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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아일보의 탄생 - 언론에서 기업으로』 리뷰 / 장문석

“1940년 8월 10일, 한때 ‘민족지’를 자임하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문을 닫았다.”(198) 이듬해 4월 조선어 잡지 『인문평론』과 『문장』도 발간을 멈추었다. 해방 후 임화가 회고하였던 중일전쟁기 조선어, 합리성, 예술성을 지키지고자 조선의 문화인이 협동하였던 ‘공동노선’의 물질적 토대가 허물어진 셈이었다. 같은 달, 작가 한설야는 잡지 『춘추』에 단편 「세로」를 발표한다. 소설은 방응모가 사장에 취임한 직후이자 한설야가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던 1933년 조선일보의 상황을 포착하고 있다. 한설야는 방응모를 모델로 한 ‘사장’을 “본시 미천한 사람으로 구차히 지나다가 오십이 넘은 금년에야 크게 치부한 사람”으로 “사업과 명예를 쌓아올리려는 다급”하고 “돈은 있어도 현대인으로서의 교양이 없는” 인물로 제시하였으며, 연습을 통해 점차 유창해지는 “동아와 세계정세”에 대한 그의 연설을 빌려서 폐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겹쳐두었다. 그리고 사내 대립의 결과 ‘B일보’(조선일보)를 떠나게 된 ‘H’(주요한)의 고별사를 통해 식민지 언론에 대한 하나의 이념형을 기록해두었다.

“신문 경영은 비록 어떤 재단이니 개인이 한다 하더라도 신문 자체는 엄격히 사회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든지 사사로운 개인의 의사가 신문을 지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을 투철히 인식한다고 할 것 같으면 즉 신문이란 공적(公的) 존재요, 사회의 공기인 것을 인식한다면 신문사업도 다른 사회사업과 마찬가지로 잘 발전해 갈 수 있을 줄 압니다. 즉 사회의 지지를 받기 때문입니다.”(한설야, 「세로」(『춘추』, 1941.4.), 이상경 편, 『일제 말기 파시즘에 맞선 혼의 기록』, 역락, 2009, 181면.)

사업가로서 신문을 이해하는 ‘사장’, 사회적 공기로서 신문을 바라본 ‘H’. 1941년 4월, 양대 조선어 신문이 폐간된 시점에서 한설야는 ‘사장’과 ‘H’의 지향 사이에 위치하였을 많은 언론인이 세상을 마주했던 길을 되짚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창간 100주년을 넘어서 간행된 『조선·동아일보의 탄생』에서 제목에 쓰인 ‘탄생’의 의미를 깊이 새긴다. 이 책은 1920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20년의 시간동안 식민지 조선인이 경영하였던 언론의 역사를 뚜렷한 여섯 장면으로 서술하였다. 1장은 1920년 조선일보의 창간, 2장은 1924년 동아일보의 개혁운동, 3장은 1930년대 초반 조선일보의 경영권 다툼과 이양, 4장은 1930년대 초반 중앙일보의 발행, 5장은 1930년대 초반 언론의 상업화와 1930년대 중반 일장기 말소 사건, 6장은 1940년 전후 동아일보·조선일보의 폐간을 중심에 두고 있다. 한설야의 「세로」는 6장의 시공간에 서서 3장의 시공간을 회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1940년 조선일보 폐간의 시점에서 1930년대 초반 조선일보 경영권 이양과 1930년대 상업화의 의미를 되짚고 있던 셈이다.


1940년 8월 10일 폐간호 편집 후의 조선일보 편집국

식민지 조선 언론의 상업화라는 『조선·동아일보의 탄생』의 핵심적인 주장을 쟁점적으로 뚜렷이 드러내는 한 편, 서술의 장점 또한 뚜렷이 드러낸 부분은 가장 먼저 작성된 5장이다. 이 장은 1930년대 언론의 상업화에 중점을 두면서도 1920년대 이래 역사적 맥락에 충분히 유의하고 있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선택을 중심으로 다루면서도 조선중앙일보의 길을 비교항으로 제시하고, 조선총독부를 또 다른 행위주체로 고려하면서 이들의 동역학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책은 1920년대 창간 이래 “조선인들이 신문을 구독할 만한 경제적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164) 상황에서 조선어 신문이 마주했던 경영의 어려움이라는 조건을 환기한다. 193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광고량을 비약적으로 늘리고 과거 정간의 상징이던 압수와 정간을 가급적 피하면서도 “대다수 독자들은 총독부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기사를 좋아했”기에 “저항이라기보다 일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조선’ 또는 ‘민족’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1930년대에 한글신문의 필봉이 무뎌졌”으며 “총독부의 검열”과 “독자의 요구” 사이에서 “‘민족’은 주요한 상품”이 되었다(167-168, 172, 193).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상업화를 선택했다면, 사회주의 계열의 지식인이 기자로 활동하였던 조선중앙일보는 여전히 정치사회적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일장기말소사건’(1936)을 계기로 총독부는 언론정책을 전환한다. “1935년 이전까지는 기사가 법에 저촉되는 않는 한 지장이 없었지만, 1936년부터는 태도를 일변하여 기사로써 ‘국민’된 입장을 보이지 않으면 존립하기 힘들”게 되었으며(188), 결국 “1937년 이후 동아·조선일보의 지면은 『매일신보』와 큰 차이가 없”게 된다(195). 이 책은 193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상업화 과정을 “언론에서 기업으로”(193)라고 정리하고 책의 부제로 삼았다.


동아일보 창간호 1920.4.1.

이 책은 하나의 장에서 그 중심이 되는 행위주체와 사건을 고립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맥락을 입체적으로 서술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동시에 이 책의 각 장이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언론사와 사건의 수효는 각기 다르다. 따라서 독자가 이 책의 여섯 장을 연결하여 읽을 경우, 20년에 이르는 식민지 조선의 언론사를 다채로운 자료를 통해 풍요롭게 실증하면서 다양한 행위 주체의 시점에서 효율적으로 조명하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책이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을 갖추었으면서도 식민지 조선의 언론의 역사를 저자의 뚜렷한 목소리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자료와 시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효율적인 서술이 가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저자가 누구보다 성실히 자료를 많이 읽은 연구자인 덕분이다. 저자는 필요한 자료와 근거를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활용하였기에 서술의 경제성을 성취할 수 있었다.)


저자가 책머리에서 밝혀두고 있듯 이 책은 “구상부터 헤아리면 20여 년”(12)에 이르는 짧지 않은 시간, 넓은 범위의 강독, 입체적인 시각과 아이디어의 모색, 새로운 자료의 심문과 발굴, 학계의 상호 검증을 통해 한 글자 그리고 한 문장 낭비 없이 쓰인 저서이다. 동시에 이 책은 곳곳에서 독자들을 계발하면서 이후의 작업을 요청하는데, 저자 역시 “별도의 단행본”(10)을 기약하고 있으며, 이 책으로 학계의 “뚜렷한 쟁점”의 형성과 “풍부한 토론을 기대”(12)하고 있다. “접근이 어려운 사료를 부록”(13)으로 실은 저자의 너른 마음 쓰심 역시 그에 닿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조선·동아일보의 탄생임을 다시 한 번 새긴다. 이 책이 서술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는 2000년 전후의 안티조선운동과 20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100년이라는 동시대적 문제의식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에 있다. 이 책에는 “언론의 상업화에 대한 비판, 경영(또는 자본)으로부터 편집권의 독립”이라는 뚜렷한 문제의식과 “궤변으로 가득 찬 100년사가 더 이상 인용되거나 활용되어서는 곤란하다는”(12) 실천적 입장에 근거하여, 언론사의 방어적인 사사(社史)에 적극적으로 개입(commit)하며 답보 중인 학계에 쟁점을 환기하고 있다. 저서의 곳곳에 그어둔 밑줄 못지않게 연구대상과 저자가 형성한 팽팽한 긴장은 『조선·동아일보의 탄생』으로부터 크게 배운 바이다.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의 비평이 신문에서 발달하였으며 여전히 전적으로 신문 학예면에 근거하고 있음을 통찰하였던 비평가 최재서는 동아일보 학예면에 다음과 같이 쓰면서 자신의 비평의 근원을 성찰하였다. 최재서의 성찰에 겹친 다짐과 함께, 저자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서평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이상의 변모를 나는 비평의 리뷰화라고 본다. 비평은 어떤 일정한 입장에서 확고한 기준을 세워가고 그 일정한 방법으로써 모든 문학적 사상을 판단하고 비판한다는 엄격한 정신은 희박하여지고 그 대신 문단 현상을 리뷰-(총람)한다는 신문기사적 성격이 농후하여졌다. 〔…〕 우리는 우리의 비평형태를 급속히 변혁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비평의 발표형식을 신문으로 잡지에, 잡지로부터 저술에 점진(漸進)할 수밖에는 없다. 이렇게 비평의 외형을 변개함은 그것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외형이 얼마나 내용을 규정하는가, 오랫동안 신문평론을 써오면 그 사고형식이 신문 분회식(分回式)에 지배되어 단편적 분할적으로 변형되나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비평의 상품화를 의미하는 것이니 신중히 고려치 않을 수 없다." (최재서, 「비평과 월평」 (3)-(완), 『동아일보』, 1938.4.14.-15.)

장문석(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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