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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남긴 우리 시대의 과제 / 진태원

촛불 정신으로 돌아가기?

이번 대선을 민주당의 패배일 뿐만 아니라, 좀 더 넓은 의미의 진보 정치 진영의 패배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불과 5년 전에 국정농단과 대통령 탄핵으로 인해 붕괴하다시피 했던 수구 세력이 화려하게 부활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부활에 기여한 세력이 다름 아닌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정치 진영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수구 세력이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민주당의 정책적 실패와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 근소한 차이의 패배를 가져온 것이며, 이 근소한 차이는 앞으로 혹독한 결과들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방금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라고 표현한 것을 많은 사람들은 ‘촛불 정신에 대한 배반’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지칭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통령 탄핵 이후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 촛불 정부를 자임했으며, 특히 2018년 열린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 정부가 5.18 광주 정신과 ‘촛불혁명’의 기반 위에서 탄생했다고 선언하면서 국민주권의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촛불 정부를 자임했으면서도, 스스로 표방한 촛불 정신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배반한 행위의 결과라는 것이다. 대선의 패배를 성찰하면서 여러 지식인들이 민주당만이 아니라 진보정치 진영 전체가 촛불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촛불 정신으로 돌아가기는 해법이 아니라 사실 지난 5년간 겪었던 문제의 반복에 불과하며, 똑같은 패배를 비슷한 방식으로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해법이다. 진보정치를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촛불 정신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촛불 정신 또는 이른바 ‘촛불시민혁명’의 애매성(ambiguity)과 한계가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촛불시민혁명’의 한계

나는 2016년 겨울에서 2017년 봄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뒤흔들었던 촛불 집회에 나름대로 열심히 참여했으며, 주위의 많은 지인들과 더불어 촛불 집회 및 그것이 동력이 되어 성취한 대통령 탄핵이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디딤돌이 되리라고 믿었고 또 기대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한 번도 촛불 집회를 ‘촛불혁명’이라고 부른 바 없다. 내가 ‘촛불혁명’ 내지 ‘촛불시민혁명’라는 표현에 대해 유보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문재인 정부가 ‘촛불혁명’의 정치적 대표를 자임하면서, 이를테면 촛불혁명 = 5.18 광주항쟁 = 국민주권이라는 공식을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의 이데올로기적 기표로 활용해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와 그 주변의 지식인들은 국민주권이야말로 촛불집회를 ‘촛불시민혁명’으로 승화시키기에 적합한 키워드로 간주했을지 모르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촛불집회가 국민주권이라는 틀, 국민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묶여 있는 한 그것은 결코 혁명으로 전화될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내세운 국민주권이라는 키워드는, 우리나라 헌법에서 모든 권력의 원천으로 명시되어 있는 국민이 실제의 정치사에서는 복종과 규율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온 현실에 대한 대중의 비판적 자각, 더 이상 통치자의 명령에 수동적으로 복종하지 않겠다는 자각에 기대고 있다. 실제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시위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이래 집회 때마다 널리 불려온 “대한민국 헌법 제1조”라는 노래는 광범위한 대중이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수동적인 복종의 대상이 아닌 주권자로서의 국민, 통치자의 부당한 통치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주체로서의 국민으로 주체화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은 상상적인 것 내지 허구적인 것이다(이것은 가상이나 환상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적 원리로 정립된 것이며, 따라서 주권자로서의 국민으로 지칭되는 이들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실천 속에서 그 주권을 행사할 경우에만, 그 실천적 효과 속에서만 비로소 국민주권은 현실적인 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더욱이 국민은 동질적인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며, 계급들로 분할되고 젠더에 따라 구별되고 혈통과 지역, 학벌 및 다양한 연고에 따라 나뉜다. 예컨대 재벌 총수들 및 그 후계자들과, 그 기업들에 고용되어 여러 제품을 생산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같은 국민이기는 하되 동등한 국민이라고 할 수가 없다.


또한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같은 국민이기는 하되 동일한 국민이라고 할 수가 없으며, 비정규직 노동자는 “2등 국민”으로 간주되고 있다(김혜진, 󰡔비정규사회󰡕).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모욕과 함께 제도적ㆍ관행적으로 다양한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국민 역시 남성 국민과 동등한 국민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국민이기는 하되, 특정한 젠더라는 이유로 직업 선택의 자유나 결혼의 권리 등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성적 소수자들은 어떤 국민의 범주로 분류해야 할까? 따라서 1등 국민이 있다면 2등 국민도 존재하며, 아마도 3등 국민, 4등 국민 등도 존재할 것이다. 갑과 을 사이의 구조적ㆍ제도적ㆍ관행적 분할이 국민이라는 범주를 가로지르고 있다.


따라서 촛불혁명 = 광주항쟁 = 국민주권 같은 등식은, (광주항쟁을 국가 의례로 제도화하는 것은 논외로 한다면) 사실 ‘촛불시민혁명’이 국민이라는 말에 내포된 이러한 구조적 애매성을 묵과하거나 인정하는 혁명이라는 것, 다시 말해 을들에 대한 다중적인 차별과 배제를 기반으로 하는 혁명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국민주권이라는 개념에 내재한 이러한 애매성의 한계를 실제로 드러낸 것은 바로 문재인 정부 자신이었다.


을의 민주주의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와 그 이데올로그들처럼 ‘국민주권’이나 ‘촛불시민혁명’ 같은, 겉보기에는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을들에 대한 다중적 차별과 배제를 함축하는 용어들에 의거하기보다는 좀 더 명확하게 을의 민주주의, 을들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사고하고 실천해야 한다.


을의 민주주의는 세 가지 규범적 쟁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을의 민주주의는 근대 민주주의, 곧 자유 민주주의의 가장 일반적인 규범적 토대로서의 주권적 자율성의 원리 대신 관계적 자율성의 원리를 받아들인다. 주권적 자율성의 원리는, 방법론적으로 본다면 개체론과 연결되며, 규범적으로 본다면 불간섭으로서의 자유, 즉 타자에게 간섭 받지 않을 권리로서의 자유 개념을 중핵으로 한다. 반면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자율성이란 주권적 자율성 또는 원자론적 개인의 자율성이 아니라 관계적 자율성의 특징을 지닌다. 관계적 자율성 이론은, 각각의 개인들의 자기결정(스스로 자신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과 자기통치(타인의 간섭이나 지배 없이 자기 스스로 행위하고 존재할 수 있는 능력), 자기권위화(사회적 규범이나 관습에 구속되지 않고 자신을 독자적으로 평가하려는 태도)를 위해서도 각각의 개인들을 관계적 개인들로 이해하는 것이 본질적이다. 개인들, 특히 을들로서의 개인들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실존하며, 행위하고, 자신을 변형하기 때문이다.


둘째, 을의 민주주의는 퀜틴 스키너나 필립 페팃 같은 신공화주의가 주창하는 비지배로서의 자유의 원리를 수용한다. 이것은 불간섭으로서의 자유 원리와 달리 간섭 일체를 금지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 간섭으로서의 지배를 감소시키는 것을 추구한다. 다만 신공화주의의 엘리트주의적인 성격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통치의 주체로서의 인민 내지 국민을 단일한 존재자로 가정해서는 안 되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자크 랑시에르가 간파한 바와 같이 인민 내부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분할(갑과 을, 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남성과 여성 등)을 유념해야 한다.


셋째, 을의 민주주의는 “평등한 자유”(에티엔 발리바르)와 “익명적 독특성”(anonymous singularity) 원리를 추구한다. 평등한 자유의 원리는 개인들의 평등한 자유는 시민들로서의 집합적 실천에 의지하고 있으며, 역으로 시민들의 집합적 실천의 가능성은 모든 개인들이 실질적으로 평등한 자유를 누리느냐 여부에 따라 수축되거나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개인 및 모든 시민의 평등한 자유를 천명하는 평등한 자유 원리는 각각의 을들의 실천적인 권리 선언 및 쟁취 투쟁을 통해서만 실질적인 원리로서의 효력을 지닐 수 있으며, 이전까지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해방의 영역을 열어놓는다.


하지만 을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평등한 자유의 규범은 익명적 독특성의 규범으로 보충될 필요가 있다. 자크 데리다가 제안한 바 있는 익명적 독특성의 원리(그는 “비밀을 가질 권리”에 대해 말한다)는 정체성을 갖지 않을 권리 또는 페팃의 표현을 빌리면 주권자가 되지 않을 권리를 뜻한다. 익명적 독특성 원리의 핵심은, 정치 공동체에 주권자로서, 주체로서 평등하게 참여하는 것을 정치적 주체성의 최대 권리로 사고하는 것을 넘어서는 일이다. 모든 시민, 모든 독특한 개인에게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할뿐더러 그와 동시에 어떠한 정치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을을 을로서 만드는 구조적 원리 중 하나가 공동체에 대한 (배타적) 소속의 자명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익명적 독특성의 원리는 아마도 기존의 민주주의적 원리나 실천에 대하여 가장 급진적인 함의를 갖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해방, 진보, 평등과 자유가 누군가의 희생과 주변화, 침묵과 배제를 늘 전제하는 일,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구속을 전제한 해방, 반동을 조건으로 한 진보, 누군가의 불평등과 억압을 수반하는 평등과 자유가 되는 일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제 을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사고할 때가 되었다.


진태원(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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