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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비평: 기계의 생기와 임시변통의 제작술에 관한 시론 2 / 오영진

최종 수정일: 2022년 4월 12일

감응적 관계로서의 기술적 대상들

최초의 타자기는 타자를 치면 그 진행상황을 볼 수 없고 타이핑이 끝나고서야 결과물을 확인하는 디자인(Writing Ball)을 가지고 있었다. 타자기의 목적이 맹인의 쓰기를 보완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실시간으로 확인한다는 감각이 구현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맹인에게 편리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기술적 측면만 간신히 구현했을 뿐이다. 하지만 차츰 찍어내는 알파벳을 직관적으로 확인하는 방식으로, 자판배열의 논리성이 강화되는 방식으로 디자인이 진화하게 된다. 동시에 전례없는 타이핑 속도로 인해 인간의 하이퍼그라피아의 광기는 확대된다. 이처럼 기술적 대상은 사용자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 끝없이 상호진화한다. 외부적인 기술과 정보처리를 수행하는 인간의 인지과정이 만나 공모를 꾀해 신체 내부에 기술적 상관체로 자리잡는다. 기계가 신체생산장치 (apparatus of bodily production)가 된다는 것은 지난하고 섬세한 피드백이 오고가는 감응적 관계를 토대로만 가능하다.


나아가 하나의 가정을 세워보자. 여기 의자 하나가 있다. 이 의자는 기왕 버려진 나무토막들로 만들어졌으며, 순전히 한 사람의 힘으로 제작되었다. 팔려고 만들지 않았기에 가격을 따로 책정하지 않았으며 다만 어느 날 어디서 무슨 심정으로 만들었는지 그 사연은 존재한다. 당신은 사연과 함께 이 의자를 선물 받는다. 실은 만든 이도 비슷한 의자를 사용하고 있다. 의자들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데, 이유는 옹이의 위치가 제각각이어서 그 때 그 때 디자인을 변경했다. 비록 첨단은 아니지만 이러한 기술적 대상 앞에서 우리는 감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의자를 만든 이의 감정과 감각이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또한 만든 이 뿐 아니라 재료(자연) 스스로의 의지도 느낀다. 나무는 만든 이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소재가 아니라 대화하면서 달래야 하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타자기의 경우처럼 기계와 인간의 감응 뿐 아니라 실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응적 관계도 기술적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수행될 수 있다. 이를 두고 시몽동은 “인간은 연장들의 운반자”라고도 말했다. 나아가 “숙달된 솜씨를 지닌 인간은 세계가 받아들이는 자이며, 주인을 알아 본 동물의 충직한 온순함으로 물질이 복종하고 사랑하는 자이다. 숙달된 솜씨는 역량의 형태들 중 하나이고, 이 역량은 힘들의 교환을 가능하게 만드는 주술......추상화된 주술의 것보다 더 자연적이고 더 원초적인 참여의 양식이다.”6)라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반면 목적지향적 대량생산체제와 상품교환논리의 산물로서 기술적 대상은 제작자나 사용자 모두를 그들 앙상블의 가능성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캐빈 캘리가 주창한 ‘테크늄’이라는 개념은 단순번역하자면 ‘기술계’이다.7) 이것은 인간의 제작술의 역사를 다루는 개념이 아니다. 반대로 기술계 그 자체의 힘을 포착하려는 시도다. 베시포드 딘의 『헬멧의 역사』를 살펴보자. 헬멧의 진화양상은 마치 다윈이 작성한 핀치 새의 부리변화와 비슷해 보인다. 이 공통점을 너무 신비화시킬 필요는 없다. 다만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진화의 국면에 있어 각 분기의 변화에 개입한 엔지니어는 이 거대한 진화의 흐름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다.

헬멧의 진화는 손기술의 발전(엔지니어), 새로운 재료의 발견(자연), 전쟁의 발발(정치), 미적인 취향의 변화(사회) 등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그 총체적 상황에서 볼 때는 한 시대 인간들의 의도를 넘어서는 결과물이다. 인간은 기술적 대상들 사이의 연결자이며, 그 안에 흡수되는 존재다.

그림 베시포든 딘의 중세헬멧의 계보도

이 점에서 개인의 발명과 수리의 능력은 기계-인간 앙상블 안의 조절능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발명과 수리는 우선 너저분한 놀이이며, 이것 저것을 결합하는 연결행위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발명의 기본은 팅커링이라고 한다. 팅커링은 중세유럽의 허름한 수리공들이 농기구들을 임시방편으로서 땜질해주는 행위에서 그 기원을 둔다. 쓸모가 없어도 어설프게 개선해보려는 노력을 통해 의외의 성과를 얻게 된다. 물론 수많은 실패를 맛보지만 이 실패는 정확하게는 현재는 쓸모없게, 다만 다르게 성공한 것들이다. 디스토션 사운드 이펙터 Rat은 스콧 버넘이 회로 기판에 엉뚱한 저항기를 단 덕에 발견한 발명품이다. 발명이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해선 교환가치를 우선은 제쳐두고, 기술적 대상들 사이의 연결이 만들어내는 잠재성을 하나의 놀이로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창의성은 원시적 상황이나 로우테크의 차원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애초 임시변통한 방식의 기계로서 제작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화성탐사기계 큐리오시티의 설계는 애초 임시변통이 가능한 디자인이어야 예상하기 힘든 자연환경인 화성에서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기에 되도록 그런 방향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8)


손으로 만지작거리기를 꾀하는 팅커링이 우리에게 언어, 정확하게는 표현적 능력을 강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데이빗 E. 암스트롱은 『몸짓과 언어본성』(Gesture and the Nature of Language, 2001)에서 언어의 뼈대를 이루는 범주들 자체가 의도적인 손동작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동사는 손동작에서 나온 말이고, 명사는 이름을 붙여서 사물을 ‘잡는’ 말이며, 부사와 형용사는 손이 사용하는 도구들처럼 동작과 대상에 변화를 주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만들기는 문장을 구성하는 일의 또 다른 일이며, 목소리 그 자체이다. 기계에 대한 체험이 일방향적으로 자연화된 이데올로기의 언어와 자립할 수 있는 최초의 자기표현의 언어가 여기서 대립한다. 다음은 ifixit.com의 『자기수리 선언문』의 일부이다.

“수리할 수 없다면, 소유한 것이 아니다.
수리는 사람과 기계를 연결하고 소비를 초월하는 연결을 형성한다. 자가 수리는 지속가능하다.
수리는 우리와 물건들을 연결한다.
수리는 개인을 강화한다.“

기계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기계의 욕망 그리고 기계비평

근대의 기계주의는 다만 인간의 기계화를 낳는 기계주의로서 실은 기계 그 자체의 진화도 가로막고 있다. 이제 높아진 기계의 생산력을 누가 독점하는가라는 질문보다는 기계-인간의 앙상블의 생기를 누가 제어하는가라는 관점으로 이동한다면 어떨까? 기술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억압에 대해 2013년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스르니체크는 「가속주의적 정치를 위한 선언」에서 “우리의 기술 발달은 자본주의에 의해 해방되었으나 꼭 그만큼 억제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가 넘어서지 못하게 막아 놓은 능력에 대한 믿음, 그 능력을 발휘해 해방될 수 있고 해방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믿음”9)을 갖자고 말했다. as를 볼모로 봉인된 제품들, 수명이 계획적으로 제한된 물건들은 자본의 속도에 복무할 뿐 기계의 진정한 기술성을 드러낼 기회를 우리들로부터 박탈한다. 기계들은 해킹되어 더 난잡한 것들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기계에 대한 욕망은 거의, 항상, 언제나 도착(倒錯)된다. 기계가 되고자 하는 인간 즉 “사이보기즘의 딜레마”10)다. 기계에 대한 매혹은 힘에 대한 욕망과 병행되어 실패하기 쉽다. 기계와의 감응적 관계를 기계에 대한 욕망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근대 기계주의는 인간을 가계의 일부로서 대상화시킨다. 대표적인 인물이 미래파의 마리네티이다. 기계를 욕망하다가 기계의 일부분이 되고자 기꺼이 투항한 그들은 포스트휴먼이 아니며, 모델로 삼아서도 안 된다.

18-20세기의 기계주의는 기계의 생산력에 숭고함을 느끼고 동시에 인간을 생기 없는 기계로 만드는 기획이었다. 이제 인간을 벗어난 새로운 기계주의를 말할 수 있을까? 근대의 기계주의가 기계를 대상으로 삼고 종국에 인간 자신을 대상화하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반대로 기계를 해방시키는 일이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서 기계에서 제 스스로 변형하고 증식하는 기계로 상상의 방향을 바꿀 때 인간은 이 안에서 더 적극적인 연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교과목 <기계비평>을 통해 2015년 1학기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기계, 하나의 논평’이라는 테마로 기계와 그의 시대를 엮어왔다. 특히 2016년 2학기에는 <시민기술 시대>, 2017년 1학기에는 <테크노페미니즘>, 2학기에는 <소프트웨어 비평>, 2018년 1학기에는 <가상현실 시대의 철학 예술, 몸>, 2학기에는 <전지구적인 환경위기와 사이언스월든의 상상력> 등으로 각 학기마다 당대문제를 고민할 수 있는 새로운 화두를 붙잡고 학생대중과 함께 기계에 대한 비평을 강의를 겸해 실험해 왔다. 강의는 철학자, 문화연구자, 기술사연구자, 예술가, 행정가, 운동가 등의 다양한 성분을 가진 연사들이 각자의 입장을 실험적으로 발언하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각 연사들의 내용은 자신의 기반학문에서 발언된 것이며 이 발언들 사이의 점을 연결해 성좌를 그리는 일은 온전히 학생들과 교수자 퍼실리테이터의 몫이었다. <시민기술시대>는 당시의 촛불시위 정국과 맞물려, 시민 스스로 기술의 이해를 도모하고, 정책에 개입하고, 새로운 사회적 배치를 상상하는 일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테크노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의 열망과 필요성을 과학기술문화의 지형도 안에 어떻게 논의할 수 있는 지 질문하는 장이 되었다. <소프트웨어 비평>은 소위 4차 산업혁명시대라 과잉수사된 작금의 현실에서 컴퓨터 언어를 배우고,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삼는 일의 진짜 아름다움과 쓸모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가상현실 시대의 철학, 예술, 몸>은 VR과 컴퓨터게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대변되는 초연결 시대의 가상성 위에 우리들의 정신과 신체를 반성해 보는 작업이었다. <전지구적인 환경위기와 사이언스월든의 상상력>은 점차 제어되지 않는 온난화 문제를 인류세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미세먼지, 플라스틱 대란, 물부족 등의 환경위기를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이 아니라 공진화의 관점에서 해결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 특집을 통해서 ‘기계비평’은 기계들에 대한 단지 인문학적인 해석이 아니라 우리들의 기계들의 시스템에 대한 반성과 그 너머 자연이라는 기계 시스템의 관점까지 확보하게 할 수 있었다.


'기계비평'같은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기술의 재배치를 통해 이 세계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꿈꿔본다. 하지만 이 상상력은 노력해야 가까스로 쟁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분명히 존재하는 잠재성으로 제시될 수 있다. 교과목 ‘기계비평’은 기술과 인간을 결합하여 기존의 분과학문의 체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지식을 발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잠재성을 억압하고 특정한 방향으로만 욕망과 자본의 흐름을 유도하는 현 사회를 의심하는 법을 가르쳐 왔다고 생각한다. 기계와 기계들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힘은 ‘지식’이 아니라 이러한 ‘능력’에서 나온다.

이 같은 문제의식을 통해 ‘세계’란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만물’을 뜻한다는 점을 재환기 할 수 있다. 하나의 기계는 단순한 발명품이 아니며, 그것이 배치되어 있는 사회적 맥락과 기술적 토대, 그로 인한 의미의 발생, 수용자에 의한 변용, 다시 새로운 발명 혹은 배치로 이어지는 연속성 속에 있다. 기계비평은 기존에 쳐 놓은 경계선이 실은 별 근거없음을 선언하면서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종류의 비평이어야만 한다.



6)질베르 시몽동, 앞의 책. 135p.

7)캐빈 켈리, 『기술의 충격』, 민음사, 2011. 참조.

8)임시변통의 손기술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서는 찰스 젠크스 , 네이선 실버, 『애드호키즘』, 현실문화, 2016. 참조.

9)Alex Williams · Nick Srnicek, 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 #Accelerate: The 10)Accelerate reader, Urbanomic, 2014, p.361. ; 임태훈, 「가속주의에 응답한다」, 맑스코뮤날레 11)2015 발제문으로 소개된 임태훈의 번역문을 인용.

12)이광석, [신체-기계간 잡종의 밑그림, 사이보골로지], 웹디자인, 2001.2



*이 글은 계간 <현대비평>3호에 실린 필자의 글 기계비평론의 일부를 편집 수정한 원고입니다.


오영진(교과목 <기계비평>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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