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3월 24일 서울 선비의 도성 답사 / 노관범
- 한국연구원

- 10월 30일
- 3분 분량
때는 임술년 2월 정축일, 그러니까 1862년 3월 24일이었다. 절기로는 춘분 무렵의 어느 봄날, 미시(未時)부터 인정(人定)까지 오후 내내 봄비가 내렸다. 측우기로 측정된 강우량은 1푼, 곧 2mm를 가리켰다.
이 날 서울 선비가 북부 순화방 집을 나섰다. 선비의 나이 스물 셋, 한창 성균관의 시험에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를 식히러 나들이를 나온 것일까. 경쾌한 발걸음은 이윽고 돈의문에서 멈추었다.
돈의문, 곧 서대문이 서울 도성 순행의 출발점이었다. 순행을 시작한 선비는 걸어가면서 성곽 너머를 보았다. 길마재 승전봉이 눈에 들어왔다. 길마재 승전봉은 구경 가기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 올라 탁 트인 시선으로 사방을 보는 재미란.
승전봉 등반은 특히 겨울이 좋았다. 동쪽으로는 성곽 안팎의 누대와 골목이 환히 보이고 북쪽으로는 도봉산과 삼각산의 아름다운 설경이 빛나며 서남으로는 얼어붙은 강물이 푸른 유리로 화해 있었다. 1820년 1월 2일 김조순의 목격이다.
하지만 선비의 마음은 근심으로 덮였다. 금석지감(今昔之感)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인조 치세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생각했을 것이다. 길마재 승전봉은 조선 관군이 반란군과 싸워 승리한 곳이었지만 잔여 세력이 후금에 망명했고 세 해 지나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 무렵 서울에는 지방 소식이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임술년 2월의 조선은 진주 민란을 겪고 있었다. 평시라면 승전봉에 서린 역사 사적을 옛날 이야기로 흘려도 그만이었겠지만. 어쩌면 현실의 민란과 역사의 내란이 마음 속에서 교차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이윽고 선비의 발걸음은 호유암(虎踰巖)을 지났다. 호랑이가 뛰어넘는 바위라는 이름에 걸맞는 험한 산세 속에서 곡성(曲城)에 올라 운 좋게 방석 같은 바위를 만났다. 마치 서안에 앉아 여지도(輿地圖)를 보는 기분으로 보았다는 서울 모습, 인상적인 장면으로 각인되었음이 틀림없다.
다시 선비의 발걸음은 창의문, 숙정문, 혜화문, 흥인지문, 그리고 광희문을 차례로 지났다.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의 도성 성벽, 그는 생각에 잠긴다. 성벽의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아 성 밖에서 성 안을 엿볼 수 있고 심지어 성벽을 넘어갈 수도 있겠구나. 정녕 외적의 침입은 없을까? 만일의 염려는 없을까?
다시 광희문을 지나 힘들여 전진하며 잠두봉에 올랐다. 잠두봉의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고 주변에 교목이 울창했다. 선비는 이곳에서 남북을 조망했다. 북쪽으로 백악이 있고 남쪽으로 대강(大江)이 흐르는 모습을 조망할 수 있는 이곳, 그는 조망의 아름다움으로 치면 잠두봉과 곡성이 서로 막상막하라고 평했다.
이윽고 도성 순행은 내리막을 향했다. 숭례문, 소의문, 돈의문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그는 특별한 감상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돈의문을 내려와 이번에는 서쪽으로 경기 감영에 갔고 동쪽으로 흥인지문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관왕묘에 갔다. 서울 답사의 종점이었다.
선비는 이 날의 답사를 총평했다. 돈의문 서쪽은 평탄하고 험난하지 않았다. 호유암 북쪽은 험난하고 평탄하지 않았다. 숙정문 동쪽은 평탄함이 많고 험난함이 적었다. 광희문 남쪽은 험난함이 많고 평탄함이 적었다. 잠두봉 서쪽은 험난하지 않고 평탄한 데를 지나 평탄하다 험난한 데를 지나 험난하다 다시 평탄한 데로 이어졌다. 험난과 평탄이 어찌 이리 가지런하지 않은가.
이것은 어떤 교훈처럼 보였다. 사람 사는 세상의 일도 이와 같지 않은가. 천만번 변화해서 무상하기 짝이 없는 세사를 미리 보여주는 것 같지 않은가. 그는 다소 비장한 마음으로 이 날 하루를 돌아보는 듯했다. 어쩌면 날씨 탓일 수도 있었다. 바람 불고 비 오는데 옷이 모두 젖었다. 그는 그 차림으로 저녁에야 귀가했다.
집에 오자 부친이 보낸 전갈을 발견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구경 가는 건 날 좋은 때 가야지 이렇게 추운 날 비바람 맞으며 옷도 신도 다 젖었는데 좋더냐. 그럴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을 학업에다 옮겨 용감하게 전진하거라. 아무 걱정 없겠다.
부친의 걱정은 기우였다. 선비는 열흘도 지나지 않아 성균관의 삼일제(三日製)에서 상격(賞格)에 들어 『규장전운(奎章全韻)』을 하사받았다. 그는 그 전 해 구일제(九日製)에서도 상격에 들었으니 아마 자신감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시험을 앞두고 비바람을 맞으며 서울 도성의 순행을 감행해야 했을지는.
선비는 세 해 지나 사마시에 합격했다. 열두 해 지나 섣달 도목정사에서 건릉(健陵) 참봉이 되어 이듬해 정월부터 2년 반을 건재(健齋)에 왕래했다. 건릉은 정조 임금의 왕릉이었다. 그는 근무 기간의 절반이 입직인데 빠진 적이 없다고 자부했다.

근무 기간 막바지에는 일복을 만났다. 정조 임금이 축조한 만년제(萬年堤)의 우선정(藕船亭)을 보수하고 건릉의 능지(陵誌)를 편찬하는 작업이었다. 모두 수원 유수(留守)의 협력으로 원활하게 마쳤다.
그는 두 해 지나 경과(慶科) 별시 초시에서 합격했다. 다시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1등 제3인으로 참방하고 최종적으로 전시(殿試) 병과 제13인으로 급제했다. 그는 ‘입격 유생’에서 ‘신급제’로 칭호가 바뀌었다. 서울 도성 답사를 다녀온 임술년에서 스무 해가 지난 임오년이었다. 이듬해 그는 마흔 넷의 나이에 조선 정부의 새로운 기구에 들어갔다. 이름이 길고도 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라는 곳에.
그는 젊은 날 도성 순행을 마치며 험난과 평탄을 생각했다. 그 후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험난한 인생이었을까. 평탄한 인생이었을까. 험난한 역사 속에 평탄한 인생이 있었을까. 그는 노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스스로 연보를 정리했다. 연보는 나이 칠순이 되는 1909년에서 멈추었다. 국가 멸망보다 자기 인생을 먼저 종결시켰다. 도성은 어땠을까? 고종 퇴위 후 이완용 내각의 ‘성벽 처리’ 포고에 따라 도성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자찬 연보를 완성한 날 그는 젊은 날의 도성 순행을 추억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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