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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듄, 파트2>의 과학과 종교, 진보와 퇴보의 관점에서 / 김동규

최종 수정일: 3월 13일


최근에 <듄, 파트2>를 보았다.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줄거리도 볼만했지만, 스펙터클한 이미지와 강렬한 음향 제작에 성공한 영화였다. 원작 소설을 보았던 아내 말에 따르면, 독자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의 판타지가 첨단 기술로 구현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일, 이백 년도 아니고 만 년 이상의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평범한 사람들에게 상상력의 극대치를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나온 내 뒤통수를 잡아채는 의문이 있었다. 그 의문은 이러하다. ‘엄청나게 과학 기술이 발전한 미래 사회가 까마득한 과거에나 있었던 (역사책에나 존재할 법한) 중세 사회와 중첩되어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고도의 과학기술이 외계 행성에의 거주를 가능하게 해주었지만, 영화가 그린 미래의 정치 형태는 황제와 제후 귀족이 다스리는 왕정 혹은 과두정이다. 중세 봉건 시대를 연상시키는 정치 형태의 설정을 비롯하여, 먼 미래에도 종교(거의 미신에 가까운)가 창궐하고 무자비한 전쟁과 살육이 끊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화에 투영된 미래에 과학 기술은 진보하지만, 윤리 도덕은 전혀 진보하지 않았다. 지식 축적은 가능하지만, 지혜는 그처럼 비약적으로 축적되지 않는다는 뜻일까? 그래서인지 영화가 펼쳐낸 미래는 장밋빛 톤으로 물들어 있지 않다. 차라리 우주 공간의 암흑, 혹은 영화의 주된 배경인 아라키스 행성의 사막(영화제목 ‘Dune’은 모래언덕이자 프레멘들이 자신들의 행성을 지칭하는 말을 뜻함), 그 황폐한 정조가 미래를 감돌고 있다. 과연 이 세상은 진보하는 걸까, 퇴보하는 걸까? (원작 소설 <듄>에서는 과거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계급 불평등과 인간 저능화가 일어나 인간들의 반기계주의 항쟁인 버틀레리안 지하드(Butlerian Jihad)가 일어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버틀레리안 지하드가 일어나기 전 기계가 인간을 지배했던 풍경을 상상한 모습. 미드저니 봇. 프롬프트 오영진.

과학은 당연히 진보를 믿는다. 계몽의 자식인 과학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처단하고 나서(부친살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하였다. 과학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지식의 축적에 근거한다. 지식은 부단히 쌓이고 있으며,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폐기와 저장이 결정된다. 자연이란 정글에서 인간이 최상의 포식자가 된 까닭은 축적된 지식을 전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무찔렀던 칼, 화살, 대포는 결코 한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누구나 과학을 맹신하게 된 시대에 과학은 진보에 대한 믿음의 진앙지가 되었다.


과학과 가장 유사한 영역은 예술이다. 그것은 어원으로 쉽게 확인된다. 고대 그리스어로 예술은 테크네(techne)이고, 테크네는 테크놀로지, 테크닉의 어원이기도 하다. 예술이 과학과 유사하게 보이는 중요한 이유는 ‘새로움의 추구’에 있다. 기존에는 없던 것을 창작한다는 점에서 예술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의 너머를 지향한다. 최신의 것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예술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은 과학처럼 과거를 폄훼하지(과학계는 과학사를 중시하지 않는다) 않으며, 더군다나 진보를 강변하지 않는다(예술계는 예술사를 중시한다). 예술적 새로움이란 과거와의 차이만을 뜻할 뿐, 차별을 담고 있지 않다. 피카소의 작품이 결코 다빈치의 그것보다 더 우수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술은 몸집을 불려가는 총체적 지식 축적이 아니라, 파편적인 가능성의 확장을 꾀한다. 비유컨대 전자가 바다를 메워 섬의 영토를 확장해 가는 것이라면, 후자는 바다에 스며들어 두루 퍼지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과학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것이 종교다. 기본적으로 종교는 진보가 아닌 퇴보를 말한다. 종교인이 보기에, 이미 종교의 교주가 최상의 진리를 말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선포된 진리의 빛이 바랜다고 생각된다. 경전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쓰는 모습에서도, 과거에 존재했던 성자의 모습을 삶의 모델로 삼는 태도에서도 퇴보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듄>의 세계관 속 반기계주의 성서인 오렌지 카톨릭 성경을 읽는 시민들. 미드저니 봇. 프롬프트 오영진.

진보와 퇴보,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이들이 철학자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철학자란 단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일 뿐이다. 단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너무 퇴보를 과신하는 것 같으면 진보를 말하고, 반대로 진보를 과신하는 것 같으면 퇴보를 말한다. 철학의 목표는 생의 외줄타기에서 균형을 잡고 안전하게 일보를 내딛는 데 있다. 미신(과학주의, 종교의 온갖 도그마 등)에 사로잡힌 사람들 한가운데에서 그들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려는 사람, 그가 바로 철학자다.


과학은 진보를 말한다. 과학이 상대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른 것과의 비교 속에서 크고 작음, 높고 낮음이 분별되며, 지식의 축적을 통해 작고 낮은 것이 크고 높은 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여기에서 축적(예컨대 빅데이터)이란 죽음으로 한정되는 개체의 한계를 돌파하게 해 주는 방편이다. 죽고 태어나고 백년을 채 못 사는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천적들을 연달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그처럼 죽음을 극복하는 ‘지식 축적’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정글의 폐쇄적 한계상황에서 동종 포식이 일어나는 것처럼, 인간은 같은 인간마저 죽이거나 노예로 삼는다. 극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지식 축적의 힘으로 자기보다 못한 인간을 그렇게 대우한다.


그러나 지혜의 영역에서 축적이란 불가능하다. 지혜란 맹목적인 축적이 치명적인 비만을 낳는다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지혜란 지식 축적처럼 죽음의 초월이 그처럼 간단하게 발생하지 않는다는 자각, 생사 초탈의 해법에 인간이 여전히 무지하다는 자각에 다름 아니다. 종교는 상대가 아닌 절대의 지평에서 진리를 설파한다. 그래서 손쉽게 퇴보, 퇴락, 타락이라는 단어들을 남발하는 것이다. 반면 철학은 상대와 절대(이런 절대는 상대적 절대로 귀착) 모두를 고려한다. 진보와 퇴보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듯이 상대와 절대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듄, 파트2>라는 SF 영화를 보면서, 진보와 퇴보(또는 과거를 지키려는 보수)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인류의 미래에서 과학기술은 진보할 수 있으나, 정치체제는 퇴보할 수도 있다. 진보가 마냥 좋은 것도 아니고, 보수가 마냥 나쁜 것도 아닐 것이다. 영화가 던진 의문을 토대로, 지금까지 나는 진보와 퇴보의 관점에서 <과학-예술-철학-종교>를 재배열해 보았다. 물론 이것은 구조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현실에서는 보수적인 과학자도 많고 진보적인 종교인도 있다. 아무튼 이런 도식에서 본다면, 과학과 예술을 후원하지 않는 정부는 보수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철학과 종교마저 우습게 아는 정부라면 보수 정권도 못 될 것이다. 소위 “수구꼴통”에 해당될 것이다. 문명 이전의 ‘야만’에 속할 것이다.

     

첨언: 웹진에서 함께 칼럼을 써 왔던 박성관 선생의 때 이른 죽음을 독자들과 같이 애도하고 싶다. 그는 종교와 철학, 과학과 예술에 두루 관심을 가졌던 ‘희귀한’ 지식인이었다. 이 자리를 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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