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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마법성 / 오영진

최종 수정일: 2021년 6월 9일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가는 풀, 어두워져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서대경, <차단기 기둥 곁에서>(전문),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문학동네, 2012

낭독: 오영진



카프카의 『변신』이 그 끔찍한 악몽에도 불구하고 환상문학의 통상적 규칙에서 볼 때 환상문학이 아닌 이유는 주인공이 현실에서 환상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생략되었으며 그로 인한 ‘망설임’이 없기 때문이다. ‘망설임’이 없다는 것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 따위가 애초 성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변신』의 주인공은 벌레의 신체로서 던져진 것에 가깝다. 때문에 독자의 당혹감으로 시작한다. 소설은 변신 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주인공의 노력보다는 벌레의 몸으로 세계를 다시 감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더 보여준다. 단지 세계가 벌레가 된 주인공을 반기지 않을 뿐이다.


위의 서대경의 시 「차단기 기둥 곁에서」의 화자는 자연 속 염소의 배치를 생각해보고 자신의 신체로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다. 염소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풀의 따스함, 고요함, 웃음, 속삭임, 작은 소리들이 관계하는 존재다. 염소의 배치를 음미하는 일은 염소의 사회적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 아니며 겉모습이 염소로 변신했다는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염소라는 동물이 자연과 맺은 관계를 자신의 신체 안으로 기입하는 일이다. 그래서 독자가 이 시를 읽고 최종적으로 얻는 것은 염소의 이미지가 아니라 풀의 느낌이 된다.


벤야민은 "언어는 그 무엇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기 자신을 전달”([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길, 2008, p.73,)한다고 말한다. ‘정신적 본질의 전달’은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것이지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언어를 매개(媒介)가 아니라 매-체(媒-體)로 보았다. 의미전달에만 신경을 쓰면 이러한 언어의 신체성을 감지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의미의 교환관계를 깔끔히 성공시키는 부르주아의 합리적인 의사소통에 복무하는 기호적 언어는 타락한 언어다. 도구화된 언어로서 잔여 없이 말끔한 교환관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일상적 언어 뒤의 잔여를 본다. 이 잔여는 (언어화 되지 못한) 이름 없는 것들이다. 시인의 임무는 자연 혹은 사물의 세계 속에서 잔여를 섬세하게 감지하는 일이며, 이를 진정성 있게 번역하는 일이다. 오래 전 부터 서대경 시의 환상에는 무게와 질감이 있다고 느껴왔다. 비슷한 또래의 시인들이 초현실적인 언어구사를 하지만 말 그대로 언어적 세계에 머물며 말의 과잉으로 끝나는 것과는 달랐다. 그의 언어가 무언가 지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듣는 이로 하여금 분명 어딘가 가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 가야 하는가? 가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마법적이다. 단지 '염소'라고 발화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염소'의 곁으로 가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서대경의 시를 낭송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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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진(공연기획자,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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