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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사 속에서 내 연구의 시작을 성찰하다 / 장지연

사람의 선택이란 얼마나 개인적이고 주체적인 것일까? 특정한 선택이나 선택하지 않음을 직접적으로 강요 받는 경우는 제외한다면, 개인의 선택은 오로지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것일까?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적어도 나는 지극히 자발적이고 주체적으로 내 진로를 선택해왔다고 자부했다. 노벨상을 꿈꾸던 과학도 어린이에서 역사학으로 급 선회한 중학생, 조선시대 도시사를 하겠다고 마음 먹은 대학생까지, 모든 선택은 나 자신의 숙고에 의한 결정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모든 선택은 결국 시대의 큰 흐름을 따라 그 폭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1980년대에 성장한 대한민국의 어린이로서 과학도를 꿈꾼 것도, 청소년으로서 만주 벌판을 상상하며 한국고대사를 생각한 것도, 1990년대 초보 연구자로서 도시사를 꿈꾼 것 모두 그 시대의 도도한 사조와 함께 해온 것이었다. 나의 선택은 온전히 개인적이지 않으며, 역사적이고 사회적이었다. 여기에서는 나의 미시사와 거시사를 함께 성찰하면서 내 공부의 현 전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것이 어떠한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지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980년대, ‘국풍’과 ‘재야사학자’의 붐

     

또렷하진 않지만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81 행사에 가족이 함께 구경 간 기억이 있다. 여기저기 부스를 배회하며 간식거리를 사먹고, 아버지는 백자 항아리 하나를 사고서는 어머니에게 안목 없다고 타박을 받았다. 약간 더운 날씨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인파 속에서 부모님과 동생들 손을 붙잡고 배회했던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1970년대 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의 선전에 이어 바야흐로 1980년대에는 ‘주체적’ ‘민족문화창달’이라든가 대륙과 해양으로 ‘웅비’한다는 등의 단어들이 넘실댔다. 국수주의적 분위기에 편승해 풍수지리나 󰡔단(丹)󰡕 같이 증명할 수 없는 영역들이 민족문화의 하나로 활발한 발언권을 얻었고, 󰡔정감록󰡕, 󰡔환단고기󰡕 같은 책이 출판되며 선풍적인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이른바 ‘재야사학’의 부상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학계에서 차근차근 축적해온 한국 고대사의 연구 성과는 ‘식민사학’이라고 치부해버리고서는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자국의 우월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는 주장이 거셌다. 식민사학자라며 강단의 학자들을 법정에 세우는 일도 발생했다.

이 시절 내가 과학도에서 한국 고대사학자로 꿈을 전환한 것은 교육 체계상으로는 이과에서 문과로 바꾼 것이니 엄청난 변화인 것 같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본다면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나의 과학도로서의 목표는 인류 보편을 위한 지식의 확충이라든지 어떤 분야에 대한 순수한 지적 호기심에 기반하지 않았다. ‘아무도 못 찾은 AIDS 치료법을 개발해서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을 받겠다.’ 같은 순진하고도 출세지향적인 수준이었다.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위대한 한국인이 되겠다는 희망의 차원에서 볼 때, 과학도라는 꿈이나 만주 벌판을 상상하며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겠다고 하는 꿈은 차이가 없다. ‘세계 최고의 위대한 대한민국’이라는 국수주의적인 꿈은 하나의 모양, 한 가지 색깔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이 시절의 회고는 단지 나 한 사람의 성장사에 대한 성찰로 그칠 문제만은 아니다. 같은 시절을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꿈과 세계관을 내면화했다. 권력의 주입과 위대한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이 만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열망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이며, 정서다. 지금은 유사역사학 혹은 사이비 역사학이라고 지칭되곤 하는 ‘재야사학’은 이러한 정서와 정치권의 동조 및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이후로도 다양하게 변주하며 상당한 심도로 시민적 기반에 침투했다. 아무리 학계에서 지식의 계몽을 해도 쉽게 뿌리 뽑히지 않는 것은, 사실은 이것이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자극하고 정서의 한 자락에 닿아 있는 열망이라서 그렇다.

    


1990년대, 연성 주제와 ‘세계화’라는 화두

     

‘고구려사를 연구하여 만주 벌판을 되찾겠다!’는 자랑찬 꿈은 대학 입학 후 단 며칠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3월 초, 학과 교수님들과 신입생의 첫 만남에서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희망을 밝히는 시간이 있었다. 성씨 가나다순으로 뒷번호였기에 앞번호 동기들의 발표를 먼저 들을 수 있었는데, 아뿔싸. 나 같은 꿈을 가진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대부분 비슷한 부류의 위서를 읽거나 만주 벌판을 상상하며 고대사를 연구하겠다고 한 것이다. 내 꿈이 그렇게 독특한 것이 아니란 것도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데, 교수님들의 반응이 더 신경 쓰였다. 학생들이 위서 이름을 댈 때마다, 고대사 얘기를 할 때마다 교수님들이 한 번씩 한숨을 쉬시며 ‘너도냐.’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차례가 돌아왔을 때 결국 나는 진심을 숨겼다. “아직 특별히 정한 것은 없는데, 공부하면서 열심히 찾아보겠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 분위기 파악하는 눈치는 있었던 것 같다. 나중에 선배들이 이 교수님들이 바로 ‘식민사학자’라고 몰리며 법정에 섰던 분들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연구 분야에 대해서는 진심을 숨기긴 했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은 진심이었다. 얼마 공부하지 않아 ‘만주 벌판’을 운운했던 소싯적의 생각이 얼마나 문제였는지도 금방 깨우쳤다. 관심의 분야는 넓어졌고 깊이도 깊어졌다. 무엇보다 재밌어 한 것은 답사를 준비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 마침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엄청난 인기를 끌며 일약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은 쉽고 감각적인 문체를 통해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전달했으며, 그것이 사회적으로 대단한 호응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보여주었다. 지금의 나는 이 책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나, 적어도 1990년대 이 책이 불러일으킨 현상과 의미는 인정한다.

당시 학계의 연구 조류가 바뀌고 있었다는 점도 내 행로에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연구는 정치사, 외교사, 경제사와 같이 구조와 단계를 밝히려는 딱딱한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제도사의 경우에도 국가의 제도 구성과 의도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고, 사상사를 포함하여 이들 분야들은 세계사의 보편 법칙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발전적 변화를 규명하고 그 변화의 계기를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를 ‘내재적 발전론’이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부터 이러한 기존의 연구 경향은 다방면에서 도전을 받았다.

먼저 국내적으로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서 정치, 경제 같은 딱딱한 주제보다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세계적으로는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이른바 ‘세계사적 보편 법칙’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빠르게 한국 사회에 확산했다. 더이상 근대가 지고지순한 선도 아닐뿐더러, 근대를 향한 하나의 행로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 것이다. 냉전의 해체 속에서 전 세계는 빠르게 ‘세계화’의 바람을 탔다. 곳곳에서 ‘세계화’가 화두이던 시대, ‘내재적 발전’을 외치는 기존의 연구는 구닥다리이자, 냉전 시대의 국수주의(민족주의)적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점으로 인식됐다.

    

     

나는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무자비하며 냉소적인 비판적 시각에 대해서는 거리를 둔다. 비판적 연구들이 나온 지 20여 년이 가까워지는데, 그 사이 이들 비판론이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다. 다만 ‘내재적 발전론’이란 용어가 불러일으킨 오해도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발전의 계기가 ‘우리나라’에 내재해 있었다는 주장으로만 인식되기 십상이며, 일부 연구들은 그러한 차원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지점은 ‘우리’를 역사 변화의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로 설정한다는 부분이었다. 그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는 열어두고 탈식민을 위한 당대의 시대적 노력에 대해서는 존중을 표할 필요가 있다. ‘내재적 발전론’의 한계에만 몰두하고 그 성취는 제대로 곱씹지 못했기에, 지난 20여 년의 비판론이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90년대, 연성화된 시대는 문화를 향해 열렸다. 답사를 다니며 문화유적을 역사 서술과 연결시키고 싶다는 나의 열망이 다행히도 시대와 부합했다. 마침 문화사 분야로 시선을 돌린 지도교수의 권유도 있었겠다, 정도(定都) 600주년을 맞은 1994년을 계기로 서울 안의 여러 유적지에 대한 관심도 환기되었다. 자연스럽게 서울의 궁궐, 그리고 거기에서 확장하여 조선시대 수도에 관심을 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개개인의 선택은 거시적인 시대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온전히 나의 선택이라고만 생각한 것도 수많은 사회적, 역사적 연결망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연결망을 통찰하는 것은 현재의 나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개인은 단지 수동적으로 그 연결망에 점찍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곁가지를 뻗으며, 사람은 새로운 연결망을 구성하고, 그것이 모이면 그 행로의 끝은 많이 달라지기도 한다. 나의 연구 역시 그렇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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