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 참을 수 없는 너의 즐거움 / 마준석
- 한국연구원
- 8월 28일
- 5분 분량
베를린에 거주하는 인문학도로서 독일어 소설쯤은 원문 그대로 읽을 줄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하고 호기롭게 카프카의 책을 펴들었다가 주제를 파악하고 친구에게 독일어 아동 도서를 하나 추천받았다. 자 첫 페이지, “사실 저는 완전히 다른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너무 무서워서 야자나무가 코코넛을 후들거리는 그런 책을요. 첫 장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까마귀처럼 교활한 족장, 일명 <빠른 우편>이라고 불리는 그는 곧바로 뜨거운 구운 사과가 장전된 주머니칼의 안전장치를 풀고, 고래를 냉정하게 조준하며, 삼백구십칠까지 가능한 한 빨리 세었다...’ 그런데 저는 갑자기 고래의 다리가 정확히 몇 개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계속 글을 쓰려면 저는 그것을 아주 정확히 알아야 했습니다.” 나는 곧바로 책을 덮었다. 단언컨대 헤겔 법철학에 대한 독일어 논문보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집어 든 책은 <Unruhe>라는 이름의 만화책이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끝까지 읽을 수 있었는데, 여기서 그 줄거리를 조금 보이고자 한다. 작품의 배경은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조그맣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산을 넘어 들어가면 만 하루가 넘게 걸리는 산간벽지이지만, 케이블카가 건설된 이후로는 바깥과 수월하게 교류하며 마을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마을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면서 평온한 마을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마을 주민들은 어째서 구멍이 생겼는지를 묻지만 지질 구조로 인한 우연적 사건이라는 지질학자의 설명은 가닿지 못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왜를 묻다가 점점 더 불안해져서 저마다 이런저런 추측을 내놓다가 결국 그 불안은 누군가가 이 사태로 이득을 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분노로, 그러니까 그들이 범인이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어쩌면 이 마을의 지반에는 값비싼 광물이 함유되어 있었고, 그 사실을 안 외부인들이 광물을 효율적으로 채굴하기 위해 미리 케이블카를 건설하고 지반 침하를 일으킨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아니라면 케이블카와 마을의 발전 그리고 지반 침하라는 일련의 사건이 설명되지 않는다. 모든 것들은 하나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흥분한 마을 사람들은 외부와의 유일한 교류 수단인 케이블카를 자신들의 손으로 무너뜨리고 만다.
그러니까 <Unruhe>는 음모론에 대한 책이다. 이해되지 않는 세계에 대한 해답 체계라는 점에서 음모론은 다른 종교나 어쩌면 학문과도 동일하지만, 그럼에도 차이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지점은 음모론이 타자의 이득에 대한 의심과 분노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음모론의 기원은 타자의 향유에 대한 혐오다. ‘그들’은 은밀하게 ‘우리’의 것을 더럽히고 강탈하면서 즐기고 있다. 실제로 그러한 착취가 이루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서 그 가능성만으로도 충분하다. 예컨대 반유대주의 음모론을 보라. 유대인들은 전세계의 자본 시장을 장악하며 부를 쌓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존 F. 케네디 같은 미국 대통령도 암살할 수 있을 정도로 배후의 진정한 권력자이다. 유대인들이 실제로 정치와 경제, 학술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세계의 진정한 지배자라는 점을 곧바로 입증하지 않지만, 그 가능성만으로도 음모론은 불멸의 힘을 얻는다.

인류 최초의 살해가 타자의 향유에 대한 혐오로 벌어졌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카인과 그의 아우 아벨이 때가 되어 각각 곡식과 새끼 양을 하느님께 바쳤을 때, 하느님은 아벨과 그의 예물은 반기되 카인과 그의 작물은 반기지 않았다. 분노한 카인은 아벨을 들로 꾀어 돌로 쳐죽였다. 하느님은 어찌하여 카인의 소출을 반기지 않았는가. 카인이 평소에 행실이 바르지 않았거나 믿음이 부족했다는 신학자들의 일반적인 해석과 달리, 카인의 죄는 그가 아우의 향유를 혐오한다는 사실이었다. 카인이 처음 분노했을 때 하느님은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느냐? 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느냐? 네가 잘했다면 왜 얼굴을 쳐들지 못하느냐?”(창세기 4:6-7) 신의 요구는 스스로를 향유하라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산물에 충실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산물에 진정으로 충실한 자는 타자의 판단에 관계없이 고개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카인에게는 신의 향유만이, 그리고 동생의 향유만이 문제였다. 내가 아니라 그들이 즐기고 있다는 참을 수 없는 사실이. 카인이 불행했던 까닭은 그가 신의 멸시를 이미 내감하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 스스로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조차 향유하지 않는 소출을 결코 신에게 바칠 수는 없다. 그것이 그의 불경이고 그것이 바로 신이 멸시한 이유였다.
<Unruhe>에서 그리고 성경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결국 타자의 향유에 대한 혐오가 파괴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실상 자기 자신의 향유다. <Unruhe>에서 파괴된 것은 마을에 번영을 가져다주었던 바깥과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케이블카이고, 카인은 농부인 자신에게 땅이 더 이상 소출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저주를 받는다. 우리는 여기서 소설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처럼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 사랑을 떠나는 역설을 마주한다. 그러니까 X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그 X를 파괴하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 역설은 단순히 창작물에서만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전임 대통령은 종북 반국가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향유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고, 그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희생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경이로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타자가 나의 것을 은밀하게 향유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는 나의 향유를 포기해야만 한다. 부정선거 음모론도 동일한 논리를 가진다. 그들이 우리의 선거를 즐기게끔 허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미군이든 계엄군이든 출동하여 선관위의 간첩들을 잡아들여야 하고 우리 애국 시민들은 투표를 거부해야만 한다.
여기서 기본적인 역설은 우리의 향유가 타자에게 접근 불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이를 위해 때로는 우리의 향유 자체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에서 여전히 간과되고 있는 본질적인 역설은, 그러니까 우리가 타자의 향유를 혐오함으로써 은폐하는 진실은, 우리가 사실 우리 자신의 향유를 혐오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옛날 옛적 두 스님이 함께 수행하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강가에 이르자 강을 건너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젊고 매력적인 여인을 마주쳤다. 나이 든 스님은 망설임 없이 여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강을 건너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여인을 등에 업고 조심스럽게 강을 건넜다. 하지만 옆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젊은 스님은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는데, 수행자로서 여인과 살을 부딪히는 것은 계율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참지 못해 따지듯이 물었다. “스님, 외간 여인에게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저희는 몸가짐을 삼가야 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어떤 여인 말인가? 아, 좀 전에 강가에서 마주친 사람을 말하는가? 나는 그 사람을 강가에서 내려놓았네. 그런데 자네는 아직도 그 여인을 마음에 짊어지고 있구나.”
이 이야기는 완벽히 자신의 향유에 대한 혐오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젊은 스님은 다른 스님과 낯선 여인 간의 외설적인 마주침을 혐오했지만, 그 여인에게서 외설적인 매력만을 발견하고 그것에 붙들려 있었던 것은 실상 자기 자신이었다. 다시 말해 그 마주침에서 음란하게 즐기고 있었던 자는 바로 젊은 스님 본인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노스님에 대한 자신의 비난을 되돌려 받는다. 우리는 자신의 혐오스러운 향유를 타인에게 전가하고 그를 비난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향유로부터 도망친다.

그런 점에서 부정선거 음모론 또한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향유에 대한 혐오에 기반하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승리하라는 자신의 내밀한 욕망에 대한 혐오. 개표 조작을 저지른다고 가정된 ‘반국가세력’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의 향유를 대신하고 있으며, 달리 말해 우리는 ‘그들’에게서 전치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향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계엄령에 대한 보수층의 소극적인 비판은 단지 우리가 같은 편이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데, 윤석열이 우리 자신의 혐오스러운 향유를, 그러니까 불법적인 방식으로라도 타자를 제거하고 승리해야만 한다는 욕망을 열어밝히고 대변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수의 보수 유권자들은 비록 의식의 차원에서는 계염령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기는 했어도,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윤석열과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있었다.
사회적 적대가 나와 타자 사이에 놓여있기에 외부의 적을 제거하고 나면 우리는 다시금 평온한 동일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상상되지만, 사실 그 적대는, 그러니까 향유에 대한 혐오는 언제나 우리 안에 놓여있는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정치적 충돌이나 음모론과 같은 사회적 적대가 해소되기 어렵다. 나와 타자 간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예컨대 ‘관용’과 같은 태도로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모론으로 대표되는 난공불락의 적대적 담화와 논쟁할 때, 어쩌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접근 방식은 그것을 문자 그대로 전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담화에 내재한 적대가, 그것의 분열된 위치가 자연스럽게 폭로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윤석열은 보수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반국가세력의 헌정유린과 부정선거를 진심을 다해 문자 그대로 믿어주었고, 그렇게 보수 정치가 자기모순 속에서 스스로 자멸하도록 허락했다.
그럼에도 적대가 내적이기에, 진정으로 정치적인 순간은 언제나 그러한 자멸 내에 존립한다. 왜냐하면 정치란 은폐된 적대를 드러내고 매개하여 새로운 담화를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보수 정당은 이제 야당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대한민국 보수 정치의 담화가 타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한 담화이기를 소망한다. 보수 정치에게 타자의 향유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향유가 관건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자신의 소출에 충실하기를, 자신의 향유를 책임질 수 있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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