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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와 거대기계, 한국인의 꿈 / 오영진

몇 해 전 동묘에서의 일이다. 어느 골동품 가판대 위로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담긴 액자와 거대로봇 피규어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고물이나 골동품이 즐비한 동묘였지만, 두 사물의 배치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어서 주목을 끌기 충분했다. 액자와 피규어는 단순한 수집 대상이 아니라 숭배의 대상이었고, 상점은 그 주술적 믿음의 시험대였다. 마치 죽은 대통령의 육신이 강인한 기계의 몸으로 되살아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노인들이 1970년대 박정희와 이후의 중공업 부흥기를 기묘하게 추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방적기 하나 손수 만들 수 없었던 이들에게 기술은 조국을 근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현실은 기계를 운용할 기술은커녕 제대로 된 숙련공도 가지지 못한 실정이었다.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장치를 만들고 운용하는 일은 이 시기의 환상이다. 이 환상이 무의식중에 도달해야 할 그러나 아직도 도달하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기술은 숙련노동과 공학의 결과물이지만, 한 시대의 문화적 요소로 취급했을 때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 실체를 감지하고 만나게 된다. 기술철학의 길을 열어놓은 질베르 시몽동(1924-1989)은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와 그들의 발생조건들은 단순히 기술적 대상들만 고려해서는 해결될 수 없는 하나의 문제를 철학적 사유에 제기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기술적 대상들의 진정한 본성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 맺음들 전체의 발생을 연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기술적 대상은 그를 둘러싼 우리의 욕망과 믿음, 기술계 자체에 내재하는 잠재성이 만나 하나의 앙상블이 되어 열리고 또한 닫히는 과정 속에 나온 결과물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 시대의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가시적인 차원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기술에는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도 존재한다고 말하면 어떨까. 구분해 보자면 의식이 기술적 대상들의 실제적 조건 즉 기술관료의 결정과 엔지니어들의 노동의 차원이라면 무의식은 기술적 대상들이 각각의 단계에서 내포하고 있는 잠재성, 그 잠재성을 추동하는 인간 행위자의 욕망, 이데올로기 등의 차원이다. 그렇다면 이 후자, 기술의 무의식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질문해보자.


이 점에서 박경근 작가의 『철의 꿈』(2014)은 중요하다. 영상설치작업을 주로 해온 그는 이 작품에서 아버지 세대의 거대한 기계에 대한 꿈을 해석하려 했다. 어찌 보면 다큐영화라고 볼 수도 있는 작품은 내레이션 거의 없이 오로지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서만 의미를 만들어간다. 영화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울산의 고래 암각화를 비추며 시작한다. 지금은 수몰되어 볼 수 없지만 이 암각화에 고래는 거대하며, 금방이라도 사냥꾼들을 삼킬 듯 새겨져 있다. 원시의 극장 앞에서 사냥꾼들은 매일 환상을 머릿속으로 플레이하며, 사냥기술을 연마했을 것이다. 고래는 단순한 사냥감이 아니라 신이 주신 선물 혹은 위력적인 신 그 자체였다.



박경근은 『철의 꿈』(2014) 이전에 단편 『청계천 메들리』(2011)을 통해, 자신의 할아버지가 운영했던 청계천의 공장 이미지를 그려냈다. 그곳에서 쇠를 깍고 다듬는 노동을 통해 각종 부품과 도구가 탄생하는 마법을 기억한다. 작가는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쇠 냄새가 난다고 고백한다. 작가에게 ‘쇠’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이어지는 가계도의 중요 이미지다. 쇠가 풍기는 시큼한 냄새와 무게, 거친 공구들의 위험, 그 와중에도 대포 한 잔 나누는 인간이 어우러져 청계천이라는 거대한 기술적 대상을 앙상블로 만들어낸다. 박경근 개인의 이야기로 시작한 『청계천 메들리』는 이어 『철의 꿈』으로 이어짐으로써 한국 근대사의 남성성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무대와 단서를 제공한다.


영화는 이어 박정희와 정주영의 연설장면으로 이어진다. 필름 속에 비친 이들은 “하면 된다”와 “해보기나 했어”같은 시대적 정언명령을 주창하며 조국 근대화를 이끌고 간다. 길게 늘어진 파이프라인과 곳곳에 심어놓은 대형 크레인이 조선소의 풍경을 기하학적으로 채운다. 이어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중화학공업의 상징적 존재, 포항종합제철의 박태준의 묘비가 비춰진다.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짧은 일생을 영원 조국에”


고대와 대비되는 현대의 고래는 펄펄 끓는 쇳물과 거대한 선박 등으로 등장한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작은 모니터로 보아서는 안 되는 작품이다. 관객이 이미지를 통해서 육중한 무게감과 거대한 크기, 뜨거움과 강도를 체현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감각이 전달된다면 굳이 말을 더해 해석할 필요 없다. ‘철의 꿈’이라고 지칭되는 이 강력한 ‘힘에의 의지’가 한국사 저변에 흐르는 동력이라는 점 영화는 관객에게 확인시켜준다.


고래와 거대기계. 이 주제는 실은 허먼 멜빌이 『모비딕』(1851)을 통해 이미 다룬 주제이기도 하다. 통상 에이허브 선장이 복수를 위해 거대한 고래를 찾아 헤맨 이야기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 소설을 낭만주의적인 작품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에이허브가 그려내는 풍경은 매우 과학적이고 시스테미컬한 포경업이다. 픽션보다는 포경업 르포에 가까웠던 이 책은 한참동안이나 고래학 분야의 서가에 꽂혀 있었다고 한다. 전설적인 크기의 고래와 그 고래를 잡아 해체해 버리는 현대의 시스템이 소설 속에서 싸움을 벌인다. 소설은 고대의 모험담이 아니라 현대의 투쟁기였다. 결국 이 작품은 고래를 찾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래를 잃어버리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소설무대의 모태가 되었던 에식스호야말로 고래를 잡는 거대한 시스템 즉 새로운 고래인 것이다. 『철의 꿈』에서 고래 암각화와 70년대 조선업의 풍경이 교차되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숭고’는 주체와 대상 간 관계에 있어, 인지하게 되는 대상이 너무나도 크거나 위력적이어서 주체가 감당할 수 없을 때 경험하는 당혹, 공포, 매혹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인간에게 숭고를 경험케 할 대상물은 그래서 자연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고래나 파도, 높은 절벽 등이 인간을 전율케 하면서 동시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어 주체는 힘에 대한 동경으로 넘어간다. 너무 큰 힘 앞에 서 있기조차 두렵지만 그 힘의 크기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더 큰 인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 숭고는 주체가 새로운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인 것이다.


산업사회에 들어오자 자연의 숭고 대신에 인공의 숭고가 들어온다. 인간은 거대한 파도보다는 위력적인 소음과 속도를 뽐내는 증기기관차에 매료되고, 파도에도 끄떡없는 함선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을 획득하려는 욕망은 종종 힘 자체가 되어버리는 일로 귀착되고 만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속도를 찬미한 나머지 자동차 자체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시작된다.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기술적 대상은 이렇게 욕망(desire)과 도착(fetishism)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이게 된다. 이 혼란 속에서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국가의 ‘일부분이 되어버리는 일’, 기계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일부분이 되어버리는 일’ 등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허먼 멜빌의 미덕은 욕망의 대상으로서 거대 피조물을 직시하고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욕망하는 주체를 그려냈다는 점이다.

“새로운 근대의 신이 탄생한 이후 사람들은 삶에 충격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어. 자기 힘보다 수 만배가 넘는 무거운 물체를 들 수 있게 되었고, 엄청난 양의 쉿물을 단시간에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의 감각은 기계들을 통해 그들의 신체 밖으로 확장되기 시작했어. 하지만 정작 그들은 변화의 의미를 인지하지 못했어” (『철의 꿈』 중 나레이션)

박경근은 고대의 고래 암각화를 현대의 조선업의 풍경을 연결하며 자연의 숭고가 인공의 숭고로 대체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6-70년대 유년기를 보낸 이들은 “전 국민의 과학화”, “정밀, 정성, 정직” 등의 시대적 정언명력 속에서 살아왔다. 거대한 기계 속에 하나의 정밀한 부품이 되기를 권유받았고, 성실히 그 요구를 수행해 왔다. 자연물에서 인공물로 숭고의 대상이 전환되었을 뿐 아니라 욕망이 도착으로 전환되는 일도 벌어진다. 박경근은 『철의 꿈』을 통해 기계를 욕망하면서 또한 기계의 부품이 되고자 하는 한국민들의 무의식을 담았던 것이다.


한편, 『철의 꿈』에는 국가와 결탁한 남성성에 대응하는 또 다른 기계의 풍경도 등장한다. 1990년 현대중공업의 골리앗크레인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구속 노동자들에 대한 고소고발 취하와 단체협상 불이행에 대한 각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농성을 벌였다. 경찰 1만명과 경비정, 헬기 등을 동원해 정부가 압박해오자 불과 70여명이 골리앗크레인으로 올라가 고공투쟁을 벌인다. 영화는 최루탄과 화염병 속에서 골리앗크레인이 일하기를 멈추고, 노동자들의 기계가 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골리앗크레인이라는 거대기계는 노동자들에 의해 탈취되고, 기계의 부속품이 될 수 없다고 외치는 자들의 무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레이션 한다. “싸우는 동안 사람들은 마치 암각화 앞에서 춤을 출 때처럼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희열을 느꼈어”


또한, 남성노동자들만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조선소에 여성 노동자들의 역사도 있음을 증언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송순이씨는 처음에는 남성들만 있어 두려웠지만 상대를 배려해주는 문화가 있었고 노동에 곧 익숙해졌다고 진술한다. 아침을 준비하고 새벽녁 출근해 작업복을 갈아입는 모습을 통해 이곳에서의 노동이 또 하나의 평범한 일상임을 확인한다.



기계를 탈취하여 새로운 무기로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 젠더의 경계를 허물고 자유롭게 노동자들의 신체가 기계와 접속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기술적 대상의 잠재성을 일깨우는 일이다. 기술적 대상의 잠재성은 그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관계맺는 인간이라는 변수에 의해 결정되어 현실로 나타난다.


영화는 조선소에서 마지막 블록을 맞춰 배가 완성되는 작업을 리얼타임으로 보여준다. 그 장면은 마치 정지장면처럼 느껴질 정도로 느리다. 이 거대한 배 한척이 마치 탯줄을 자르듯 밧줄을 자르는 의식을 통해 드디어 세상에 등장한다. 거대한 기계에 대한 우리들의 꿈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종이잡지 <일요일.日樂日>(2016 창간호, 현재 폐간)에 기고한 박경근론을 바탕으로 현 시점에서 개고함.


오영진(<에란겔:다크투어> 기획자, 교과묙 <기계비평>주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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