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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와 눈치 / 김동규

최종 수정일: 2023년 3월 27일

나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편이다. 타인과 함께 있을 때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는 경우에도 가슴이 울렁이고 얼굴이 빨개지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에야 그런 모습까지 순진하고 귀엽게 보였겠지만, 머리카락이 희끗해진 중년 남자에게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직업상 매일 교단에 서고 가끔 대중강연도 하는데, 그때마다 불쑥 머리를 내미는 수치심을 감출 수 없다. 전혀 부끄러울 이유가 없다며 마음을 진정시켜보려 해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은 여간해서 멈춰지지 않는다.


미래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예상이 불안을 몰고 온다. 소위 ‘예기불안(anticipatory anxiety)’이 불안을 더 가중시키며 무대공포증을 낳는다. 이 경우 불안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이 흠 없이 일을 완수할 수 있는 존재라는 터무니없는 기대 혹은 믿음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완벽함 혹은 전능성을 믿는다. 살면서 그 믿음이 가당찮은 것임을 확인함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그 믿음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도리어 일을 망친다.



전능성에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고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은 ‘역설의도(paradoxical intention)’라는 치료기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기법은 두려워하는 바로 그 일을 하도록 하거나 혹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도록 북돋는 방법이다. 사실 민간에도 잘 알려진 ‘이열치열’과 유사한 방법적 원리를 깔고 있다. 예컨대 땀 흘리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는 사람의 경우, 예기불안으로 전전긍긍하느니 ‘전에는 땀을 한 바가지밖에 안 흘렸지만 이번엔 적어도 열 바가지는 흘리게 될 거야’라고 유머러스하게 생각한다든가, 무대공포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번에 무대에 서면 아예 거품을 물고 기절할 거야’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역설의 유머를 통한 자기 거리 확보로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난다. 남들의 우스갯거리가 되기 전에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전능성의 허구를 박살내는 방법이다.


앞선 사례에서 무대라는 곳은 타인의 시선이 모이는 공간이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통해 발생한다. 타인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지 사실 정확히 모르면서도 그것에 큰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를 감춘 채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내게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는 이런 시선을 항상 의식한다. 자신의 치부를 바라보는(바라볼지도 모르는) 타인의 시선에 불안해한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시선으로 수치심을 탁월하게 분석하였다. 그는 열쇠 구멍을 통해 타인의 방을 훔쳐보는 사람을 사례로 꼽고 있다. 몰래 훔쳐보는 관음증적 응시는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중단되며, 그때 수치심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타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못난 자아를 발견하는 순간 발생하는 자의식적 감정이 바로 수치심이다. 이런 수치심은 타자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발현된다. 타자의 시선 앞에서 자아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닌 한갓 ‘대상’으로 응고된다. 그리스 신화 속 메두사의 눈처럼 타인의 시선을 응시하는 순간 생명을 잃고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이와 같이 타자의 시선은 자기존재의 품격을 강등시켜 수치심을 유발한다.


사르트르의 후배 철학자 데리다는 타자의 외연을 확장시킨다. 즉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까지 시선의 힘을 가진 타자라고 이해한다. 그는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 앞에서 수치스러운 당혹감을 느꼈던 일화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진술한 적이 있다.

“종종 나는 자문한다. 있는 나를 단지 보는 것, 그리고 한 동물의 시선, 예컨대 한 마리의 고양이의 눈에 조용히 사로잡힌 순간에 나를 본다는 것에 대해 자문한다. 그때 나는 어려움을 겪는데, 당혹감을 극복해야 하는 나쁜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에게 타인의 시선이 위력적인 까닭은 타인이 나와 같이 자유로운 대자존재여서 나를 대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고양이 같은 동물이 그런 존재일 수 있을까? 나는 여기서 이 난제를 다루지는 않겠다. 다만 나도 데리다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였다는 말만 덧붙이기로 한다.


Jean-Paul Sartre 1967

사르트르의 시선은 타자를 대상으로 석화(石化)시키는 폭력적 시선이다. 그런데 타자의 시선 가운데 과연 이런 시선밖에 없을까? 그와 정반대인 사랑의 시선도 있지 않을까? 피그말리온 신화가 보여주는 대로, 사랑의 시선은 오히려 돌덩어리 조각상을 뜨거운 피가 도는 여인(갈라테이아)으로 변신시키지 않는가? 물론 사랑의 시선이 교환되는 곳에서도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이 전제된다면, 심지어 돌덩이나 고양이 앞에서도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사랑에서 유래한 수치심이야말로 진짜 (좋은) 수치심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시선이 만드는 수치심의 정체는 무엇일까?


플라톤은 훌륭한 삶으로 이끄는 두 원리를 제시한 바 있는데, 소극적으로는 수치심이며, 적극적으로는 명예심이 바로 그것이다. 수치는 최소한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게 만들며 명예는 적극적으로 훌륭한 일을 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 두 원리의 저변에는 에로스의 시선이 전제된다. 사랑의 시선이 없다면, 궁극적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도 없고 명예를 드높일 이유도 사라질 것이다. 사랑의 시선을 전제한 수치심, 그것을 우리는 수줍음이라 말했다.


수줍음이란 사랑의 눈치를 보는 행위다. 사춘기 무렵 사랑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고 의식할 때 몸을 비비 꼬게 하는 수줍음이 발생한다. 이런 젊음 특유의 수줍음은 무척 소중한 것이다. 사랑이 현존한다는 굳은 믿음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앞서 언급된 온갖 수치심과 여러 심리적 장애를 극복 대상으로 삼을 때, 혹시 수줍음마저 내다 버리는 것은 아닌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수줍음은 극복대상이기는커녕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꼭 간직해야 할 마음가짐이다. 그것이 사랑의 현존과 사랑에의 믿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소위 ‘어른’이란 수줍음을 상실한 자가 아니라 수줍음을 아름답게 성숙시킨 사람을 뜻한다.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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