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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으로 수다 떨기: 이달의 과학책들 / 박성관

최종 수정일: 2023년 10월 18일

지난달 리뷰 원고를 보낸 직후 날아갈 듯 가벼운 맘으로 책들을 주문했다. 2, 3일 뒤 현물을 배송받고 보니 ‘아~ 이번 달에도 읽고픈 과학책들, 리뷰하고픈 과학책들은 쉴 새 없이 나오는구나’, 탄성이기도 하고 탄식이기도 한 소리가 절로 나왔다.

1. 우선 신현철 [[다윈의 식물들]]. 약 3년 반 전, 저자는 단순한 [[종의 기원]] 번역본이 아니라 오랜 세월 수집해온 자료에 창의적인 해석까지 가미된 번역본 [[종의 기원 톺아보기]]를 자랑스레 선보였다. 그랬던 그가 이번엔 좀 더 주제를 집중하여 [[다윈의 식물들]]을 냈다. 그의 전공 분야가 식물학인 만큼 더 기대가 크다. 이번에 이어 앞으로도 그의 다윈 직접 연구가 계속 성과물로 나올 모양이다. 계속 사고 꾸준히 읽을 수밖에. 그의 책은 특히, 다윈이 연구한 외국의 생물들을 언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게 우리나라나 더 넓게는 아시아의 어떤 생물들과 같은지, 혹은 관련이 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나 같은 생알못에겐 거의 선물 수준이다.

2. [[그 많은 개념어는 누가 만들었을까]]와 [[번역된 근대]]도 샀지만, 요건 과학책이 아니니 일단 패스! 그래도 한마디는 하고 넘어가자. 이 두 권의 책을 잠시 열고 읽어보니, 읽고픈 책들이 감당키 힘들 정도로 출간되는 건 과학 분야만이 아니라 거의 전 분야가 다 그런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일기 시작한 이러한 변화는 어떤 원인의 귀결일까,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어떤 의미인 갖는 걸까?


3.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김재영의 [[상대성 이론의 결정적 순간들]]. 김재영은 [[사이버네틱스]]의 번역자기도 해서 한 달 만에 두 권을 연이어 출간한 셈이다. 물론 실제 작업 기간은 달랐을 터이고 출간 시점만 거의 일치한 거겠지만, 암튼 대단하다(실제로 그는 내 얼굴책의 관련 포스팅에 댓글을 달아 [[사이버네틱스]] 번역은 2009년에 시작되어 무려 14년 만에 나오게 되었다며 부끄러워했다. 겸손하기도 하셔라 ~ ). 놀라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사이버네틱스]]를 탐독하다가 잠시 뒷날개를 보니, 이 책을 낸 출판사 읻다의 <연관> 시리즈 세 권의 근간 예고가 있었다. 드디어 과학사의 거장 알렉상드르 코이레의 [[닫힌 세계에서 열린 우주로]]도 나온다 하고,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사회]]와 막스 야머의 [[양자역학의 철학]]까지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쿠구궁 !!! 첫 번째 놀라움은 [[사이버네틱스]]를 포함하여 이 엄청난 책들이 읻다라는 한 출판사에서 나왔거나 곧 나올 것이라는 사실, 두 번째 놀라움은 그중 세 권이 김재영의 번역이라는 사실이다(그중 한 권은 공역인데, 몇 년 전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엥카레의 지도]]를 출간했을 때와 같은 공역자다). 가히 출판사 읻다와 과학사 및 과학철학자 김재영의 위엄이 아닌가!

4. [[사이버네틱스]]에 대해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나는 인류가 지난 2000년 동안 얻은 지식의 열매 중 사이버네틱스가 가장 큰 열매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라고 책 뒤표지에 적혀 있다. 한데 이 베이트슨은 어떤 책의 맨 앞부분에서 ‘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노버트 위너가 틀렸다는 점을 밝히려는 것이다.’라는 말을 써놓기도 했다. 후자의 말을 정확히 인용하려고 내 기억을 따라 [[정신과 자연]]에서 이 구절을 찾아 헤맸다. 그치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보았던 나의 기억은 분명하다. 그가 틀렸다고 한 게 노버트 위너인지, [[사이버네틱스]]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말이다. 혹시 이 말의 출전을 아는 분 계시면 알려주시라. 아무튼 무려 그레고리 베이트슨에게 세상에나 “지난 2000년 동안 .... 가장 큰 열매”라는 찬사를 들을 만한 책이란 대체 어떤 책이겠는가! 문제는 이 책이 심히 어렵다는 거다. 수학이 많이 나오는 3장은 죽음이고 4장도 만만치 않다. 총 10장 중 나머지 여덟 개의 장도 수월하지만은 않다. 10월 3일, 역자가 서울의 마포중앙도서관에서 강의를 한다길래 일단 신청했다. 관심 있는 분은 함께 하시자!

5. 나는 베이트슨이 어떤 이유로 [[사이버네틱스]]를 그토록 고평했는지 아직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그보다 위너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위너는 이 책에서 지난 5000년간, 더 넓게 잡으면 과거 5만 년 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온 인류 문명 전체가 거대한 전환점을 넘어가고 있는 중이라 진단했고, 나는 그에게 동의한다. 문제는 이케나 중요한 이 책을 펴든 대부분의 독자들이 처음부터 2장까지 시름시름 앓다가 3장에 이르러서는 끝내 실신할 거 같다는 점이다. 행여 기운이 남은 독자들이라면 책을 힘차게 던져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이 우리 사회에서 많이 읽히고 토론되고 그리하여 3차(또는 4차) 사이버네틱스가 창안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반응으로 보건대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 같다. 그런 불길한 예감을 좀 비틀어 보려는 차원에서 사이버네틱스와 그 뒤를 이은 오토포이에시스를 주제로 강의를 준비 중이다. 내가 설정한 목표 지점까지 도달해 실제로 강의가 열리기를 희망한다. 희망, 생각해 보니 오랜만에 이 단어를 떠올렸다. 참 좋다!

6. 내가 강의 준비를 위해 읽었던 책과 읽을 예정인 책들은 이렇다. [[인간의 인간적 활용]], [[사이버네틱스]], [[인식의 나무]], [[Autopoiesis and Cognition(자기 조직화와 인지)]], [[수학적 커뮤니케이션 이론]],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 [[마음은 어떻게 기계가 되었나]], [[진리는 거짓말쟁이의 발명품이다]], [[현대사상]] 2001년 1월호 특집 [오토포이에시스의 원류], [[사상]] 2010년 7월호 [네오 사이버네틱스와 21세기의 지식]. 별 대단한 목록은 아니지만 이 분야에 관심과 열의가 있는 사람들이 정보와 비전을 공유하며 함께 힘내보자는 의미에서 적어보았다. 이 문제에 마악 관심이 생긴 분들에게도 참고가 되면 더 좋고.


7. 김재영의 (아마도) 첫 단독 저서 얘기도 해보자. 하루는 치과 치료를 받고 (치과에서 나온 내가 거의 늘 그렇듯이) 의기소침한 심신으로 삼계탕집에 갔다. 하루 이틀은 딱딱한 걸 씹지 말라고 해서 적당히 골라본 집이다. 탕이 나오기 전까지 [[상대성 이론의 결정적 순간들]]을 읽었다. 음식이 나온 뒤에도 읽었다. 천천히 먹으며 계속 읽었다. 놀랍고도 즐거웠다. 왜 놀랍고 즐거웠냐면 ......

나는 2017년에 [[아인슈타인과 광속 미스터리]](창비)를 출간했는데, 당연하게도 이를 위해 아인슈타인과 상대성 이론에 관한 대중 과학서들을 여럿 읽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는 읽는 책들의 내용이 거의 서로 비슷해졌다. 일화도 비슷하고 설명 방식도 뭐 그랬다. 지금까지도 크게 다른 책은 안 나온 거 같다. 한데 김재영의 이번 신서는 달랐다. 그가 책의 맨 처음에 제시한 자기 원칙 셋째와 다섯째, 여섯째가 제대로 관철된 것이다.

8. “셋째, 기존에 꽤 알려진 이야기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널리 알려진 일화는 간략하게 소개하고 흔히 오해되는 부분과 덜 알려진 이야기를 강조한다. ...... 다섯째, ‘결정적 장면들’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으나 과학사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들을 발굴하여 소개한다. 마지막으로, 꼭 필요하지 않은 주변 이야기나 과학 이론 설명은 최소로 하되, 과학이라는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당시의 문화적 정치적 배경이나 상황을 적절하게 소개하고 연관성을 드러낸다.”(p.8-9).

9. 이런 [[상대성이론의 결정적 장면들]]이었지만 2장을 반쯤 읽다가 일단 중단하기로 했다. 흥미진진했지만 그냥 설렁설렁 넘길 수 없는 대목들이 있었고 종종 일정한 집중력을 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좀 더 각을 잡고 마저 읽은 다음, 별도의 리뷰로 다뤄야 할 것 같았다. 민태기의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으로 날렵하게 갈아탔다.

10. 민태기는 첫 저서 [[판타 레이]]를 통해 과학사와 기술사를 매끄럽게 엮어냈으며 거기에 온갖 사회문화사들, 특히 음악사를 적재적소에 버무리는 신공을 과시하였다. 차기작을 잔뜩 기대하던 독자들에게 이번에 안겨준 선물은 우리의 근대 과학사다. 그냥 과학사의 뒷얘기 같은 게 아니라, 우리 역사에 대한 저자의 주인의식이 역력하게 표현된 어엿한 역사책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 역사 연구에서 가장 결핍 상태였던 과학기술사 분야에 대해 처음으로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책은 그동안 잊힌 역사 사실들을 쉴 새 없이 쏟아붓지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현실과 계속 연관시켜 말해준다는 큰 장점이 있다. ‘아~ 그게 그래서 지금 이렇게 된 거구나’ 끄덕거리게 하는 힘이 있는 책!

11. 저자는 우리의 역사를, 특히 과학기술사를 있는 그대로 보자고 여러 번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 그가 주목한 계층은 한국 근대사의 중상류층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현재 한국의 기반을 만든 해외 유학파들이 주로 조명 대상이다. 식민지 조선에 과학기술로 기여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거나 그들의 세력권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을 테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상류층이 수행한 역할 중 그보다 훨씬 부정적인 측면들은 덜 그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이 책은 우리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책’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잘 밝혀지지 않았던 긍정적인 측면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는 책’으로 읽혔다. 그리고 이 점만으로도 훌륭한 책이라 느끼며 잘 읽었다.

12.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국사 교과서 이외에는 국사를 읽어보지 못했다. 대학 때는 진보 혹은 좌파에서 쓴 민족해방운동사나 근현대사 등을 접했다. 그 이후 역사에는 큰 관심을 갖지 못했는데, 우리 역사의 서술이 너무 정치 사회 쪽에 편중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인 거 같다. 가령 오래전에 읽었던 [[아르마다]](개릿 매팅리 지음, 너머북스, 원서는 1959년 출간) 같은 책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패하는 사건에 집중하는 책인데도 무척 다양한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어 놀랐다. 반면 우리 역사서들은 그에 비해 왜 이리도 기술이 빈약한 걸까 의아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독립운동사와 과학사 쪽은 종종 아쉬웠다.

13. 그러다 2004년 12월부터 2005년 8월까지 총 10회 방영된 EBS의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는 충격이었다. 도올 김용옥은 다양하게 벌어졌던 독립운동을 좌에서 우까지 성심껏 망라했다. 시각에 균형이 잡혀 있었고 역사의식이나 일관성 있는 기술이라는 면에서도 훌륭했다. 그 프로그램의 제3부 <두만강을 넘어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21세기에 살고 있다. 21세기는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정보혁명의 시대다. 정보혁명은 제국주의적 침략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더 이상 거짓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그렇다. 지금은 정보혁명의 시대인 21세기다. 그럼에도 21세기의 보통 한국인들에겐 우리의 근대과학사를 알 길이 별로 없었다. 그 길을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이 열어준 것이다. 이 책을 계기로 우리에게 좋은 역사책들이 풍성하게 출간되기를 바란다. 일단은 작년에 사두고 아직 한 페이지도 못 열어본 [[시민의 한국사]] 1, 2권부터라도 좀 읽어봐야겠다. 나의 반성을 촉구한다.


박성관(독립연구자, <분해의 철학>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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