는 한국은 매우 신기할 것이다. 죽음을 불사한 영혜의 모습에서 어쩌면 매우 충격을 받을지도….(지금에 와서 뒤늦게 떠오르는 점을 또 한 번 덧붙이자면, 내가 경험한 터키는 한국과 비교하여 개인의 선택이 타인의 시선으로터 훨씬 덜 자유로운 사회였다.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관점의 차이를 괵셀과 다시 토론해 보리라.)

"작가의 문체를 최대한 살리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나: 한국 작품을 터키어로 번역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가.

괵셀: 터키어와 한국어의 언어적 유사성에 기대어 한국 정서를 최대한 정확하게 옮기려고 한다. 그리고 작가의 문체를 될 수 있는 한 그대로 살리려고 한다. 짧은 문장이면 그대로 번역하고, 비문이면 그것도 그대로 번역하려고 한다. 그러나 관용적 표현 같은 경우 터키어로 비슷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쓴다. 원작의 문체를 보존하면서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나: 번역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독자로서, 특히 터키의 독자로서, 이 소설을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점은.

괵셀: 첫 장부터 인상 깊었다. 화자가 남편이어서 그랬다. 그리고 아주 감각적으로 묘사된 영혜의 꿈의 기록. 무엇보다도 영혜의 자괴파괴적인 모습…. 그 모습을 고수하면서, 타인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점…. 완강하게 가족의 폭력을 거부하는 동시에 스스로 자기를 향해 폭력과 학대에 가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나무 불꽃을 번역할 때 '영혜'에 대해 느낀 연민과 절망으로 눈물 날 정도였다.

나: 터키어로 쓰인 «채식주의자»를 읽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괵셀: 터키어 독자들일 테니, 이건 터키어로 해야 하지 않나? (웃음) 이 작품을 통해, 터키인들이 한국 사회의 색다른 단면을 섬세한 시각으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이런 작품을 더 많이 알리고 싶다. 한국은 세계 현대문학계의 보물상자라고 생각한다. 한강처럼 장래가 밝고, 21세기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작가들을 터키가 알아주면 좋겠다.

여기까지의 대화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스탄불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에이프릴 퍼블리싱 하우스’를 찾아갔다. 괵셀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를 환대해 주는 편집장과 마주앉아 궁금했던 터키의 책 이야기들을 이어갔다. 그리고 «채식주의자»의 표지가 결정되지 않아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몇 주가 흘러 한국행을 앞두었던 나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최미경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들을 보게 되었다. 단번에 내 머릿속에서 한강의 작품과 연결이 되는 그림이었다. 이스탄불에서 만났던 편집장의 고민을 떠올리고는, 일면식조차 없던 최미경 작가를 곧장 수소문했다. 고맙게도 연락이 닿아, 나의 터키 이야기와 편집장의 고민을 전해줄 수 있었다. 상황을 이해한 그는 «채식주의자» 표지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에 응해 주었다. 우리나라 최미경 작가의 그림으로 장식된 터키어판 «채식주의자»를 아래에 담는다.

[사진 3, ‘에이프릴 퍼블리싱 하우스’가 출판한 터키어판 «채식주의자», 2016, 표지 그림: 최미경]

* 이 글은 계간지 『문학의식』 2016년 여름호에 소개된 것을 수정‧각색한 것입니다.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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