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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비빌 것인가? -이승훈의 『비빔밥 시론』 다시 읽기 / 신동옥

이승훈(1942~2018)은 1997년 봄 자신이 주재하던 계간 『현대시사상』에 『비빔밥 시론』을 발표한다. 이 시론에 이르는 맥락은 이른바 ‘정신주의 vs 해체주의’ 논쟁에 가로놓인다. 1996년 11월 이승훈은 『시도 없고 시적인 것도 없다』(『문학사상』)를 발표한다. 최동호 교수의 월평 『시의 부정, 해체 그리고 시적 생성』(『문학사상』, 1996.10)에 대한 반론이었다. 이성선이 『정신주의의 서정성과 우주적 생명관 확보』(『문학사상』, 1996.12)를, 박상배가 『‘시대의 문학’이란 유령과의 투쟁 선언』(『문학사상』, 1996.12)을 보론으로 제기하며 논쟁이 확대된다. 김준오가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기 위한 논쟁』(『문학사상』, 1997.1)을 발표하며 논쟁은 정리 국면으로 접어든다. 『비빔밥 시론』은 논쟁의 과정을 정리하며 발표한 시론으로 이승훈 후기 시 이해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 선언적인 의미를 지닌다.

1960년대 초부터 전개된 이승훈의 시쓰기는 대상과 자아, 언어라는 맥락 속에서 전개된다. 대상은 대상-세계로서의 물(das Ding)과 관련된 의미론적-존재론적 지반을 가리키고, 자아는 실체 내지는 실재에 대한 주체의 작인과 상관하는 논의의 축이다. 물론 언어는 ‘시쓰기’라는 과정 전체의 ‘매개/매체’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띤다. 자아를 중심으로 한 탐색은 ‘나-너-그’라는 인칭 의미론의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이는 타자성에 대한 철학적인 논구와 상관한다. 예를 들어, 이승훈이 ‘그’라는 3인칭, 그리고 물화된 기표로서의 ‘이승훈’을 등장시키는 일련의 작품을 쓰던 무렵의 인칭 의미론적 작업은 ‘소외’에 대한 프레드릭 제임슨의 ‘후기 자본주의’ 논리와 연관된다. 만델이 쓴 ‘후기 자본주의(late marxism)’는 제임슨에 의해 모더니즘의 내적 논리 속에서 굴절된 채 극한으로 치달은 ‘성찰성reflexivity’을 가리키기 위한 용어로 재명명된다. 예술적 자율성은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와 상통한다. 모더니즘은 교환관계의 불균등의 순간을 파편화, 특권화한다. 역설적으로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이 나타나고, 역사성은 여러 시점의 동시적인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아나크로니즘으로 치닫는다.

이승훈의 결론은 명징하다. 나는 타자다. 타자는 그 어느 것도 ‘나’로 확정될 수 없기에 영원히 타자다. 의미나 실재에 대한 희구는 언어의 역능에 대한 신뢰와 해체적인 부정을 오가며 2인칭 ‘당신’에 대한 호명으로 나아가지만, 주체로서의 나와 객체로서의 나는 분열된다. 증식하는 분열의 반복성은 그 자체 시쓰기의 실패를 증거하고, 불가능성의 원환에 갇힌 ‘자아’를 그대로 드러내는 시쓰기 자체에 대한 시는 이 시기 이승훈 시의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이승훈, 『해체시론(비평컬럼선 6)』(1998) '비빔밥 시론' 수록
이승훈, 해체시론(비평컬럼선 6)(1998) '비빔밥 시론' 수록

이렇게 써놓고 보면 추상적이기 짝이 없지만, 이승훈이 들고 있는 사례는 의외롭게도 ‘비밤밥’이다. 개인적인 인연으로 오래 뵈었는데, 선생님이 좋아하던 음식은 잡채밥, 김밥이었다. ‘잡채밥 시론’이 아닌 이유는 불결하기에. 그거 먹고 종종 배앓이를 했기에. 김밥도 마찬가지리라. 음식 문화를 시론으로 끌어들인 셈인데, 메릴린 스트래선은 ‘문화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는 삶의 형식들에 대한 유토피아적 몸짓’이라고 쓰기도 했다. 문화는 자연이 아니라, 문명을 경유하여 대상-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기 때문이라는 것. 여기서 복수로서의 타자성에 대한 성찰 가능성은 희미해지지만, 복수로서의 우리가 맺는 물질적 과정을 ‘배치’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이승훈이 선호하지 않던 단어였지만, 아무튼 ‘비빔밥’이라는 단어 자체가 문화적인 감식안, 그것을 바라보는 생기론적 은유를 담고 있다는 것은 지적할 필요가 있다. 비빔밥은 무엇인가? 다음은 이승훈 시론의 도입부.

     

“비빔밥은 밥도 아니고 반찬도 아니고 밥과 반찬의 경계가 모호할 뿐 아니라 재료를 섞고, 비비고, 만드는 과정이 먹는 과정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비빔밥은 완성된 것도 아니고 개방적이다. 모든 음식은, 김밥이나 주먹밥까지도, 완성된 다음 먹는 것이지만 비빔밥은 내가, 당신이, 우리가 만들며 먹는다. 만든 다음 먹는 것이 아니라 만들며 먹고,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고 먹는다.

“그리고 완성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 생성이 중요하고, 그런 생성이 무슨 단일한 체계가 아니라 복수성, 파편의 세계로 뒹구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비빔밥에서는 안과 밖이 섞이고 밥과 반찬이 섞이고 당신과 내가 섞이고 시와 비시가 섞인다. 섞임의 미학이다. 이런 복수성의 세계는 이른바 2항 대립체계, 위계질서를 해체한다는 점에 의미가 있고 무의미가 있고, 철학이 있다.”

     

이승훈이 강조하는 것은 개방성, 복수성이다. 과정과 생성에 방점이 찍히는 미학이고, 그것이 함의하는 전복성의 계보 속에서 다시 쓰이는 전위 예술의 가능성이다. 선생님은 장모님이 만들어준 ‘진주비빔밥’을 먹고 비빔밥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는데, ‘진주비빔밥’이건 ‘양푼비빔밥’이건 중요한 것은 ‘비벼서 만든다는 것’에 있다. 똑같은 재료를 대나무발에 가지런히 펼치고 김으로 싸서 같은 크기로 자르면 김밥이 되지 않나. 김밥에는 없고 비빔밥에는 있는 것은 무얼까? 여기서 이승훈의 주장을 조금 비틀어서 확장할 여지가 생긴다.

스테판 타일러는 “의미는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use)’ 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use’는 일종의 수행성으로 되새길 수 있는데, 비빔밥과 겹쳐서 다시 쓰자면 디자인에서 말하는 행위 유도성(affordance)과 상통한다.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수행성이 비빔밥에는 존재한다. 자연스레 섞고 비비는 과정이 유도된다.

이런 의미에서 비빔밥은 꼴라주(collage)가 아니고 패스티시(pastiche)가 아니다. 비비기 이전의 재료와 이후의 요리가 빚는 다수성(multiplicity)과 고유성(particularity)의 문제도 비켜갈 수 있다. ‘비빔’이라는 행위를 직관적으로 이끌어내는 이러한 특성은 생성을 위해 이질적인 요소들을 조립하여 창출하는 역동성이라는 의미에서 들뢰즈의 ‘아상블라주’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은 ‘시론’이다. 이승훈의 주장을 조금 더 따라가 보자.

     

 “시를 찾는다는 것은 시를 포기하는 행위와 통한다. 시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고 반복이 있다. 시의 정체성, 기원, 목적은 없다. 기/원이 비기원이다”

“시는 없고 차이와 반복만 있다면 이 시에서 나는 시와 편지 사이에 시가 있고, 시와 편지 사의 차이가 시이고, 또 편지와 시 사이에 편지가 있고, 편지와 시의 차이가 편지라는 이른바 사이의 미학, 혹은 반미학을 노린 셈이다. 일종의 장르 해체이며, 광의로는 복합매체(indermedia) 미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문학이라는 이름의 이상한 제도 또는 유령’을 해체하는 방법은 무얼까? 자율성, 일관성, 통일성을 부정하고 해체하는 방법은 무얼까? 종국에는 시라는 이름의 제도가 가지는 ‘제도성’을 허무는 방법은 무얼까? 이승훈이 노리는 바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우선 이승훈은 복수성과 단수성의 문제를 지적한다. 특권화한 차이의 경제인 ‘장르’의 고유성으로 응결하는 한 편의 작품이라는 개념은 부정된다. 한 편의 작품과 맞쪽을 이루는 단일 저자라는 개념 역시 폐기된다. 하나의 완결된 의미, 진리에 대한 충동은 ‘부르주아적 허구성’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파편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제목이라는 ‘제도’ 아래 한 개의 작품으로 묶일 수밖에 없는 시쓰기의 아포리아를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기서 이승훈의 대답은 저 1960년대부터 시종해왔던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하지만 그 <나>는 모두 언어 속에만 존재하고, 언어의 본질은 차연”이다. 언술 행위의 주체와 언술 내용의 주체는 선후적인 관계가 아니다. 동시적인 관계다. 쓰는 순간 두 개로 분열되는 ‘나’는 모두 언어 속에서만 실재한다. 행위와 내용은 동시적으로 병존한다, 비빔밥이 그러하듯. 행위와 의미는 병존, 지연, 연기의 관계 속에 있다. 그러므로 쓰기의 주체가 있다는 말도 답이 될 수 없고, 없다는 말도 답이 될 수 없다. 쓰기는 ‘차연’ 속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이제 한 편의 시는 차연의 수행 속에 나타나는 흔적이다. 차연은 죽음이고 타자다. “시쓰기는 결국 시인의 부재를 알려주고, 시인의 부재는 죽음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죽음을 운반한다.” “무수한 텍스트가 있을 뿐이다. 시인도 소재도 주제도 없다.” “저자는 없다. 낱말, 글, 문자는 저자의 부재, 죽음을 운반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무어고 시쓰기는 또 무언가? 시 그것은 의미에 대한 추궁이 아니라, 의미의 소재 자체에 대한 물음에서의 해탈이다. 시는 위대한 놀이다. 과정, 오류, 흔적 속에서 생성이 역설적인 진리다.

     

그렇다면 ‘비빔밥의 은유’를 성립시키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서 차이, 매개, 형식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승훈의 시론을 탈맥락화하여 문화론의 견지로 전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먼저 비빔밥 그릇의 문제. 비비는 행위는 관계적인 것들이 만드는 대화적인 관계 속에서 성립된다. 총체적인 무언가를 가정하지 않고, 프랙탈적으로 이어지는 ‘부분적인 연결’(메릴린 스트래선) 속에서 ‘비빔밥’은 태어난다. 그것은 애매하게, 뒤섞인 채로 다가오는 무수한 타자와 나가 뒤섞이는 과정이며, 그러한 과정은 수행적인 발견의 과정과 상통한다. 비빔밥에 실재가 있는가? 뒤섞이면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변형되면서 재생성되는 관계 자체를 창조하고 또 창조하는 행위가 문제인 셈이다. 이 뒤섞기가 답이 될 수 있을까?

비빔밥의 재료들은 자체의 고유성이나, 관계가 빚어내는 역사성의 측면에서 그러모아지지 않은 ‘잔여물’이다. 뒤섞는 행위는 잔여물을 경유하면서 만들어지는 미시적인 서사화 과정과 상통한다. 그 자체로 물질적인 집합체들의 배치,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정동적인 과정.(유시 파리카) 메릴린 스트래선은 ‘하나’가 아니라 ‘하나들(ones)’이 문제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하나’에 대한 희구를 벗어나기는 요원하다. 우리는 애초에 모나드적인 속성들을 복수로 다루거나, ‘총체로서의 하나’라는 전제를 부정하고 얻은 다수성 속에서 현상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그러모으면 관계가 생성되지만, 관계는 늘 그것 ‘사이’ 또는 ‘밖에’ 존재한다. 상관관계는 ‘관계성’이라는 가상의 점근선이 긋고 지나간 허방(void)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할 뿐이다.

혼성성, 경계 이월의 논리는 타자를 상대화하면서 가치의 문제를 봉쇄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혼성적 발화’를 수행하는 발화 수행 주체의 권위를 오히려 특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승훈이 발화 수행 주체와 발화 내용 주체의 구분을 폐기하면서 논의의 향방을 제시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을 껴안는 보편적인 ‘하나’를 요구하면서도, 고안되지 않고 형성할 수조차 없는 어떤 프레임을 선험적으로 가정하는 것은 바로 ‘혼성성’ 논리의 아포리아다.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두손으로 비빌 수 있다. 젓가락으로, 숟가락으로 비비고, 수틀리면 손으로 비빌 수도 있다. 그러나 비빔밥은 그릇이 필요하다.

개별적인 다양성을 설명할 논리는 차고 넘치지만, 그것을 통합할 형식의 역동성에 대한 전제를 우회하거나 다시 쓸 방법은 요원하다. 한편에는 비빔밥의 행위유도성과 수행성 속에서 창조되는 순간의 가능성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파편적인 것들이 뒤섞이는 과정이 있다. 그러나 이 두 명제를 연결한다고 혼성화 과정 자체가 대안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는 없다.

증식하는 차이에도 종착점이 있다. 토릴 모이는 차이에 대한 강조는 ‘의미의 전위(displacement)와 차연의 무한히 증식하는 네트워크’ 속에 주체를 던져넣을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차이에 대한 강조는 비교 자체를 성립시키는 선택적 친화성에 기대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차이는 유사성에 대한 이끌림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어떤 의미에 대한 원근법적인 시선을 전제하지 않는 한 비교 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 비교 가능성은 어떤 대상에도 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실재에의 충동을 강조하는 시각은 해석자의 사유 속에 애초에 자리한 불균형의 지점을 드러낼 뿐이다.


비빔밥 그릇이라는 구조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

“형식은 어떤 커뮤니케이션의 구성이 생겨나기 이전에 작가나 관객 혹은 독자가 공유하는 공통 자산”이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고전적인 정의. 하나의 장(field), 독립적인 주체, 단일한 매개, 번역과 수행 가능성을 가정해야만 성립되는 정의다. 과연 그러한가? 음악인류학자 조지나 본은 모든 매개는 다층적이라고 보았다. 관계적, 제도적, 정동적, 시간적 과정의 총체가 매개이며, 매개는 고유성과 복수성의 수준을 수월히 넘어서며 담론, 제도, 정동적 연결, 시간적 리듬을 포괄한다는 것. 형식은 ‘매개된 관계적 장’(relationally mediated field) 속에서 생성, 변형되는 실천에 가까워진다. 대칭적 비대칭성 속에서 연결되고, 흔적을 아로새기기 때문이다.

기준이나 전제에 대한 부정이 ‘가치의 문제’ 자체를 삭제할 수는 없다. 매개/매체로서의 언어에 대한 회의와 모나드적인 자율적 개인의 ‘자기 발화(autoaffection)’의 우선성이 직접 등치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파편화의 결과가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폭력적인 총체화 과정에 상응하는 양상을 우리는 이미,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타자성이 외부와 내부의경계를 허물며 빚어내는 불안, 공포, 꺼림칙함. 연대를 성립시키는 논리적인 전제인 ‘구성적인 외부’마저 허물어트리는 붕괴. 직관 이전의 취향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동일화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수록 감소하는 선택의 자유, 형식적인 구체성들. 우리 앞에 놓인 세계는 그러한 방식으로 증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를 빚어내는 생성의 흔적이 새겨지는 맥락,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효과들. 이를테면, 번역, 유포, 재도식화의 리듬과 위계 또는 네트워크. 그것들이 층차를 빚어내며 발생하는 쟁론의 틈. 다시 생산된 차이를 연결하는 ‘비빔’. 그것은 아마도 이승훈이 젖혀둔 의미와 가치와 정동들이 배회하는 틈을 깁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애초에 비비고 뒤섞은 행위는 그러한 틈을 직시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신동옥(시인, 국립목포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신동옥(시인, 국립목포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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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한국연구> 편집위원

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오영진 (서울과기대 융합교양학부 초빙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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