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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바둑철학의 모범을 보다: 장강명, 『먼저 온 미래: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 서울: 동아시아, 2025 / 박우석

인터넷이 제공하는 인상 비평 [印象批評]의 사전적 정의가 옳다면 모든 서평은 필연적으로 인상 비평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작품으로부터 받은 개인의 인상에 근거를 둔 주관적 비평”이 아닌 서평을 얻기는 불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고 예외적인 만큼 다수의 서평을 얻는 행운을 누린 책에 대해 뒷북치듯 또 하나의 인상 비평을 추가하는 일은 시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포기하지 않은 까닭은 문제의 범상치 않은 책이 철학적으로 바둑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위키백과가 “박우석은 대한민국의 철학자이다. 바둑 관련 저술 활동으로 알려져 있다”라는 단 두 문장으로 나를 소개하고 있으므로 의무 방어전 치르듯 나는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이 책을 바둑철학으로 읽는 관점은 오래 전에 『바둑철학』이라는 책을 냈을 뿐 아니라 몇 달 전 『논리학과 인공지능 바둑』이라는 후속작을 내기까지 한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 유일무이의 선택지다.1) 따라서 문제는 아주 분명하다: 장강명 작가는 문제의 저서에서 훌륭한 바둑철학을 선보이고 있는가?

     

얄궂기는 하지만, 대단히 기쁘게도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 물론 아귀 같은 비판자들의 공격을 원초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최소한 박우석의 바둑철학보다는 월등히 낫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사족을 달아두는 일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 글을 쓰기에 앞서 페이스북에서 장 작가의 책 광고와 다수의 서평 기사들을 여기저기 분주하게 실어 날랐다. 특히 내가 만들고 관리해 온 “번역사랑”에 그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영어를 비롯하여 불특정 다수의 외국어로 번역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내 생각을 암묵적으로 표명한 것이 정황상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래의 논의는 사족에 사족을 다는 데 불과하다. 장 작가의 책이 훌륭한 바둑철학을 선보이고 있다는 주장의 논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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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도 없고 실명조차 알지 못하지만 존경해 마지않는 페이스북의 철학자 QualiaMind님의 촌평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자. 그는 장강명 작가가 책의 47쪽에서 “소설을 쓰는 데 필요한 게 창의성이든 문학성이든 뭐든 간에, 그걸 인간만 가질 수 있다고 말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하듯 진술하면서 아무런 근거도 전거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2) 그런데 QualiaMind 님은 여기서 X라는 주장의 근거를 대라는 요구에 대해 “X라는 주장의 근거가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의 근거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거증 의무가 어느 쪽에 있는지도 아리송하고, 너도 마찬가지(Tu quoque) 오류가 범해지고 있는지 여부도 따져봐야 할 것 같다. QualiaMind님이 “어떻게 인공지능을 논하면서 마음철학/의식철학/인공지능철학 책은 단 한 권도 인용 참조하지 않은 것일까?”라는 기선제압용 질문으로 포문을 여신 까닭에 나로서는 그런 맥락에서 위에 소개한 바와 같은 비판을 하시는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어쨌거나 QualiaMind님이 장 작가님을 어엿한 철학자로서 진지하게 상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흥미롭게도 QualiaMind님은 장 작가님의 저서에 대한 김재인 교수의 호평을 소개하고나서 자신의 소감을 제시하셨다. 최근 인공지능 관련 도서의 홍수 속에서도 군계일학격인 존재인 김재인 교수의 촌평은 다음과 같다:

     

•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AI 기술을 성찰한 르포르타주. 글솜씨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아주 훌륭함. 마치 훌륭한 다큐멘터리 영상물을 보는 듯, 연출 겸 나레이터가 한 몸이 된 작가의 모습이 느껴짐.

• AI에 대한 철학, 예술, 교육 등을 다룬 책을 몇 권 쓴 입장에서 보면, 장강명 작가의 주장 하나하나에 반론을 제기해야 할 듯.

• 철학적 깊이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 그러나 철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9, 10장의 물음에 답해온 역사가 있음. 나중에 글로 정리해드릴 예정.3)

     

김 교수가 약속을 벌써 지켰는지 모르지만, 그의 소감은 일독 후 내가 느꼈던 바와 대동소이하다. 중요한 사실은 QualiaMind님과 마찬가지로 김 교수 또한 장 작가를 진지한 철학적 토론의 상대로 대우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 작가의 저서를 “철학”과 “인공지능”이라는 관점에서 주목해야 할 이유는 QualiaMind님과 김재인 교수가 충분히 제시했으므로, 이제 “바둑철학”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도록 하자. 장 작가가 최소한 나보다는 훌륭한 바둑철학자라는 점은 나에게는 너무도 자명한데, 왜냐하면 장 작가의 책 앞에서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지기 때문이다. 명색이 바둑철학자인데 알파고 충격이 들이닥친 후 10년이 다 되어가는 마당에 내가 한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인공지능 바둑에 관해 제법 여러 편의 논문을 쓰고 책을 내기까지 했지만, 나는 이제껏 “바둑철학”과 “인공지능 바둑의 철학”을 한갓 구호로 떠벌이기만 하지 않았는가? 그 반면에 장 작가의 책을 보라! 이 책은 지닌 장점이 너무 많아 어떤 면을 강조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서평자를 뷔리당의 당나귀로 만들 위험이 있다.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누구라도 동의할, 그러나 그 의미를 충분히 음미하기에는 이르지 못하곤 하는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사실을 두서없이 적시하고자 한다.

     

알파고의 출현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정부까지 나서서 인공지능 시대의 도래에 호들갑을 떤 사례를 우리나라 말고 달리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기이한 것은 장 작가에 앞서 인공지능 시대가 활짝 열렸다는 점을 만방에 알린 일등공신이 바둑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사례가 실질적으로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 관련 도서가 범람한다고는 하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바둑에 초점을 맞춰 인공지능 이야기를 펼친 사례가 도대체 어디 있는가? 인공지능 전문가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우후죽순격으로 인공지능 관련 학과를 대학에 신설고 연구재단을 필두로 인공지능 연구에 몰아주기식 투자가 이루어지는 동안 세계 유일이라 자랑삼던 명지대학교 바둑학과는 폐과되었다.

     

인공지능 관련 도서의 홍수라고는 하지만, 정작 인공지능 전문가가 집필한 전문적 연구서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uman/Computer Interaction: HCI)이라는 주제 아래 놓일 책들이고, 저자들 중 컴퓨터과학과 인공지능을 전공해서 학위를 취득한 사람은 십분의 일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대뜸 이런 의문이 샘솟는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상호작용의 첨단 학문의 핵심 주제라면서 왜 인공지능과 가장 빈번하게 열정적으로 상호작용해 온 바둑인들에 주목하지 않는가? 하루 종일 24시간 바둑TV를 시청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리는 나라에서 인공지능을 스승 삼아 불철주야 절차탁마한 기사들의 경기를 관전하고, 거의 전적으로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해설자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우리나라의 천만 바둑인 아닌가? HCI를 넘어 HRI(Human/Robot Interaction: 인간/로봇 상호작용)을 연구해야 하는 시대에 청소부 로봇에 이어 등장한 바둑두는 로봇과 그 누구보다도 더 활발하게 상호작용하고 있는 사람이 바둑인 아닌가? “먼저 온 미래”라는 책 제목은 간결하게 핵심을 짚었다는 점에서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작명이었고, “AI 이후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는 부제는 바둑인을 가리킨다는 점이 분명한 만큼 장 작가의 착안점과 형세판단은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전국 백일장하듯 쏟아져 나온 서평들은 한결같이 이 책을 쓰기 위해 저자가 수십명의 프로바둑기사와 바둑학자를 인터뷰했다는 사실을 보고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부연 설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콧대 높은 프로기사 사범님들이 아무나 만나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주는가? 자문료나 지도비는 내지 않더라도 식사비나 소주값은 지불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서너 명도 아니고 수십명의 프로기사와 친분이 있는 아마추어 바둑인이 어디 흔한가? 도대체 장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프로기사들을 인터뷰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실행에 옮겼고,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는 출판계 상황에서 속된 말로 “요즘 잘 나가는” 유수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까지 했는가? 장 작가가 언론인 출신이고, 이미 상당한 애독자를 확보한 유명 작가라고 해도 이 책은 정말 탁월한 설계자의 기획과 작전에 따라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탄생한 작품이라 짐작된다. 잠시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을 장황하게 지적한 까닭은 아마도 참을 수 없는 질투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왜 65년이 넘는 내 바둑인생을 통해 구축한 바둑인 인맥을 총동원하고, 바둑학회 회장의 알량한 권위까지 내세워 프로기사 수십명을 강제동원함으로써 취득한 생생한 인간/인공지능 상호작용 체험담에 바탕을 두고 불후의 고전이 될 운명인 책 한 권 쓰지 못했는가? 이토록 회한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바둑을 통해 배우고 익힌 “인(忍)의 기도(棋道)”를 되뇌면서 질투심을 숨기는 까닭은 장 작가의 책에서 발견되는 고뇌의 흔적이 너무도 역력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학 교육에 실망하고, 좌절하고, 자조하고, 체념한, 그 징그러운 대학교수 생활이 종지부를 찍은 지도 어느새 반년이 넘었다. 허울 좋은 논술 교육의 귀결인 천편일률적인 학생들의 보고서를 채점해야 하는 고역을 면한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챗GPT, LLM,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에 학생들의 글을 평가해야만 하는 의무를 짊어진 오늘 현역 교수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하며 쾌재를 부른다. 객관적 평가를 위해 형식적으로 소환되는 시의성, 일관성, 창의성, 완성도, 문헌 숙지도, 응용 가능성 등등의 기준을 따져봐도 “저자의 지적 고뇌의 깊이”만큼 신뢰할 만한 것은 따로 없을 것 같다. 고뇌의 흔적을 발견하고 감식하는 능력이야말로 오랜 경험을 통해 축적된 평가자의 특출한 재능이 아닐까? 그렇다면 장 작가의 책 어디에서 그의 고뇌의 흔적들을 찾아내고, 그 단서들로부터 연결고리를 추적하여 끝내 감동적인 서사로 재구성할 것인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숨길 것인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문제는 아마도 신에게조차 어려운 문제가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사랑받을 책을 쓰되 못내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내밀한 진실을 어떻게 숨길 것인가? 알파고 충격 이후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나치게 뜸을 들이 장 작가의 노작의 창작노트는 어쩌면 타인에 의해 한눈에 간파될지도 모른다. 오래 뜸을 들일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넉넉히 짐작할 만하다. AI에 의해 사후세계를 미리 경험한 바둑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낭송하기 위해서는 용의주도한 전략에 따라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을 통해 상전벽해(桑田碧海)되는 세상을 치밀하게 해석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無)로부터 창조할 수는 없으므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프로기사들을 인터뷰하는 데서 출발하여 바둑학 학자들로 전선을 확대하고, 결국은 모든 개별 학문분야들을 참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생각이 무르익고 태아가 꼴을 갖추기 시작할 무렵 저자는 놀라운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소크라테스형이 옳았다.

     

나훈아형의 소크라테스 해석에는 치명적 오류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결코 툭 내뱉지 않았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통해 우리는 그 말을 발화하기에 앞서 소크라테스가 오랫동안 델포이의 신탁이 틀렸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소위 지식을 지녔다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 집요하게 문답법을 시전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무지를 자백하게 만들었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 작가는 소크라테스를 흉내내어 알파고 출현 이전 권위의 화신이었던 프로 바둑 기사 수십 명을 인터뷰했다. 프로기기사 사범님들 한 분 한 분과의 인터뷰가 모두 다 독특하고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중에는 이호승 사범님이나 이다혜 사범님의 경우처럼처럼 여러 차례의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도 있고, 이메일을 통해 피드백이 계속된 사례도 있다. 그러나 한마디로 장 작가는 그들 또한 인공지능이 선사한 미래 체험의 의미에 대해 무지하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든가 소우주라는 생각은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 왔다. 이런 생각이 일리 있는 것이라면, 바둑학(Go Studies)이 지극히 다양한 학문 분야들의 공조와 융합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바둑으로부터 출발하는 장 작가의 자유분방한 지적 모험 또한 자연스럽게 바둑학의 여러 분야들에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 쟁점, 개념, 그리고 이론들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 성경책을 집어던져 펴쳐진 페이지를 읽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방식을 차용해도 장 작가의 책으로부터 “복기”(p. 64), “흉내내기”(p. 75, 5 장), “기풍”(104, 118, 124), “기세”(p. 28), “바둑은 예술인가 스포츠인가?”(p. 173 이하) 등 바둑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알찬 논의들이 발견된다. 장 작가가 이 시점에서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들과 저명 바둑 평론가 등 바둑 전문가들로 전선을 확대한 결과를 조감할 수 있다. 그들과의 교류가 인터뷰만으로 끝날 수 없었다는 점은 지극히 당연하다. 비록 직접 인용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피하고 있지만, 장 작가는 힘이 닿는 한 그 바둑 전문가들의 저서, 논문, 기사 등을 섭렵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문헌 조사를 통해 장 작가는 기풍 문제에 관해 관해 극소수의 예외를 빼고는 참고할 만한 기존연구가 희소하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4) 한편 “바둑이 예술인가 스포츠인가?”처럼 논쟁적인 주제의 경우 기존연구가 도달한 수준에 크게 실망했을 수도 있다.5) 그리고 쉽게 예견되듯, 장 작가는 소크라테스가 옳았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바둑학자들 또한 먼저 온 미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탐구가 바둑인들의 사태 인식에 국한될 수 없다는 점을 절감한 장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놀랄 만큼 광범위한 분야의 지식 체계들을 참조했다는 사실은 책 전체를 통해 무수한 사례를 들어 증언할 수 있다. 박학다식한 강호제현의 눈에 장 작가의 학문의 폭과 깊이가 시원찮게 여겨질 가능성은 물론 활짝 열려 있지만, 나로서는 최소한 그의 독서량이 나보다는 훨씬 방대하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주목하고 강조하고 싶은 점은 장 작가가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취한 탐구한 방식이 올바른 궤도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장 작가는 자신이 소크라테스의 후예임을 절감하고 있다.6)

     

장 작가의 성취에 고무되어 바둑학자, 인공지능 전문가, 과학자, 공학자, 인문사회과학자, 그리고 예체능 분야 학자, 문인 등 예술가, 그리고 넓은 의미의 철학자가 한 자리에 모여 밤새워 담론의 향연을 벌인다고 하자. 이 조합은 대뜸 불확실 미래에 생존하기 위해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특명을 부여받은 어벤져들의 심야 비밀 집회를 연상시킨다. 20여년 전 내가 “바둑”이야말로 21세기를 여는 키워드라고 바둑철학 뒷표지에서 예언한 바가 바야흐로 실현되는 형국이다. 이 회의의 안건으로 상정될 만한 중요한 주제들이 거의 모두 장 작가의 책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독법을 다시 한번 차용한다면, 예컨대 “권위”(p. 67), “생각하는 기계”(p. 68), “신진서”(p. 70), “인간의 바둑”(p. 76), “인공지능의 영향”(p. 80), “평평함과 공평함”(p. 108 이하), “제비와 비둘기”(p. 108 이하), “기준이 없는 개념, 인공지능, 블랙박스”(p. 130), “인공지능과 인간이 협력하는 시스템”(p. 136), 그리고 “학습”(p. 173) 등등의 중요한 의제가 지목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발제자로 나선 장 작가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핵심 과제(p. 49)와 자신의 가설(p. 89)을 제시하는 실루엣 배경에 암투병 중인 사랑하는 아내의 병상이 떠오른다.

     

실용주의가 재조명되는 세태 속에서 X의 쓸모를 논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렇다면 발제자인 장 작가의 책의 쓸모를 논의하는 것이 제법 유용할 것 같다. 당장의 쓸모는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가 경쟁적으로 연말에 공로상을 장 작가에게 수여하면서 모처럼의 바둑 특수를 노릴 수 있다는 데서 찾을 만하다. 부족한 소견이지만, 좀 더 중요한 용도는 그의 책이 최소한 “바둑학 입문(또는 개론)”, “바둑철학”, “인공지능과 철학”, “인공지능과 바둑”, “인간/인공지능 상호작용” 등등의 제목으로 대학 교양과목이나 선택과목, 그리고 전공필수과목 강의의 주교재 또는 부교재로 활용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데서 찾아진다. 더욱 중요한 쓸모는 최근 신설된 국가인공지능전략회의 소분과들이 장 작가가 제기한 문제들 중 보다 더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학술적 문제를 내걸고 학술대회를 여는 일이다. 이 중에는 앞서 거론한 QualiaMind님과 김재인 교수의 비판과 지적에서 출발해서 주석 작업도 더 꼼꼼히 하면서 보다 심층적인 논의를 모색하는 자리도 있게 마련일 것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소크라테스가 내뱉었다는 말을 반추하며 장 작가가 시작한 탐구는 아마도 도돌이표와 괴델수를 동시에 사용하며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사족>

장 작가의 책 표지는 Kyungjun Lee의 예술작품인 사진 “Urban Pattern (2015, Seoul)”을 박연미님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내 눈에는 사진 속 고층건물의 창문 하나하나가 눈물방울로 보인다. 그 눈물방울 모나드 속에는 사랑하는 이에게 왕방울 만한 다이아몬드를 선물하고 싶은 초라한 사내가 웅크리고 있다.

          

미주

1)박우석 (2002), 『바둑철학』, 서울: 동연; 박우석 (2025), 『논리학과 인공지능 바둑』,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2)QualiaMind (2025), “왜 장강명 작가의 인공지능론을 비판할 수밖에 없는가? ―이공계 학자들의 강인공지능론에 친화적인 소설가의 인공지능론이라니”, https://www.facebook.com/share/p/1aBNPNucF3/ (8월 31일)

3)김재인 (2025), “회복하는 자”, https://www.facebook.com/share/p/18upriiNGi

4)정수현 (2017) “바둑기술의 이론 구조화 모색”. 「바둑학연구」 14(1), pp.13-27.

5)이 문제에 관한 논의를 요약해서 정리한 내용을 다음 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남치형 (2021), 『바둑의 사회와 문화』, 서울: 명지대학교 출판부. 그러나 장 작가는 6장의 미주를 보면 인터넷 자료들까지 망라한 그의 문헌조사가 좀 더 철저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6)장 작가가 거침없이 여러 학문분야를 넘나들며 적절한 지점에서 영감을 줄 만한 전거를 제공한다는 점은 찬사를 아끼지 말아야 할 일이다. 내 경우 장 작가가 공리적 집합론의 창시자인 수리논리학자 에른스트 체르멜로를 길게 논의하는 데 (p. 74) 감복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체스 레이팅 시스템의 선구적 연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장 작가의 엘로(Elo) 레이팅 시스템에 관한 시의성이 뛰어난 논의 (pp. 95-6)는 그런 성실한 공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박우석 (한국과학기술원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명예교수) woosukpark@kaist.ac.kr
  박우석 (한국과학기술원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명예교수) woosukpark@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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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준 (한국연구원 원장)

김동규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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