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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헨델의 <창세기와 만나다: 탄생, 갈등, 성장의 역사> 리뷰 / 김진혁

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사이에서 창세기 읽기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만 따지자면 책은 생명이 없다”(『창세기와 만나다』, 16). 하지만 생물학적인 생명이 없더라도 책은 출판과 해석, 비평 등을 통해 마치 생명체처럼 탄생과 성장, 노화의 과정을 겪는다. 모든 책이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몇몇 특별한 책은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고, 먹고사는 문제로 위축된 저자보다 훨씬 당당하게 역사의 무대를 누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경전이자 서구 문명의 고전인 창세기는 역사 속에서 생명력을 획득한 수준을 넘어, 영원하고 무소부재한 신의 권위마저 흡수해 비할 바 없이 신성하고 강렬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러다 보니 창세기는 인간의 삶을 특정 방식으로 빚어내고 이해하는 서사와 언어를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제공했고, 이 고대문서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놓고 침 튀기고 때론 피 튀기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창세기일진대 한 줌 티끌밖에 되지 않을 인간이 감히 전기를 쓰려 하다니, 이 어찌 유한자의 분수를 모르는 ‘신성모독적’인 작업이 아닐 수 있겠는가. 마치 신의 얼굴을 보면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듯, 창세기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학자로서 생명을 단번에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시도 아닌가.


현재 미국 UC버클리의 히브리 성서 교수이자 유대교 학자인 로널드 헨델(Ronald Hendel)은 프린스턴대학교출판부의 ‘위대한 종교 저작들의 생애’(Lives of Great Religious Books) 시리즈의 일부로 창세기의 전기를 써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박식하면서도 영민한 유대인 학자는 창세기라는 고대문서의 생애를 다루는 영광스러운 모험은 받아들이되, ‘매력과 두려움’을 함께 내뿜는 이 책의 무궁무진한 생명력을 직접 대면하는 위험은 피하기로 한다.


그래서 그는 유대계 독일인 문학평론가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라는 렌즈를 자기 앞에 내세운다. 아우어바흐는 1946년도에 출판한 『미메시스』에서 고대에서 근현대까지 대표적 서구문학을 비평하는 엄청난 과업을 독창적이면서도 훌륭하게 이뤄냈다. 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 텍스트 읽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비법을 아우어바흐에게서 발견한 헨델은, 이를 활용해 약 3000년에 달하는 창세기의 생애를 304쪽의 지면에 압축해낸다(번역본으로는 326쪽). 그 비법은 바로 ‘현실주의와 상징주의의 관계’(『창세기와 만나다』, 24)를 통해 텍스트와 역사의 상호관계를 읽어내기이다.


실제 헨델은 창세기를 탄생시켰던 고대 근동의 현실주의가 고대와 중세에 상징주의적 해석으로 변화했다가, 근현대에 새로운 형태의 현실주의로 돌아서기까지의 과정을 학자로서 전문적 지식과 맛깔난 문체에 버무려 제시한다. 하지만 방법론적 선택이 치밀하고 구체적일수록 거기서부터 빚어질 수밖에 없는 글의 한계도 더욱 뚜렷해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그중 대표적인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하도록 하자.


첫째, 창세기의 저자가 모세라는 전통적 입장과 달리, 대부분 근현대 학자는 모세 사후에 작성된 여러 문서가 오랫동안 모이고 편집되면서 창세기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 책의 첫 장에서도 헨델은 창세기가 야훼 자료(J), 엘로힘 자료(E), 사제 자료(P)로 구성되었다는 문서 가설을 활용하며 그 기원을 설명한다. 이는 약 400년간 어떤 자료가 쌓이며 창세기가 형성되었는지에 관한 정보 제공과 더불어, 창세기 내의 여러 현실주의적 목소리를 자료에 따라 구분해주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다음 장부터 창세기의 상징적 의미가 강조되었던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오랜 해석의 역사를 심도 있게 추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는 텍스트의 수용과 해석 과정에서 창세기에 부여된 그토록 높은 권위는 자명한 듯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이 ‘특별한’ 문학으로서 창세기에 집중해서인지, 어떤 이유로 많은 고대 문헌 중 창세기가 ‘특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빈약하다. 물론 모든 텍스트가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는 해석에 열려 있다지만, 창세기에 대한 상징주의적 해석이 유독 많고 심지어 규범적 성격까지 발휘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전기까지 등장할 정도로 창세기가 독보적 생애를 살아왔다는 데 설득력이 더 생길 것 같다.


둘째, 원서 제목에 따라 이 책은 ‘창세기의 전기’이다. 그런데 헨델이 집중하는 본문은 우주의 창조, 인류의 출현, 첫 인간의 불순종, 대홍수 등의 굵직굵직한 사건이 등장하는 창세기 1-11장에 거의 한정된다. 창세기 1-11장의 문서 비평으로 학문성을 이미 인정받은 저자인 만큼 『창세기와 만나다』에서도 그만의 전문성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총 50장으로 구성된 창세기의 전반부만 주로 다룸으로써, 전기로서 이 책의 완성도는 떨어진 감이 있다. 특히 현실주의와 상징주의의 관계라는 틀을 가지고 구성되다 보니, 이 책은 경전이나 문학으로서 성서에 관한 관심이 미미한 세속사회에서도 창세기의 영향력이 노골적으로 발휘되는 현대 정치와 윤리 등에는 충분한 관심을 주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창세기 12장 이후 나오는 신과 아브라함의 계약 이야기는 이후 신의 본성에 대한 이해, 종교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의 형성 등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신의 은총에 대한 해석 차이로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 제자들은 유대교와 분리되었고, 이들의 독특한 아브라함 이해는 그리스도교 문명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큰 동력이 되었다. 또한, 신이 아브라함과 맺었던 관계에서 잉태된 ‘신의 백성’이라는 정치적 개념, 그리고 아브라함의 두 아들과 증손자들인 요셉과 형제들의 정통성과 정체성 문제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국제 관계에서 갈등과 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Genesis (Marc Chagall)

앞서 말했듯 『창세기와 만나다』는 현실주의와 상징주의를 대비하며 창세기의 전기를 쓰다 보니, 그 장점과 단점이 매우 명확한 작품이다. 한정된 지면에 다 풀어내지 못한 비판 거리도 있지만, 방법론적 선택이 확실한 만큼 밋밋한 수용사나 해석사를 읽는 것보다 더 넓은 시야와 더 큰 지적 만족감을 선사해줄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저자가 책을 맺으며 말하던 “비로소 창세기를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게”(『창세기와 만나다』, 311)된 때가 실제 이르렀는지는 의문이 생기지만, 인류의 일원으로 집단 기억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창세기는 신앙 여부와 무관히 여전히 중요하고 가치 있는, 달리 말하면 늘 새로운 기대를 품고 만날 만한 ‘현대적인’ 고전임을 이 책 덕분에 새삼 깨닫게 된다.

김진혁(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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