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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이라는 끝없는 과정: 17인의 목소리로 탐색한 자립의 다층적 의미 / 최엄윤

프리랜서 독립문화기획자라는 직업으로 산 지 5년째인 2025년은 경제적으로 쉽지 않은 해였다. 스스로 작아지고 희미해지는 것 같아 꾸준히 달렸고 청소년센터 발레 수업을 들었으며, 사람들과의 만남을 회피하기보다 솔직한 상황을 털어놓았다. 여기저기 입사 지원도 해봤고,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공모 신청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커져만 갔다.

     

한편, 충만하게 살아내고 싶은 만큼 행복하게 일하고 싶다는 마음은 취업이나 공모 앞에서도 다소 소극적이었다. 내가 선택받는 것이 중요한 것만큼 나의 선택 역시 여전히 중요하다. 이 ‘여전히’라는 말은 쉰 살이라는 나이가 주는 신체적·정서적·사회적 위축감의 무게 때문이다. 쫓기듯 달려가는 시간 앞에서 반백 살에 접어들었지만, 내가 누군지 설명하는 것 역시 ‘여전히’ 힘들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공모에서 떨어진 프로젝트 하나를 붙들고 올해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생각했다. 그 첫 번째는 ‘자립’에 관한 질문이었다.

     

자립이 뭘까?

시작은 보호 종료 청소년의 ‘이후’를 고민하는 30대 친구와의 대화로부터였다. 문득 그녀도 나도 여전히 자립했냐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인을 만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같은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는 선뜻 입을 열었고 주저하는 사람, 조심스럽게 답변을 거부하는 사람, ‘독립’이나 ‘고립’을 포괄하는 사람 등이 있었다. 응답자는 총 17명으로, 3040 문화예술계 동료부터 단골 가게 이웃들, 올해 74세가 되신 나의 어머니까지 인터뷰하며 가볍고도 진지한 시간을 나눴다. 영상 인터뷰로 진행하며 얼굴을 드러내는 이도 있었지만, 손, 바깥 풍경, 테이블, 문, 고양이 등 직접 노출보다는 대부분 목소리만 참여했다.

     

자립의 정의를 요약해 보자면, 대체로 ‘경제적 자립’이 충분조건은 아님을 강조했다. 예외적으로 74세 어머니의 대답은 ‘자립은 성공 길’에서 ‘성공 길은 성취감’, ‘성취감이란 열심히 하려는 마음 그 자체’로 꼬리를 무는 문답 끝에, 자립이 ‘경제적인 것’보다는 ‘마음’에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말은 아름다운 재단에서 진행한 ‘열여덟 어른’ 캠페인 후 “잘 살고 싶어지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 참가자의 대답이 떠오르게 한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대답과 표현들은 결혼 유무나 경제적 상황 등 각자가 처한 현실과 경험이 녹아 있어 흥미로웠고, 다양한 대답을 통해 지인들과 한 발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응답자들은 크게 ‘함께 살기 위한 자립, 즉 관계 속의 자립’과 ‘주체적 세계관과 의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17명 모두의 대답이 소중하기에, 그중 일부를 소개하려 한다.

     

관계 속의 자립: 서로서로 지탱하는 단단한 땅

     

  • 친구들을 통해 나의 자립을 확인한다. 의존하지는 않지만, 좋은 관계로 지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내가 홀로 잘 서 있다고 생각한다. (40대 문화기획자)

  • 혼자 서 있는 것 같아도 처음에 알게 모르게 동네 사람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 저도 그것을 이어받아서 누군가가 꿈꾸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들어줄 힘이 조금 생겼다. (30대 문화기획자)

  •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존재가 되고 또한 내 주변 사람들까지도 돌볼 힘이 있다면 그게 자립이지 않을까 (40대 예술가)

  • 누군가와 잘 어울릴 수 있게 되는 마음을 가진 것도 자립의 일종인 것 같다. (30대 회사원)

  • 나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자립은 없다. 하지만 자립해야 한다. 내가 자립해야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40대 자영업자)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만, ‘스스로 서다’라는 정의 앞에서 경제적 자립은 늘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경제적 위축은 정서적·사회적 자립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비밀에 기대어_ 이제야 꺼내놓는 자립준비청년의 이야기』(파지트, 2025)의 저자 허진이는 보호 종료 후 5년으로 제한된 지원 기한 내 유한한 자원 속에서 다양한 자립을 고민할 ‘틈’이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 ‘틈’을 메우는 것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제도, 공동체의 품이 함께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사회적 자립이란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며 ‘서로서로 지탱하는 단단한 땅'을 만드는 과정과 같다.

     

정서적 자립: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음의 힘

     

  • 어떤 결정을 할 때 백 퍼센트 자신의 의지로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는 정신 상태를 가지면 그게 나에게는 자립이다. (40대 디자이너)

  • 자신의 가치관으로 휘둘리지 않고 판단하고, 결정하며 실행력도 있는 상태. 그것을 본인이 잘 통제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자립이다. (30, 40 회사원 부부)

  • 선택을 온전히 내가 하게 되었을 때 자립했다고 생각했다. (40대 시민단체 활동가)

  • 정서적, 경제적, 행동적으로 스스로 뭔가를 해 나감으로써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상태가 자립인가 생각한다. (30대 회사원)

  • 독립적이면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연결고리나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자신을 잃지 않는 것, 자신의 세계관, 세계를 잃지 않는 것이 자립인 것 같다. (40대 사회학자)

     

의지, 가치관, 선택, 결정 등 정서적 자립은 사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삶의 변곡점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망설이고 헤매는 시간이 있었고, 자립은 결국 도착점이 아닌 과정으로 그 기준이 새롭게 쓰이고 변화했다. 내가 하는 고민이 너무 보잘것없고 여전히 나약한 스스로가 부끄럽지만, 인터뷰를 통해 나와 비슷한 상황과 고민을 하는 이들을 만나며 약해진 자신을 돌보고 마음의 근력을 키워가는 자립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 자립이라는 화두는 평생 가져가야 하는 것 같다. 너무 무겁지 않게 매일매일 청소하고, 몸과 마음을 돌보고, 단련시키는 것이 자립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40대 예술가)

  • 일기를 쓰고 감정을 돌아보고 기록해야 내가 어떤 자리에 어떻게 서고 싶은지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40대 예술가)

  • 내가 나를 어디에 놓고 싶은지를 찾아가는 것, 나를 자라게 해 줄 것 같은 곳들을 찾아가는 것이 자립이 아닐까. (30대 심리치료사)

  •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있고, 아프거나 잠시 일을 쉬어야 할 때조차도 타인의 도움 없이 나를 돌볼 수 있다면, 그 안정감과 자신감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40대 회사원)

  • 정서적 관리가 잘 된다면 충분히 자립할 힘이 생기지 않을까? (40대 자영업자)

          


나 역시 잘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부터 매번 자립의 방향을 찾아가는 중이다. 사실 삶이 평온하다면 자립이란 질문이 개입할 틈도 없을 것 같다. 헤매고 방황하는 마음속에 부유하는 질문들도, 성실하고 열정적인 행동과 실천 앞에서는 무색해지곤 한다. 하지만 질문은 때로 그 자체로 새로운 길을 열기도 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극을 가진 전선과 같은 거야. 서로가 서로를 만나 서로의 영혼에 불을 밝히는 거지. (......) 인간은 참 우매해. 그 빛이 실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걸 모르니까. 하나의 전구를 터질 듯 밝히면 세상이 밝아진다고 생각하지. 실은 골고루 무수한 전구를 밝혀야만 세상이 밝아진다는 걸 몰라.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위즈덤하우스, 2009, p.185-186

     

마치 내 안에 있는 필라멘트를 자극해 불 밝히는 전기처럼, 인터뷰를 통해 만난 17명의 목소리는 희미하고 작아진 나에게 따뜻한 빛과 단단한 용기를 주었다. 서로의 전선을 연결해 세상을 골고루 밝히는 빛의 연대를 꿈꾸며 2026년을 기대해 본다.


최엄윤, 사무엘 베케트의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말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언젠가 결국은 창작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omyunchoi@hanmail.net
최엄윤, 사무엘 베케트의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는 말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언젠가 결국은 창작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omyu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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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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