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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료 최전선 / 박성관

최종 수정일: 2021년 3월 30일

<현대사상> 2월호 「정신의료 최전선」 리뷰

지난 달, 한 주 간격으로 「골방의 조현병을 태양 아래로 끌어낸 이름, R.D.랭」과 그에 대한 반박글인 「정신병이 가족 탓이라고?」가 신문에 실렸다. 매우 절실한 문제에 관해 정반대되는 입장의 글이어서 온라인 상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적어도 두 편의 글은 이 문제를 깊이 겪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가깝기도 하다. 오늘은 이 문제도 생각하면서 <현대사상> 2월호 「정신의학 최전선 – 코로나 시대, 마음이 행방」을 리뷰하려고 했다. 그런데 단연 중요한 글이 있어서, 이걸 발췌 정리하는 데에 주력하기로 했다. 글이 다소 딱딱한데, 민감한 측면도 있어서 함부로 원문을 변경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참고로 <현대사상>은 매년 한, 두 달은 이런 분야를 집중적으로 다뤄왔다. 1)


1. 「누가 에비던스를 만드는가 – 당사자의 경험지를 전문지와 대등하게 다룬다」

이 글의 필자 스기우라 칸나씨는 정신의료와 공중위생 전문가다. 그는 Evidence based medicine(약칭 EBM), 즉 ‘증거 기반 의학’에 대한 문제 의식으로부터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에 대해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EBM을 극히 간단하게 말한다면, 생물의학을 배경으로 한 의료자의 양적 평가를 중심으로 한 전문지(專門知)의 집적이라 할 수 있다. 한데 그동안은 “어떠한 정보를 에비던스2)로 간주하고 계속 누적시켜가야 할까” 혹은 “의견이 갈릴 경우에 누구의 시점이 우선되어야 할까”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아 왔다. 또 환자 당사자 운동이 지적하듯이 앎은 권력이며, 앎이 어떻게 구축되고 이용되는가는, 그 권력을 통해 당사자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 이런 점에서 환자나 가족의 ‘경험지(經驗知)’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지가 중요한 문제다. 스기우라씨는 정신과 임상의로서 근무를 시작한 후, 다양한 의료 관련 시설, 특히 공중위생과 국제보건기관에서의 근무를 거친 끝에 당사자의 경험지를 에비던스로 추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연간 단위의 장기 입원, 환자의 의사는 묻지 않는 강제 입원, 방 바깥에서 자물쇠를 잠그는 격리 처우, 팔다리나 몸통을 베드에 묶이는 구속 처우, 기계 조립 라인처럼 진행되는 목욕, 별 다른 특성이 없는 커다란 방, 간호사와 면회객 수가 적다는 것, 외출도 퇴원도 체념한 환자 등 여러 가지를 목격하였다. 당연히 수많은 위화감과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의사와 간호사들이 생각하는 바와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환자, 가족, 의사들에게 최선의 방향일까?”를 고민하며, 이를 원동력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활동과 연구를 거듭해 왔다. 이 물음을 해결하고 싶어서 그는 임상의학이라는 개인 레벨로부터 보건제도 레벨로 시점을 옮겼다.

일본은 최근 지역포괄 캐어가 전개되어 지역에서 의료 및 복지가 발전되고 있지만,3) 예산배분이나 인원배치를 보면 가료(加療)를 병동에서 행하는 비중이 크고 수용주의(收容主義)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정신과 강제 입원은 환자가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자상(自傷)의 위험을 방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사나 가족이 생각하는 보호 목적에 널리 이용된다. 사실 환자 당사자는 괴로움을 호소하지 않는데, 가족이 환자를 개선시켜달라고 병원에 오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양상들은 정신과환자를 사회로부터 배제하여 병원에 수용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임상의학에 더하여 공중위생을 배우고 WHO 등 여러 기구에서 근무하며 현 상황을 파악하고 새로운 지침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일반론에 머물고 구체적인 해결에 이르지 못한다는 불충분함과 서비스 이용자로부터의 거리도 느꼈다. 그리고 정신 상태에 의해 일상생활을 제한당하는 사람들이 자신답게 생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생물의학적인 정신의학이나 국제정신보건에 대한 비판도 접했다. 특히 당사자 단체(survivor)가 정신과의사는 독선적으로 질병을 만들어내어 치료를 사람들에게 마구 밀어 부친다는 비판은 무거운 울림을 주었다. 많은 비판들이 있지만 크게 정리해보자면, 생물의학의 비대화와 표준화(정신이나 심리를 의료화하겠다는 거냐? 약물요법 이외의 치료법이 너무 취약하다, 여러 가지로 다양한 개성들을 한덩어리로 싸잡아버리겠다는 거냐? 문화를 무시하는 거냐? 등), 권력 및 생(生)정치(의사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를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환자에 대한 억압인, 정신과의사나 정신과병원만 없으면 강제수용이나 강제가료를 당하는 일은 없어질 테니 전면 폐기해야 한다), 근거와 에비던스의 편중(서양에서 책정된 에비던스를 타 지역에 무비판적으로 이용하는 거냐? 기본적으로 에비던스가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다) 등등이었다. 이 비판들을 음미하면서 입장이나 관점을 바꿔보니, 다른 현실과 논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필자를 이끌어준 것 중 하나는 UN의 「장애자 권리 조약(CRPD)」이었다.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 ‘생물의학’은 생물학을 기본으로 한 과학적 인식(특정 병인론, 합리적 인식론 등)에 입각하여 인지되고 실천되는 의학이다. 즉, 인간의 심신을 장기(臟器)나 세포 차원에서 바라보고, 그것들을 표준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여 진단 및 치료하고, 나아가 기술적으로 조작(操作) 가능한 대상물로 여겨 치료에 임한다는 것이다. 한편 환자의 경험은 저마다 상이한 개별 인생이며, 아픔의 스토리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에 주목하는 ‘타자의 합리성’ 컨셉은, 일견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언동도 본인의 시각에서 보면 합리성이 있다는 걸 알려준다. 최근, 이런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의학 모델로부터 사회 모델로 패러다임이 시프트되고 있다.

필자는, 만일 의학부나 공중위생대학원에서 이러한 시점을 배웠더라면, 임상현상이나 프로그램을 입안할 때 타자의 합리성을 받아들여 권력의 격차를 메우는 노력을 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또한 그랬더라면, 의사로서 표준화된 의학을 환자에게 적용하는 게 아니라, 표준화가 불가능한 환자 각각의 인생의 맥락, 아픔의 경험에 의학이라는 앎을 섞으려고 했을 것이라고 성찰적으로 회고한다. 즉, 1) 표준화에 더하여 개별성을 숙고할 것, 2) 정신장애자를 대등한 시민으로서 존중할 것(박애주의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환자를 보호 대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3)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고, CRPD를 프레임 워크로 삼는 것 등이 정신보건을 생각함에 있어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를 의학, 공중위생, 국제보건과 관련하여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까?

우선 생물의학을 중심에 둔 현대 의학이나 공중위생이 전문지를 높이려 할 때 중시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 에비던스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에비던스는 ‘무작위 비교 시험(RCT)’ 및 ‘계통적 리뷰’다. 여기서 ‘무작위 비교 시험’은 원래 의약품의 작용과 부작용을 측정하기 위해 개발된 연구 디자인으로, 객관화 및 수치화 가능한 양적 지표를 표준화하여 다루는 것이 강점인데, 반면 환자의 주관적 감상 같은 질적 정보들은 채용되기 힘들다. 그리고 에비던스에서 환자의 개별적인 주관이나 경험 이야기의 위치는 계급이 가장 낮은 ‘사례’나 ‘증례 보고’로 간주된다. 이 ‘사례’가 에비던스에서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개별성을 뛰어넘어 검증을 거치고, 객관성과 중립성과 보편성을 얻을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환자의 경험이 갖는 주관성, 유일무이성, 가치판단이 풍부하게 담긴 특성 등은 상실된다. 또 이러한 에비던스의 계급이라는 사고방식은 보편적인 지견(知見)이 존재한다는 것이 전제로 깔려 있고, 모든 지견은 관계성 속에 있는 조건부라는 점이 무시된다. 환자의 희망이나 납득에 따른 임상의학이나 공중위생의 발전에는 전문지(주로 양적 정보)와 경험지(주로 질적 정보)가 교직된 에비던스의 구축이 필요한데, 그런 패러다임으로 이행할 수 있기 전에 적어도 환자(서비스 이용자)가 연구 실시에 관여해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환자는 연구에서 수동적인 연구대상자로 간주되어 왔다. 즉, 과학자나 의사 등 전문가가 연구과제를 설정하고, 연구수법을 결정하며, 환자는 그런 연구의 대상자로서 연구의 장으로 권유받아 왔다. 그러나 최근 환자(서비스 이용자)가 연구 실시에 다양한 방법으로 관여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 그것은 ‘연구에 환자, 시민이 참여하는 것(Public Patient Involvement)’ 혹은 ‘참가형 연구’라 불리며, 특히 영국에서 이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러면서 ‘환자이기도 한 연구자(SUR, Service User Researcher)’와 다른 연구자가 공동으로 연구하는 틀이 명확해지기도 했다. 가령 전기경련 요법(ECT)의 효과를 두 세 팀으로 나누어 연구해보았더니, 의료자 주도의 연구와 서비스 이용자가 이끄는 연구의 결과가 달랐다. 전자 쪽이 ‘전기경련 요법’의 효과를 더 긍정적인 것이라 결론지었고, 나아가 이 요법 실시 전후의 환자의 기억 장애를 과소평가했음이 드러났다. 또 이 요법을 승낙한 환자의 최대 30%가 담당의를 어렵게 생각해서 혹은 눈치보여서 승낙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런 의미있는 방식의 연구 결과는 영국의 보건 서비스 향상에 반영되고 있으며 현재 800명 이상의 SUR이 크게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SUR(환자이기도 한 연구자)이 가담한 연구 모델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전문가와 서비스 이용자(즉, 환자)를 대등하게 상정하는 협동 연구에 대한 기대가 크며, 이는 무상의료제도이자 국영체제인 NHS(National Health System, 국립의료제도)나 NGO 서비스의 에비던스로 이용된다. 그러나 이 대등한 관계는 붕괴되기 쉽고 예산을 가진 자와 최종적인 보고를 하는 자의 목소리가 커지게 된다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또 SUR이 고용되긴 하지만 연구비 획득을 위해 이름만 포함되는 경우도 있고, 댓가를 지불받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문제 등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있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아직 당사자가 전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연구를 이끄는 수준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시도를 종합해볼 때. 당사자가 자신의 경험을 대등하게 에비던스에 더하는 일은 EBM(에비던스 기반 의료)을 확실히 전진시킨다.

한편 앞서 언급한 UN의 장애자 권리 조약(CRPD)에도, 이 조약의 체약국들은 여러 중대한 문제에 있어 “장애자를 대표하는 단체를 통해, 장애자와 긴밀히 협의하고, 또 장애자를 적극적으로 관여시킨다”고 명기되어 있다. 이 이행에서 특히 주목받고 있는 것은 법 앞의 평등과 대리 의사 결정 금지(제 12조)다. 요컨대 장애를 이유로 본인의 의사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입각하여 강제입원을 폐지한 나라도 있지만, 일률적으로 강제 입원을 폐지해야 하느냐 여부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고, 의사결정 모델도 각국이 모색 중이다.


2. 그 외의 글들


3월 15일에는 ‘새로운 경기도립정신병원’에 관한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일독을 바란다. 기쿠치 미나코의 「파르마콘(독=약) - 젠더화된 광기의 계보와 리질리언스의 정치」는 이런 흐름을 일면 환영함과 동시에 더 사회변혁적인 관점에서 치고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밖에도 「사라지지 않는 항(抗)불안약 – 정신의료와 진정(鎭靜) 문화」, 「발명품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 – 의존증의 견지에서」를 흥미롭게 읽었다. 「신형 코로나 사태와 트라우마에 대한 시평 – 감염적인 이웃 윤리를 향하여」는 읽다가 골치 아파져서 반만 읽었고 「자립생활, 그후의 부자유 – 장애자 자립생활 운동의 현재 지점으로부터」는 중요하기도 하고 글도 길어서, 각잡고 읽고 싶은 마음에 일단 미뤄두었다. 코로나 상황과 관련해서는 권두 대담 「셀프 캐어 시대의 정신의료와 임상심리」가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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