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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으로 수다 떨기: [브뤼노 라투르와 존재론적 전회」 [[판도라의 희망]]과 [[존재 양식의 탐구]] - / 박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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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이하 ‘존양탐’) 번역 출간 기념 북토크 행사가 뜨겁다. 매회 100여 명이 넘는 온오프라인 참여자들이 대거 참여하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은 30명 한정이고 줌접속까지 더하면 130명 정도. 1회차 때에는 ‘존양탐’와 신유물론의 관계(문규민샘 출연), 2회차 때에는 ‘존양탐’와 비판 이론(배세진샘 출연)이 대화의 주제였다. 마지막 4회차 때에는 ‘존양탐’와 과학기술학에 대해 세 분이 출연하시는데, 그 전인 3회에 내가 출연했다. ‘존양탐’와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2024년 1월 23일). 이번 3회도 역시 다른 회차 때처럼 130여 명이 신청하였으나 올 겨울 최고의 한파인 북극 추위를 맞아 참여 인원이 적잖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한 80명 정도가 참여하였다. 참가비 1만 원의 유료 행사고, 비록 라투르의 지명도가 있다고는 하나 ‘존양탐’라는 대단히 철학스럽고 형이상학스러운 주제에다가(책 표지엔 ‘근대인의 인류학’이라 자랑스레 적혀 있다) 나름 두께가 있는 책인데도(약 750쪽) 이토록 뜨거운 열기라니, 가히 연구 대상 아닌가! 앞으로 유사한 행사를 치를 출판 관계자분들께서 연구들 해보시고 좋은 아이디어 건지시면 공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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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출연자 두 분이 관련 주제에 관해 촘촘하면서도 시원시원하게 썰을 좌-------ㄱ 풀어주셨는데, 그걸 보고 나도 그렇게 좌-------ㄱ 해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라투르를 평소 애독해온 독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건 언감생심이었다. 그저 이 기회에 그의 주요 저서들을 한 번씩은 좌--------ㄱ 읽고 내 좋아하는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에 관련해서 소박허니 이야기나 좀 해봐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저 이 기회에 그의 주요 저서들을 한 번씩은’이란 얼마나 용감무쌍한 포부였던가! 한 달 전쯤 ‘존양탐’을 100쪽 정도까지 읽어놓은 건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흠, 다른 이전 저서들을 좀 읽어보고 재개해볼까’ 했던 선택까지도 뭐 괜찮았다. 한데 겨울철 미세먼지에 심히 취약한 내게 2주간의 연속된 ‘매우 나쁨’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행사 5일 전까지 비몽사몽하다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한 권만이라도 기필코’ 하는 심정으로 [[판도라의 희망]]을 잡았는데, 그래도 이게 대박까진 아니어도 나름 중박이었다. 나의 평소 최애 관심사인 과학사 및 과학철학 분야의 책으로 특히 구체적인 사례들을 다루고 있어 흥미진진했다. 많은 부분 공감되었고, 간간이 튀어나오는 이견들은 독서를 더 팽팽하게 만들어 주었다. 아~ 죽으란 법은 없구나. 며칠 동안 대략 이런 과정을 거쳐,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행사장인 캐츠랩 연구소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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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번 북토크의 진짜 주인공은 ‘존양탐’을 오랜 세월에 거쳐 훌륭하게 번역해 주신 황장진샘, 그리고 이런 황샘과 함께 역시나 오랫동안 원고를 가다듬고 강의와 북토크 등 여러 행사들은 줄기차게 준비해오신 사월의책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또 한 명의 라투르 전문가인 박동수샘이다. 그는 진행자이자 인터뷰어를 자임했지만, 출연자들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을 매번 요령있게 정리하여 전체적인 맥락 속에 잘 격납하고서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나처럼 평소에도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또 어디론지 알 길 없는 곳으로 한없이 벗어나는 돌연변이도 그는 투우사처럼 여유 있게 지휘하였다. 고래가 바닷속의 크고작은 일렁임들을 큰 스케일로 그윽하게 조절하듯이. 내 답변이 미진한 부분, 특히 라투르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의 상세한 설명이 쾌속으로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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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해도 심했다. 아무리 진행자가 이야길 잘 받아주고 또 라투르 관련 질문은 거의 도맡아서 대답해주었다 해도 나의 장광설은 너무 심했다. [[숲은 생각한다]]에 대해 가볍게 소개하면서 나의 독서 체험도 덧붙여달라는 질문에 왜 아득히 오래전에 읽었던 푸코의 [[말과 사물]] 이야길 한참이나 늘어놓아야 했던가! 그럴만한 사연이 있기사 있었다. 약 25년 전, 나는 푸코의 이 책을 처음 세미나 하며 읽었고(거의 검은 것은 글자요 흰 것은 종이다는 정도의 읽음이었다), 약 10년전쯤 불어본, 영역본, 일역본, 국역본을 쌓아두고 약 6개월에 걸쳐 세미나 했다(2회차). 얼마나 두더지처럼 깊이 파고들었는지(가만있자, 두더지가 흙속을 파고들긴 하겠지만, 깊이 파고드는 놈이었던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나무도 어쩌다 두어 그루 보고 대부분은 풀과 어린 나무들에만 정신이 팔린 독서였다. 그래서 반년 간의 셈나가 끝나고 몇몇 함께 광분해줄 수 있는, 나와 비슷하게 이상한 사람들을 꼬셔서 곧장 ‘[[말과 사물]] 원 모어 타임’ 셈나를 열었다. 우리는 다 함께 외치며 시작했다. “우리 한번 미쳐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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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생각한다]]에 대한 독서담을 얘기해달라는 주문에 이런 얘기들까지 다 늘어놨던 것이다. 중간중간 청중석을 향해, 정말 골 때리지 않느냐는 암묵적인 동감을 요청하기까지 했던 거 같다. 물론 내가 이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행동을 시전한 것에 아예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때까지 [[말과 사물]]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철학책이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푸코가 사회학자나 역사학자보다 압도적으로 철학자로 불리는 데에는 깊은 이유가 있다), 그래도 주된 논지가 ‘노동’, ‘생명’, ‘언어’라는 세 요소를 한 몸에 구현한 삼위일체로서 ‘인간’이 근대에 처음 출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 점에서 다분히 사회과학적인 함의와 함께 유통되는 철학책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데 내가 파고 또 파보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말과 사물]]의 세계는 깊고도 울창했다. 산맥과도 같이 거대한 고딕 성당이랄까, 한번 들어간 이후로 점점 더 깊어지기만 하는, 점점 더 넓고 어두워지는 그런 이상한 시공장(時空場) 같았다. 더 강한 압박을 받은 것은 중후반으로 갈수록 ‘존재’라는 단어, 즉 하이데거는 Sind라 했고 영어로는 being이라고 번역하는 단어, 프랑스어로는 étre라고 하는 이 단어를 변화무쌍하게 구사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 깊이에서 인식론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의미에서 존재론 텍스트이기도 했던 것이다. 점점 더 빠져들며 몰입하긴 했지만 다 읽은 다음에는 뭐라 정리할 수 없는 상태로 나와 [[말과 사물]] 간의 세 번째 만남이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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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입구역에서 연트럴파크를 산책하던 길에 만난 어느 출판사 대표는 나의 이런 얘길 듣고, 그거 여러 권으로 함 출판해보자, 고 제안했고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유는? 그거 하고 나면, 아니 어쩌면 쓰는 도중에 죽을 거 같다, 는 것이었다. ‘책 쓰다가 죽은 정약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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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내가 어렴풋이 꼬리를 잡았던 주제에 대해 훗날 보니, 발리바르가 <푸코의 이단점(heresy)>인가 하는 글에서 좌------ㄱ 설을 푸는 걸 보았다. 아니, 꼭 그런지는 확실치 않고 대략 그런 글인 듯 보였다. 그 글이 실려있는 책을 배세진샘이 번역하신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지금 검색해보니 아직 출간은 안 되었나 보다. 그 책이나 나오면 ‘순수’ 독자의 입장에서 즐겁게 함 읽어보고 땡! 쳐야지, 내가 무슨 푸코를 그렇게까지 심오하게 파고들 것까지야.... 지금 와 생각해봐도 내가 한 몇 가지 잘한 결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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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수 편집장님은 내가 [[중동태의 세계]]를 번역했다는 점을 살려, 라투르의 중동태 논의와 비교해달라는 질문도 주셨다. 하지만 내게 그런 비교를 제대로 할 만한 역량이 있을리 없다. 본격적인 답변은 박 편집장님께 미루고 나는 고쿠분 고이치로의 이 책 [[중동태의 세계]]에 대한 뒤늦은, 제대로 된 소개에 열을 올렸다. 내가 진즉에 파악했더라면 ‘역자 후기’에 담았을 그런 내용들을.

실은 고쿠분의 저서 이전에 일본에는 중동태에 대한 논의가 나름 존재하고 있었다. 정신의학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갖고 있던 기무라 빈부터가 그 논의를 여러 번 했었고 [[예술과 중동태]]라는 책도 고쿠분의 책보다 3년 전인 2013에 출간된 상태였다. 고쿠분의 책이 출간되고 40만 부가 팔려나갔고 각계 각층에서 서평이 쏟아져나왔으며 그 1년 뒤에는 오다기리 겐타로의 [[중동태, 지평, 화덕 – 하이데거의 존재 사색을 둘러싼 정신사적 현상학]]이라는 장중한 분위기의 책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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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그런 [[중동태의 세계]]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 저자의 논지에 대해 반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는 그의 회의 어린 견해에 대해서 말이다. 책 마지막에 멜빌의 [[빌리 버드]]에 관한 (특히 한나 아렌트와 얽힌) 논의가 놓인 것도 그런 회의와 관련이 있을 터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회의를 깊이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인간 대부분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나 그보다 살짝 높은 정도의 책임감이 주어졌을 때, 아니면 그런 책임을 자임했을 때 기본적인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평소에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중동태의 세계]]의 논지에는 나름 비판적인 마음을 계속 품고 있었다. 그랬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의 후속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임의 생성 – 중동태와 당사자 연구]]가 2020년, 구마가야 신이치로와의 공저로 출간되었다. 역시, 고쿠분은 훌륭한 학자였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에게 책임을 지우는 사회역사 체제를 일방적으로 비난만 하지 않았다. 그동안 책임이란 가장 저열한 수준에서 한 개인에게 죄를 옴팡 뒤집어씌우는 그런 저열한 개념에 불과한 적이 많았다. 고쿠분은, 이제야말로 고상한 의미에서의 책임을 상호 관계 속에서 생성시키는 새로운 책임론과 실천이 등장해야 한다고 새로운 책에서 주장했다. 나도 크게 공감했다. 이 책이 얼른 번역되어 한국의 많은 독자들도 나의 이 흐뭇한 마음을 공유할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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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토크 말미에는 더 가관이었다. 요즘 나를 열광시키고 있는 주제인 사이버네틱스 얘길 기어이 하고 만 것이다. 라투르 관련 북토크에서 그런 주제까지 뻗쳐가야 했던가? 지금 와선 후회의 마음도 한편에 든다. 적어도 그날 꽤나 흥분했던 심신 상태의 결과인 건 분명하다. 미리 준비해 가 당일 행사장에서 읽었던 <인간의 인간적 활용> 4장의 첫 단락은 이렇다.

     

“물론 통신[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언어에 대해 논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언어란 통신[메시지]을 매개하는 부호체계를 기술하는 말일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통신이라는 것 자체의 다른 이름이다. 이 장에서 나중에 보겠지만, 메시지의 코드화(부호화)와 탈코드화(해독)을 행하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생물에게도, 또 인간이 이용하는 기계에게도 중요하다. 새도, 원숭이도, 곤충도 저마다 동료들끼리 통신을 하는 것이고, 이 통신에 있어서는 하나같이, 해당 부호체계를 알고 있는 동료들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호나 심볼이 많든 적든 사용되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인간만이 아니라 새도, 원숭이도, 곤충도 통신은 자기들끼리만 하는 것이며 메시지의 코드화와 탈코드화(해독)을 한다고? 그래서 이들 간의 통신에서는 “해당 부호체계를 알고 있는 동료들이 아니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밀한 신호나 심볼이 많든 적든 사용”된다고? 그리고 “언어는 .... 어떤 의미에서는 통신이라는 것의 다른 이름”이라고? 이건 동물도 낮은 수준에서나마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통설과는 멀어도 한참 멀리 떨어진 이야기다. 이 얘길 더 밀고 나가면 커뮤니케이션, 즉 통신이란 서로 통하지 않던 무리가 의사소통을 하게 되는 방향만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던 무리에서 일부가 소통하지 못하게 된 상황, 즉 극소수 무리끼리만 통하게 된 새로운 방향의 상황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언어란 커뮤니케이션, 즉 새로운 군집화(커뮤니티화), 즉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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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라투르의 북토크에 참여해 끝 간 데 모를 정도로 화제를 마구 뻗쳐간 나의 분탕질(?)에 대해 사후 치료를 내게 베풀면서 죄책감을 덜고 있는 중이다. 치료의 핵심은 ‘어쩌면 이런 식의 뻗쳐나감’이 라투르의 사상과 아득히라도 닿아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 말을 내가 나에게 차분히 속삭여주는 것이다. 그의 저서 [[판도라의 희망]]이 내게 준 강한 인상이 바로 그와 관련된다. 그는 사회 및 역사와 덜 관련되고 그런 요소들로부터 덜 좌우될수록 과학의 객관성이 더 확보된다는 기존 과학자들의 통념에 반하는 주장을 했다. 다른 요소들과 더 많이 연결될수록 더 과학성이 두텁고 촘촘하고 그래서 그토록 원하는 실재성을 더 많이 띠게 된다는 것, 그게 라투르의 핵심 주장이었다. 나는 일단 ‘존재론적 전회’가 더 많이 연결되거나 다른 것들을 더 많이 포함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찬동했다. 그렇다면 굳이 요즘 말하는 인류학의 존재론적 전회에만 범위를 한정할 필요가 없다. [[말과 사물]]도,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인간의 인간적 활용]] 같은 책들에서도 두루 존재론 및 그 전회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시에 이걸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거 같다. 더 많은 존재론들과의 더 많은 연결만이 아니라 더 강한 전회가 또한 필요하다. 그러니까 [[숲은 생각한다]]를 ‘숲도 생각한다’로 읽어서는 안 된다. 그건 우리 인간이 상정하고 있는 ‘생각’을 숲도 한다는 것이니까. 그럼 어떻게? 거꾸로 생각해야 옳고 또 그게 사실에도 맞다. 어떻게? 가령 이렇게. 숲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도 하는 것이 생각이다. 마찬가지다 곤충도, 원숭이도, 새들도 암호화하고 해독한다. 그러니 “그들도 우리처럼”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처럼”이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만들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몸과 마음을 예술 작품으로 만든다. 그게 바로 동식물의 진화에서 탄생한 향기, 맛, 빛깔과 온갖 형태들, 촉감들, 노래들이다. 라투르는 또 하나의 이론을 내세워 가뜩이나 많은 기존의 존재론 시장을 더 갈라놓으려 하기보다는, 이전의 것들을 최대한 함께 품으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과연 이것이 진실이며 또 가능한 것인가, 책 말미의 해설에서 마니글리에가 묻고 있는 게 이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리저리 돌고 아득히 헤매며 그 질문에 대해 ‘가능하다, 그게 바람직하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박성관(독립연구자, <분해의 철학>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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