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충정치는 가능한가? / 오영진
- 한국연구원

- 1월 19일
- 7분 분량
“난 최초의… 곤충 정치인이 되고 싶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1986년 영화 〈플라이〉에서 파리-인간 혼종으로 변해가는 과학자 세스 브런들이 내뱉는 이 대사는 영화 속 광기 어린 농담으로 소비되었다. 괴기한 선언처럼 들렸고 관객은 웃거나 몸서리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 그 틈으로 들어가 보면 '곤충정치'는 단지 SF의 기발한 설정이 아니라 오래된 생태적 지혜와 과학적 통찰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떠오르는 질문처럼 보인다. 인간 정치가 인간이라는 종의 형상을 전제하는 동안 수많은 생명이 그 정치의 바깥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곤충정치'는 인간 중심적 정치 체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의 틈 같은 것이 되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당연히 곤충정치를 상상하는 일이 인간이 곤충을 흉내 내자는 제안은 아니다. 인간이 곤충을 대표해서 말하자는 윤리적 대리 또한 아니다. 인간이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여러 원주민 문화는 곤충과 인간의 공생적 관계를 신화와 의례 속에 새겨왔다. 21세기 과학은 곤충 사회의 집단 의사결정이 생각보다 더 정교하고 때로는 인간의 제도 정치보다 더 민주적으로 보이는 순간들도 있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신화와 의례의 기억 위에 현대 과학과 영화라는 사고실험을 포개면 곤충정치라는 말이 더 단단해진다.
애리조나의 캐니언 드 셰이 국립공원에는 240미터 높이의 붉은 사암 기둥인 스파이더 락이 서 있다. 지질학적으로는 2억 3천만 년 전 바람에 날린 모래가 압축되어 형성된 바위이지만 나바호족에게 그곳은 단순한 자연물의 거대한 표본이 아니었다. 그곳은 스파이더 우먼의 거처였고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는 거미줄 네트워크의 중심이었다. 스파이더 우먼은 중심으로부터 창조하는 존재로 묘사되어 왔다. 그녀의 거미줄은 현실의 격자처럼 모든 존재를 연결하는 텔레파시적 네트워크를 이루었고 구조는 낯설게도 오늘날 우리가 인터넷이라고 부르는 정보의 웹과 닮아 있었다. 모든 만물의 연결이라는 상상력은 기술 문명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래된 우주론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신화는 정치의 원형을 기술로 가장하는 데 능하다. 나바호족이 세 번째 세계에서 네 번째 세계로 이동했을 때 괴물들이 땅을 배회하며 사람들을 죽였다고 전해진다. 스파이더 우먼은 괴물 사냥꾼과 물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태양신을 찾을 수 있는 힘을 주었고 태양신은 두 영웅에게 땅과 물 속 괴물을 물리치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영웅 서사가 아니라 연결과 전승의 메커니즘이다. 누군가는 위기의 순간에 힘을 주었고 누군가는 그 힘을 방법으로 바꾸어 공동체에 돌려주었다. 네트워크는 전쟁 같은 예외 상황에서만 작동하는 비상연락망이 아니라 공동체가 공동체로 남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상호부조의 기술인 것이다.
스파이더 우먼의 정치성은 직조 기술을 가르치는 장면에서 더 선명해진다. 그녀는 하늘과 땅의 끈으로 교차하는 기둥을 만들고 태양 광선으로 날실을 만들고 수정과 번개로 된 종창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직조는 서로 다른 요소들을 한 장의 직물로 엮는 과정이었다. 하늘과 땅이 만났고 태양과 물질이 만났으며 빛과 폭력이 같은 도구로 등장했다. 여기에서 직조는 단지 생계 기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는 행위의 은유가 되었다. 정치란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하는 듯했다. 전설 속 스파이더 우먼은 적대 부족에게 쫓기던 청년에게 비단 끈을 내려 바위 꼭대기로 올려 보내기도 했다. 거미줄은 상징이면서도 긴급 구조 시스템이었다.
한편, 호피족에게 잠자리는 또 다른 방식의 정치적 매개였다. 호피족 창세신화에서 잠자리는 푸른 빛의 전령으로 나타났고 인간과 신계를 잇는 존재로 기억되었다. 유적에서 발견된 도자기 문양 분석은 잠자리가 호피의 4세계 창조 단계에서 물의 정화와 관련된 존재로 기록되었음을 시사해 왔다. 제4세계로의 이주 과정에서 가뭄이 닥쳤을 때 잠자리가 지하수맥을 찾아내 옥수수 농경을 가능하게 했다는 구전은 곤충을 자연의 장식품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넘어선다. 잠자리는 생태적 지식의 전달자였고 공동체 생존의 협력자였다. 물을 찾아내고 계절의 변화를 알리며 사람들에게 시간표를 건넸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도식이 아니라 자연의 다른 종들과 협력해야만 삶이 이어진다는 도식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아마존 사티레-마웨 부족의 성인식은 더 극단적인 형태로 곤충정치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소년들은 성인이 되기 위해 불릿 앤트로 불리는 거대한 독개미 가득한 장갑에 손을 넣고 10분을 견뎌야 한다. 그 쏘임은 총알에 맞은 것 같은 고통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의례는 용기의 시험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참가자에게 개미는 적대자가 아니라 성인으로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협력자라는 점이다. 이 의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차례 반복되어야 완전한 성인으로 인정받는다. 공동체는 단발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반복되는 고통의 공유를 통해 구성원을 만들어 냈고 그 고통의 매개가 곤충인 것이다. 인간은 곤충을 이용하지만 동시에 곤충을 통해 인간이 변형된다.
이 지점에서 곤충정치는 원시적 상징으로만 남지 않는다. 현대 과학은 곤충 사회의 집단지성이 단지 본능이라는 말로 뭉개기 어려운 정교함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개미 군집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신경망처럼 행동한다는 연구들이 종종 제시되었다. 개미들은 감각 정보를 집단의 매개변수와 결합해 집단 반응에 도달한다. 개별 개미의 머릿속에 전체 계획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망 전체가 계산을 수행한다는 뜻이었다. 더 나은 선택지를 개인이 알고 있음에도 집단의 단결을 위해 선호를 양보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인간 정치는 종종 개인의 이익을 조정하기 위해 거대한 제도 장치를 만들지만 곤충 사회에서는 신호와 행동의 규칙만으로도 비슷한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이 낯설게 다가온다. 여왕개미는 명령하지 않는다. 각 개미는 지역적 정보와 페로몬 신호를 바탕으로 자율적으로 행동한다. 그럼에도 군집 전체는 일관성을 유지한다. 권력이 하나의 중심에 응축되지 않아도 정합성이 성립하는 순간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또 다른 방식으로 꿀벌이 민주주의의 모델처럼 읽히기도 한다. 톰 실리의 연구가 유명해진 이유는 꿀벌의 보금자리 선택 과정이 우리가 숙의라고 부르는 절차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정찰벌들은 후보지를 탐색하고 8자 춤으로 정보를 공유한다. 춤의 강도와 지속시간은 후보지의 질을 반영한다. 다른 벌들은 그 춤을 관찰하고 직접 후보지를 방문해 검증한다. 충분한 수가 한 후보지에 모여 정족수에 도달할 때까지 과정은 반복된다. 이 과정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소수 의견은 곧바로 제거되지 않고 토론의 시간은 정보가 축적될 때까지 지속된다. 인간 정치가 실패하는 지점들이 차라리 곤충 사회에서는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곤충 사회의 사례들은 곧바로 인간 정치에 대한 교훈으로 환원되기 쉽다. 탈중앙화된 권력 구조가 가능하다거나 정보의 투명한 공유가 모델이 될 수 있다거나 집단 이익의 우선이라는 공동체주의가 극단적으로 구현된다는 식의 요약은 편리하다. 그러나 이 요약만으로는 중요한 쟁점을 놓친다. 곤충의 정치가 인간의 정치보다 더 낫다는 비교가 아니라 정치가 무엇을 전제로 하는지 다시 묻는 질문이 더 소중한 것이다. 인간의 정치가 개인의 자아와 소유와 대표와 발언이라는 형식에 깊이 묶여 있다면 곤충의 정치는 신호와 이동과 접촉과 냄새와 반복이라는 형식에 묶여 있다. 거기에서 정치라는 말이 지시하는 영역 자체가 달라진다. 곤충정치는 인간 정치를 개선하는 매뉴얼이 아니라 인간 정치의 감각 체계를 낯설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해야 한다.
영화〈플라이〉로 돌아가 보자. 영화는 천재 과학자 세스 브런들이 텔레포테이션 실험 중 파리와 유전자적으로 융합되어 점진적으로 파리-인간 혼종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초기에는 등에 굵은 털이 자라나고 피부가 변색되며 손톱과 머리카락이 빠지는 식의 증상이 나타난다. 중간 단계에서 그는 비정상적으로 근육이 발달하고 손톱 머리카락 치아가 모두 빠지며 피부가 흉측하게 변형된다. 그는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를 '브런들 자연사 박물관'이라 이름 붙인 캐비닛에 보관한다. 후기 단계에서 그는 인간의 모습을 거의 잃고 파리와 유사한 형태로 변한다. 이 신체 변화만큼 중요한 변화가 목소리에서 일어난다. 영화에서 컴퓨터는 브런들의 목소리로 신원을 확인한다. 그러나 변신이 진행될수록 컴퓨터는 그의 목소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정체성은 몸만이 아니라 인증의 체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체계는 특정한 형태의 몸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간은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인간의 목소리를 유지해야 했고 인간의 목소리는 시스템이 알아듣는 규격이어야 했다.
크로넨버그는 이 이야기를 노화와 죽음의 보편성으로 제작했다고 말한 적 있다. 그의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했고 질병의 기억을 영화에 사용했다. 관객은 세스에게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육체적 쇠퇴에 연민을 느낀다. 귀가 떨어지고 음식물을 토하고 복부에서 날개가 돋아나며 피부가 껍질처럼 갈라져 그 안에서 곤충의 형태가 드러나는 장면들은 반복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세스는 베로니카에게 “도와줘”를 반복한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태에서 그는 총신을 머리에 대고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한다. 괴물로 여겨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선택은 역설적으로 그의 인간성을 증명하는 방식이 된다. 이 비극의 원인을 우연한 사고나 기술의 오작동만으로 설명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비극의 진정한 원인은 세스가 파리-되기를 견디지 못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변신의 중간 단계에서부터 그는 자신의 몸 안의 파리 유전자를 희석시키려 한다. 더 순수한 인간 유전자와 합성하면 된다는 컴퓨터의 답을 받아들인 그는 연인 베로니카를 강제로 텔레포드에 넣어 자신과 융합하려 한다. 여기에서 인간성에 대한 미련은 폭력으로 바뀐다. 인간 중심주의는 단지 생각의 틀이 아니라 신체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신체를 끌어들이는 강제의 기술이 된다.

아마 도나 해러웨이라면 '퇴비되기'라는 흥미로운 재해석의 문을 열 것이다. 해러웨이는 『Staying with the Trouble』에서 human의 어원을 추적하며 인간이 원래 땅과 흙과 노동의 어휘 guman에서 파생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녀는 우리를 호모나 포스트휴먼이 아니라 부식토와 퇴비로 지칭하는 게 옳다고 말한다. 인간은 하나의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미생물 곰팡이 곤충 같은 크리터들과 얽혀 순환하는 존재라는 선언이다. 이 관점에서 〈플라이〉의 비극은 곤충이 되어버려서가 아니라 곤충이 되는 것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해서 발생한 것으로 읽힌다. 세스가 떨어져 나간 신체를 박물관처럼 보관하는 대신 그것을 퇴비로 돌리고 새 생명의 조건으로 이해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가 베로니카를 강제로 합성하려 하지 않고 함께 다른 공동체의 형태를 상상했다면 그 정치의 방향도 달라졌을 것이다. 곤충정치란 바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이 있는 지, 그 길로 갈 수 있는지 묻는 질문이다.
세스의 곤충 정치인 선언이 광기가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의 발화였다고 가정해 보자. 인간에서 파리로의 신체 변형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정이 될 것이다. 파리는 인간에게 하등하고 더럽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여겨져 왔지만 세스는 파리로 변하며 힘과 민첩성을 획득한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신체는 인간의 규범이 절대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파리-되기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흐리고 기술과 자연의 경계를 흐린다. 이 흐려짐을 어떻게 함께 살아갈 규칙으로 바꾸느냐가 중요하다. 이 다음 다른 정치, 즉 곤충정치가 시작될 수 있다.
어쩌면 몽상에 그치지 않고 리메이크라는 형태로도 다시 돌아올 지 모르겠다. 2020년대 들어 〈플라이〉를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페미니스트이자 흑인 감독인 니키야투 주수(Nikyatu Jusu)의 내정설이 있다.) 만약 이 이야기가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다시 쓰인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제 멋대로) 2098년이라는 미래를 가정해 보자. 초국가적 기업들이 인간 진화를 위한 실험을 극비리에 진행하는 시대다. 주인공이 여성 생태학자라면 곤충은 공포의 오염원이 아니라 멸종과 생태 파괴의 증거이자 복원의 가능성이 된다. 남성 과학자가 그 데이터를 도용해 완벽한 인간 진화를 강행하고 동의 없이 타인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면 비극의 원인은 기술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가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말이 달라질 수 있다. 곤충-인간 하이브리드로 진화한 주인공이 인간 중심적 과학의 폭주를 비판하는 존재로 변모하고 생태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정의한다. 그녀는 괴물이 아니라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된다. 곤충적 본능과 생태적 연결성을 통해 잠들어 있던 실험체들을 깨우고 연구 시설을 파괴하는 반격은 복수극이 아니라 관계를 재구성하는 행위가 된다. “나는 흙 속에서 생명을 배웠다”라는 마지막 선언을 하며, 기술의 신화를 끊고 퇴비의 윤리로 돌아가자는 요구가 영화 속에 울려퍼진다. 물론 내 멋대로 상상이었다.

〈플라이〉의 실험실은 고독한 백인 중년 남성 과학자의 신화를 강화해 왔다. 혼자 일하고 침묵하며 천재성을 독점하고 비밀을 움켜쥔 채 세계를 바꾸려는 인물이다. 곤충 사회가 보여주는 의사결정은 그 반대의 형식에 가깝다. 협업과 다양성과 투명성이라는 조건에서 분산된 집단지성이 작동한다. 진정한 곤충정치를 말하려면 우리는 미치광이 천재의 신화를 벗어나야 한다. 과학은 혼자가 아니어야 하고 정치는 더더욱 혼자여서는 안 된다. 곤충정치는 그 사실을 가장 잔인하면서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중심이 없는데도 체계가 유지되고 명령이 없는데도 방향이 생기며 한 개체의 자아가 아니라 관계의 패턴이 결정을 만든다.
곤충정치는 결코 은유가 아니다. 한 때 원주민 문화가 수천 년 동안 실천해온 생태적 지혜의 한 형태였고 현대 과학이 집단지성의 모델로 증명하기 시작한 체계였고, 영화와 예술이 인간 너머의 주체성을 상상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스파이더 우먼의 거미줄은 모든 존재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의 이미지였고 호피족의 잠자리는 물을 찾고 농경을 가능하게 하는 협력자였으며 사티레-마웨의 개미 의식은 고통의 공유로 공동체를 묶는 정치적 장치였다. 개미 군집의 분산형 의사결정과 꿀벌의 숙의 과정은 정치가 발언과 투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호와 검증과 시간의 배치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곤충정치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은 이미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남는 것은 인간 중심적 오만을 버리고 곤충과 함께 정치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곤충정치는 혐오와 거부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받아들임과 함께-되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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