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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 시대와 새로운 인문학 뉴리버럴아츠(New Liberal Art)로서의 인문학 / 김재인

1. 코로나19, 혹은 3중의 위기의 동시 발생

미래를 말하는 건 항상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와 있는 미래는 말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뉴노멀이 그런 미래다. 아주 많은 사람이 뉴노멀을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사고(事故) 정도로 여기고 있다. 빨리 옛날의 무난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 변화는 돌이킬 수 없으며, 세상은 다시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뉴노멀에 대한 저항이 의외로 거세다. 이른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뉴노멀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로 일관한다. 기존 질서의 붕괴를 감당하지 못하겠기에 그러는 것이리라. 그러나 뉴노멀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연이다. 그것은 부정한다고 사라질 허깨비가 아니다.



뉴노멀, 즉 이변과 이상이 새로운 정상으로 등극했다. 그래서 ‘뉴’노멀이다. 나는 󰡔뉴노멀의 철학󰡕에서 이 개념을 감염병 대유행, 기후위기, 인공지능의 오남용 등 ‘3중의 위기’가 초래한 새로운 세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다. 코로나19는 인공지능과 기후위기에 이은 ‘대격변의 마침표’일 뿐이며, 설사 인류가 코로나19를 극복한다 해도 대격변은 무효로 되지 않는다. 몇몇 논자들이 코로나19에만 집중한 나머지 3중의 위기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3중의 위기 아래에서는 자본조차도 변신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자본이 부품으로 삼았던 인류와 자원에 심각한 위기가 올진대, 자본 홀로 무사할 수는 없다.


호들갑이 심하다고 여겨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향후 10년 안에 급진적인 온실가스 감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기후변화의 마지노선을 넘어서 가뭄과 홍수, 태풍과 산불, 식량 위기와 물 부족, 생태계 붕괴 등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코로나19는 바로 이런 상황의 전조로서 찾아왔을 뿐, 기후위기라는 태풍의 핵은 아직 도달하지 않았고 충분히 확산하지 않았다.


나는 코로나19가 전해준 경고를 기회로 전환해 기후위기를 극복할 동인과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협력과 연대를 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인류는 멸종이다. 아니, 꼭 종이 사라져야 멸종인 것은 아니다. 다수가 죽고 난 후 살아남은 인간의 삶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한다면 그 역시 멸종이나 다름없다.


나는 뉴노멀 시대에 대응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공동주의(commonism)’를 주장한다. 공동주의란 인류가 공동으로 누려야 할 몫에 대한 권리 주장이다. 몇몇 사람이 코로나19에 감염된 채로 거리를 활보하게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 ‘저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건 ‘우리’가 건강하고 안전하기 위한 가장 빠른 해법이다. 모두가 얽히고 엮인 현대 사회에서 협력과 연대는 허울 좋은 수사가 아니라 필수고 필연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인간 공동 권리의 목록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다. 격차와 차별을 느껴 사회에 분노하고 나아가 복수하게 될 약자들을 미리 배려하는 것이 이제 공동체의 의무가 되었다.


2. 한국 인문학 탄생의 조건

갓 선진국에 진입한 한국은 각 부문마다 체급과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했다. 우리는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이른바 ‘선진국’들에도 많은 문제가 있음을 또렷이 목격하고 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게 한국이 아직 ‘선진국’이 아니라는 증거는 못 된다. 한국이 후지다면, 그동안 우리가 알던 선진국도 역시 후지다. 마스크 쓰지 않을 자유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저 선진국 시민들의 행동은 어찌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 선진국의 환상은 깨졌고 액면가가 그대로 드러났다.


코로나19 사태는 인식의 전환점을 마련해준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 내부에 많은 정치적 갈등과 논란이 혼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코로나19 사태가 ‘선례 없는’ 사건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그토록 떠받들어 왔던 선진국에서 코로나19 사태를 잘 처치한 선례가 있었고 매뉴얼이 있었다면, 선진국을 따라 배우면 되었다. 설사 그들이 제공한 매뉴얼이 잘 작동하지 않더라도, 그건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 책임이 아닐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그동안 선진국이었던 나라들이 한국을 지켜보며 매뉴얼을 요청하고 있다. 과거에 이런 적이 있었던가? 많은 한국 지식인이 당황하는 지점이 이곳이다. 한국은 어느새 책임져야 하는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앎의 영토에서 후진국일 때, 무엇을 배워야 할지에 대한 답은 비교적 단순했다. 선진국이 이미 알아낸 것을 빨리 배우면 되었다. 후진국에서 벗어났다는 건 알고 싶은 것을 남한테서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에서 앎은 발명이나 창조의 문제다. 이런 자각은 앎의 최첨단에 놓였을 때 생겨난다.


지금이야말로 뉴노멀의 사상이 요청된다. 사상이 탄생하는 곳이 선진국이다. 앎이 급증하고 신기술이 발전해서 사회가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규범과 제도를 발명해야 한다는 압력이 고조될 때면, 새 사상이 탄생해서 마감재 노릇을 한다. 새 사상이란 생성의 마감이 아니라 새롭게 조립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제안이다. 가장 먼저 실험하고, 가장 먼저 고민하고,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역사 이래 처음으로 가능해졌다.


3. 뉴리버럴아츠를 향해

이를 위해서는 문사철 인문학을 해체해야 한다. 인문학은 서양 근대의 제도를 수용하면서 개화기 조선이 만들어낸 발명품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 인문학을 문사철(文史哲), 즉 문학, 역사, 철학으로 구분한 것은 개화기 일본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런 짧은 역사를 가진 문사철 인문학에 미련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


불행히도 한국에서 인문학은 오랫동안 현실과 동떨어진 자리에서 작업해 왔고, 그리하여 현실에 개입하지도 못했으며, 현실의 문제를 명료하게 드러내거나 해법을 제안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인문학은 기껏해야 뒷방 늙은이 정도로 취급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인문학은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사회 속에서 당당하게 제 역할을 하고, 적합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인문학은 현실에 밀착함으로써, 구태를 벗고 새롭게 건설되어야 한다. 현실에 밀착한다는 건 과학기술과 정치·외교를 따라잡고 경제와 복리를 선도하며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뜬구름 잡는 공허한 목소리는 필요 없다. 생생하게 와 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는 인문학이 처한 궁색한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새로운 인문학을 구성하자고 제안한다. 인문학이 한 시대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면,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새로운 인문학이 가공되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필연이다.



인문학을 규정하는 관용어 중 하나는 ‘비판’ 또는 ‘비판적 사고’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잘 지적했듯이, 위기를 직시하며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성숙함과 용기와 자유로운 정신,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라는 표어에 비판의 핵심이 있다. 이렇게 보면, 로마에서 자유시민이 갖춰야 할 소양으로 여겨졌던 ‘아르테스 리베랄레스(artes liberales)’, 즉 리버럴아츠(Liberal Arts)야말로 새로운 시대 조건에서 전통적 인문학을 확장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아르테스 리베랄레스의 삼학(三學, trivium)을 이루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은 대체로 문사철 인문학에 대응하지만, 사과(四科, quadrivium)를 이루는 ‘산술, 지리, 음악, 천문학’은 좁은 의미의 인문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 넉넉하게 해석하자면, 사과는 ‘수학, 자연과학, 예술, 공학, 사회과학’을 망라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과거의 리버럴아츠 전통을 갱신해서 ‘뉴리버럴아츠(New Liberal Arts)’로서의 인문학을 제안하고 싶다. 고대 서양에서 ‘자유시민소양’은 공적인 삶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자유로운 인간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이론적·실용적 소양의 총합이었다. 이런 소양이 오늘날에도 필요한지 여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김재인(철학자,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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