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同志)라는 말은 아직도 낯설다. 친구라는 이름의 정치적 버전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친구라니, 그것이 가능한가? 하긴 경제적 친구, 말하자면 비즈니스 친구가 드물지 않은 세상이다. 정치와 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은 두 종류만 남는다. 이득이 되는 사람과 해를 입히는 사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사람들을 나누는 기준은 물론 내가 쥐고 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세상인 것이다.
동지의 반대편에는 적이 있다. 정치적 세계에서는 동지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적에 속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중간은 없다.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관심권 바깥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이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시야에는 잡히지 않지만, 적과 동지 사이에는 ‘아무나’가 있다. nobody but you. ‘아무나’는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이다. ‘너’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적이 나에게 더 가깝다. 그런데도 나와 너 사이에는 너무나도 많은 아무나들이 있다. 그들은 동지도 적도 아닌,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에게 해를 입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내 곁을 항상 스쳐 지나가지만 나와는 엮일 염려가 없는 사람들이다. 버스에서, 기차에서, 식당에서, 대합실에서 숱하게 마주치지만 결코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미래를 기약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다.
엄청나게 많은 아무나들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에 비하면 동지와 적은 한 줌이나 될지 모를 일이다. 동지 때문에 세상이 살 만하거나, 적으로 인해서 세상이 절망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세상이 동지와 적으로만 이루어진 것 자체가 절망인 것이다.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만 바라보는 삶이 절망이다.
“여기 72개의 사물이 놓여 있습니다.
장미, 향수, 빵, 와인, 깃털, 꿀, 가위, 못, 쇠막대, 외과용 수술칼, 권총, 총알 한 개, 채찍, 사슬, 바늘, 망치, 톱, 립스틱, 스카프, 거울, 유리잔, 카메라, 책, 머리핀 ……
이 사물들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속해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는 두려움과 고통만이 내게 속한 것입니다.
자아, 당신을 끌어당기는 사물이 있나요?
당신 속의 두려움과 욕망에 따라 무엇이든 선택하세요.
테이블 위의 사물들로 당신은 나에게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옷을 잘라낼 수도 있고 머리에 총을 겨눌 수도 있어요.
장미 가시로 나를 찌를 수도 있고 향수를 뿌릴 수도 있어요.
내 눈물을 닦아줄 수도 있고
내 유방을 만지거나 입을 맞출 수도 있고
다리 한쪽에 칼을 꽂거나 목에 상처를 내어 피를 마실 수도 있어요.
나를 해치거나 죽인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물론 한때라도 죽고 싶었거나 죽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 나희덕, 「rhythm O」 중에서 ”
여기, 러시아의 유명한 퍼포먼스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다. 사람들은 그들 앞에 전시된 72개의 사물들을 가지고 그녀에게 무엇이든 행할 수 있다. 주어진 시간은 단 6시간. 구경만 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물건을 집어 든다. 처음에는 장난삼아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리거나 꽃을 건네던 사람들. 시간이 지나면서 키스를 하거나, 그녀를 눕히고 은밀한 곳에 손을 대는 사람들이 생긴다. 결국 면도날로 그녀의 옷을 찢고, 심지어 상처를 내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이렇게 되는 데는 6시간이면 충분하다.
왜 그런가? 그녀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사람, 즉 ‘아무나’이기 때문이다. 6시간 이후에도 나와 엮일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다. 퍼포먼스는 그 아무나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6시간 이후까지 퍼포먼스가 이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어떤가? 그녀가 만약 6시간 이후에 동지가 되거나 적이 되어야 한다면? 지금은 비록 아무나이지만 6시간 이후에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자기 앞에 놓인 물건을 고를 때부터 신중할 것이다.

왜 그럴까? 적과 동지 앞에서 나는 우선적으로 당할 것을 생각한다. 그들은 나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이익을 줄 수 있고, 나는 그것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나는 다르다. 아무나로부터 나는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다. 받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당할 것도 없다. 아무나는 앞으로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당하는 사람이 아니다. 받는 사람도 아니다. 오로지 손해를 입히거나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 즉 주는 사람이 된다. 오로지 주기만 하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해가 되었건, 호의가 되었건 상관이 없다.
주기만 하고 받을 수 없는 관계. 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관계. 그런 관계는 사람들을 선하게도 만들지만 악하게도 만든다. 적과 동지로 둘러싸인 삶에서 나는 내가 보기에 선하다고 믿는다. 나는 당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줌도 안 되는 적과 동지를 걷어내면 나는 온통 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더구나 해를 입히는 사람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아무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혹은 누구일 수 있는지를 항상 생각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나가 생각하는 내가 중요하다.
그것이 적과 동지만 바라보고 사는 삶에서는 불가능하다. 내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을 아무나들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절망적인 것은 너무나 많은 적들 때문이 아니다. 오로지 동지와 적을 색출하는 데만 관심을 갖고,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더 절망적이다. 그들은 아무나 앞에서 함부로 잔인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둔 밤 골목길에서 뒤에서 오는 발소리가 나를 두렵게 한다면, 앞서가는 사람에게는 나도 그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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