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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명화의 시점으로 읽는 ‘엄태화의 묵시(默示)’> / 김성신

看(간), 視(시), 見(견), 望(망), 示(시). 모두 ‘보다’라는 의미의 글자다. 이 중에서도 ‘視’와 ‘示’는 발음까지 같아 어떻게 구분하여 사용할지 헷갈린다. ‘視’는 ‘자세히 봄’을 뜻한다. 여기서 파생되어 ‘대우하다’, ‘대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한편 ‘示’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거나 남이 보도록 하는 것을 이른다. 이에 파생되어 ‘나타내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示는 신탁 위에 놓은 희생물[二]과 희생물에서 떨어지는 핏방울[小] 의 모양을 본떠 신의 뜻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다’라는 의미를 담아 만든 글자라고 한다. 그래서 ‘默視(묵시)’라고 하면 ‘말없이 잠자코 눈여겨봄’이라는 의미가 되고 ‘默示(묵시)’라고 하면 ‘말이나 행동으로 직접 드러내지 않고 은근히 자기의 의사를 나타내 보임’이라는 뜻이 된다. 성경의 마지막 편인 ‘요한계시록’을 과거엔 ‘묵시록’이라고도 했는데, 이게 한자로는 ‘默示錄’이다. 신이 그저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의도를 분명하게 표시한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 만화 등 서사가 중심인 창작물 등을 구분할 때, ‘암울한 미래상’을 다룬다면 이를 두고 ‘post apocalypse(포스트 아포칼립스)’와 ‘dystopia(디스토피아)’로 장르를 나누어 분류하기도 한다. 둘은 비슷하지만, 문명의 존속 여부에서 다르다. 디스토피아는 암울하긴 해도 문명은 존재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원작 소설, 필립 K. 딕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처럼 말이다. 이와는 달리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선 문명이 붕괴하고 인류는 멸종에 가까운 상태를 그린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원작 소설, 리처드 매드슨 『I Am Legend』) 나 <더 로드>(원작 소설, 코맥 매카시 『The Road』) 의 배경을 떠올리면 된다.


엄태화 감독의 2023년 작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디스토피아라는 두 장르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대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도시 전체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아파트 한 동’. 이러한 상황은 전형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다. 하지만 ‘황궁 아파트 103동’ 내부로 들어가면 그곳엔 문명이 존재한다. 극의 전개에 따라 전체주의적 권력이 등장해 억압적 상황이 전개되는 것까지, 디스토피아 장르의 문법도 함께 가지고 있다.


생존을 위해 하나가 된 황궁 아파트 103동 주민들은 새로운 주민 대표 ‘영탁’을 중심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이들은 강추위가 덮쳐 외부인들로 아파트가 포화상태가 되자 이들을 차단하기 위해 배타적인 주민 공동체를 만든다. 이제 이들은 아파트 주민만을 위한 새로운 규칙(법)을 만든다. 그러자 지옥과도 같은 바깥의 세상과 달리, 아파트 경계 안쪽의 주민들에겐 행복하고 평화로운 천국 같은 세상이 만들어진다. 물론 영원할 수 없는, 찰나의 유토피아일 뿐이다.


혐오나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흔히 소위 사회적 ‘표준’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쉽게 멸시와 배제의 대상이 된다. 외국인, 장애인, 홈리스, 성소수자 등을 향해 ‘표준을 어지럽히는 존재들’로 낙인찍는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이는 다수가 소수를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작동되는 ‘표준’은 바로 ‘이전의 삶’이다. 아파트 안에서 과거의 삶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표준이 되는데, 이렇게 해서 황궁 아파트 103동 주민이라는 극소수는 자신들을 제외한 생존자 전체라는 절대다수를 혐오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이런 지점이 극의 리얼리티를 깨는 허점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자본의 권력이 지배하는 우리의 세상을 대입하면. 이것이 더 정확한 비유다. 독일의 저널리스트 카롤린 엠케 (Carolin Emcke)는 2016년 독일 사회에 논쟁을 일으킨 저서 『Gegen den Hass (증오에 대항하여)』에서 “‘표준’이라는 믿음 자체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순수성’에 대한 맹신이자 폭력적인 편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는데, 너무 당연하게 들려 쉽게 흘렸던 이 발언이 영화를 보는 동안 곱씹어 볼 만한 문장으로 다시 떠올랐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혐오나 증오가 개인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모되고 있다는 점을 통찰력 있게 보여준다. 유쾌하지 않은 경험들이 여러 사람의 감정에 혐오의 씨앗을 뿌리는 상황인데, 여기에 어느 순간 극단적 혐오주의자들이 의도를 가지고 제조해낸 꽤 정교한 편견의 논리가 결합한다. 이로써 사회적으로 교묘하게 설계되고 공모된 심각한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혐오나 증오를 관망하고 방조하는 모든 행위가 ‘증오에의 공모’가 되는 것이란 의미인데, 이런 점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극 중에서 시종 딴죽을 거는 인물인 명화(박보영 분)도 공모자로서 예외가 아니라는 의미다.







세계적인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마사 C. 누스바움은 저서 『혐오와 수치심 (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에서 물론 감정도 신념의 집합체로서 공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사회에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법적 역할을 담당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감정은 공통으로 인간이 인간임을 숨기고 부정하려는 인지적 판단과 욕구를 수반하기 때문에 사회 내에서 취약한 위치를 지닌 집단을 배척하는 데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다시 말해 ‘혐오’와 ‘수치심’은 약자를 공격하고 파멸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강자들의 논리로 너무 쉽게 확대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마처럼 답답하게만 여겨지던 여주인공 명화의 ‘대책 없는 온정주의’는 극의 마지막에 가서 퍼즐이 끼워지고, 설득력을 얻는다. 자신의 생존을 지켜주던 집과, 남편 민성(박서준 분)까지 모두 잃은 후에야 그녀는 ‘증오에의 공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이 영화를 두세 번 거듭 볼 용의가 있다면, 세 주인공 각각의 개별적 시점으로 보는 것도 좋겠다. 명화의 시점으로 읽으면 ‘엄태화의 묵시(默示)’가 가장 선명하게 보인다.


김성신(출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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