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카페사회 / 김보슬

여가통치성

“바쁜 현대인의 필수품”, “바쁜 현대인의 아침 식사로 무엇 무엇”이라고 할 때처럼 현대인은 바쁘다는 말로 수식되기 일쑤다. 그런데 과연 현대인만 바쁠까? 르네상스나 중세, 선사시대 사람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시간에 쫓겼을 것이다. 현대인이 자동화 기계의 힘을 빌어 처리하는 많은 일들을 선조들은 일일이 인력으로 대응했다. 그러니 현대인이 유독 고단하다고 신세 한탄을 하기 전에 다시 생각해 보자. 치약 튜브처럼 짜내어지는 우리들의 애처로운 처지는 막중한 임무와 노동 강도에 기인하는 게 아니리라. 과거의 인간에 비해서 태평하게 안식할 곳을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리라. 혹시 안식의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 것 아닐까? 과거의 근육노동을 보상하는 휴식은 단잠이었을 테지만, 오늘날의 신경노동에는 보상은커녕 ‘불안’이라는 보복이 따르지 않던가. 분명 선조들보다 손발은 덜 바빠졌을 텐데 한시도 경계를 늦추기 어렵다. 워라밸(워크라이프밸런스, work life balance), 휴가, 여가 같은 말들이 일상화되어 있는데도 그걸 반납하라는 지시로 들리는 게 예사다.

여가통치성, 이것은 거칠게 요약하면 여가를 통해 시민의 삶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경은(2021)+에 따르면 여가통치성은 첫째, 통치자가 대내외적으로 정치적 지지를 구축하거나 정치적 입지를 공고하게 하게 위하여 여가를 제공한다는 개념이자, 둘째, 여가공간을 활용하여 시민이 강압적인 통치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지 않으면서 신자유주의적 경쟁 원리를 가동시켜 도시를 파산으로부터 보호하는 전략이다. 그렇다면 통치는 여가공간의 가면을 쓰고 태연자약하게 시민의 일상을 촘촘하게 죄어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우리는 내리막길의 자전거처럼 멈출 줄 모르는 디지털 가속화 위에 올라타 있다. 투잡, 쓰리잡을 넘은 n잡러들의 등장과 더불어 카카오택시나 딜리버리서비스 등의 영역에서 시간 날 때마다 일하는 것은 인간의 이동, 인간의 노동 판도를 바꾸고 있다.

그래서일까. 여가의 스펙트럼이 넓어진 대신 여가와 노동의 경계가 불명확한 방향으로 삶이 분화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노트북이나 태블릿PC를 들고 다니면서 회의도 가고, 커피도 마시고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이런 복합적인 활동을 뒷받침할 공간이 별로 없는데다가 아파트나 오피스텔이 대다수인 주거 공간의 설계가 단조롭고 일률적인 탓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갑갑하다. 사정이 이러해서 카페를 소비하는 인구가 많아졌다. 도서관은 숫자가 좀 부족해서인지 경유노선 상에 있는 때가 드물다.

카페

그리하여 그 기능을 카페가 떠안았으니 대한민국 카페는 공간렌탈 영업인 셈. 이탈리아에서는 1-2유로 하는 에스프레소를 바에 선 채로 훌쩍 마시고 나가는데, 한국에서는 자리를 차지하고 노닥대며 마시는 메뉴다. 4-5천 원짜리 한국형 에스프레소, 나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대가 포함된 가격일 것이므로 상인의 입장도 이해한다.


[사진 1. 이탈리아의 바, 선 채로 커피 마시는 사람들.]

이렇게 된 김에 차(茶)도 떠올려보자. 시중에 저가형 커피숍(ㅃ다방, M커피 등)은 있는데, 저가형 찻집은 극히 드물다.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카페에서 주문하는 차 가격은 웬만한 커피 값을 능가한다. 희한한 일이다, 카모마일 차가 왜 커피보다 적게는 오백 원, 많게는 천 원 이상 더 비싼 것일까? 하다못해 커피처럼 원두를 갈고 우유 스팀을 내는 기계가 쓰이는 것도 아닌데…. 고물가시대 비판이 아니라 자매종목 간 비교가 그렇단 것이다. 커피 산업은 차 산업에 비해 원료 공급가를 낮추기 쉬운 구조라는 의미일까? 기후, 노동임금과 같은 원산지의 사정, 그리고 국제통상, 환율, 세관 — 생산과 유통 과정의 면면을 열심히 머릿속에 그려 본다. 동네 수퍼마켓의 설록차, 현미녹차는 그리도 저렴한데 카페에 입점되는 티백의 가격에는 흠칫 놀라 실 끝에 달린 태그를 가만히 살핀다. 브랜드 값? 이거 비싼 브랜드일까? 흔한 Ahmad 정도의 상표인데, 카모마일 한 잔에 오륙칠천 원이면 어째 석연찮다. 어차피 자릿세라면 아메리카노가 단연 만만하고, 그래서 누군가에게는 카페 좌석 이용권을 얻기 유일한/최적의 선택지일지 모른다.

아무래도 카페인은 기호식품이 아닌 것 같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위장관과 혈관을 타고 들어와, 신체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는 통치력의 촉수인 것만 같다. 이러다 내가 무한경쟁 망령에게 점령당하는 것이 아니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서는 잠을 물리치고 더 많이 야근하고, 더 오래 깨어있어야 한다. 더 길게 각성하고, 더 오래 분주해야 한다. 그렇게 벌어서 또 커피를 사 마신다. 전화도 받고, 업무도 처리해야 하지만 세련되고 호젓한 분위기도 내고 싶은데, 그럴 만한 장소가 필요하다. 독신가구는 비좁은 1인 공간이 지루해서, 독립을 허락 받지 못한 젊은 여성들은 자기만의 임시 공간을 찾아서, 금전적 이유로 부모 밑에서 사는 사회초년생들은 독립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또 누군가는 초고속 인터넷이 완비된 적요한 일터가 필요해서 저마다 카페에서 그 대책을 마련한다 — 커피를 마신다. 글자 그대로의 커피, 그리고 카페가 사회와 경제로 나아가는 하나의 관문이 된 것은 아닐까.

키치관광

도시구조, 주거문화, 일자리, 디지털 기술 등 우리 사회를 다방면으로 엿볼 수 있게 하는 만큼 카페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공급과잉 시장에 발을 들였다가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폐업하는 업자도 많지만) 풍부한 수요에 대한 기대는 카페의 인테리어와 메뉴를 고급화시키는 동시에, 고급화된 카페는 다시 긴급히 갈 곳을 찾는 이들의 대안공간이 된다.

실용적 필요성과 감성적 유희가 혼재된 이 같은 카페 소비는 키치적 관광의 행태와도 유사하다. 키치적 관광은 키치적 속성이 드러나는 관광인데, 유예지(2022)++는 “관광대상의 본질적 속성이나 진정성 여부와 관계없이, 대상이 지닌 본래의 가치 이외에 다른 덧붙여진 상징적 가치나 미학적·이국적 이미지를 소비하는 태도”로서 이 개념을 정립하고 제안한 바 있다. 장소의 진정성은 대상의 진품/가품 여부에 달려 있지 않고,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표현하며 실존적 상태에 몰두하는 수용자의 경험에 깃들어 있다는 믿음은 키치적 관광을 뒷받침한다. 남해 독일마을을 예로 들면, “마을 주변의 상업용 건축물은 흰 벽과 붉은 지붕이라는 색채 규제에 맞춰 지어졌을 뿐, 건축 양식은 미국에 더 가까우며 카페나 식당에서 판매하는 음식과 콘텐츠 또한 실제 독일문화와 다르[지만(...)] 관광객들은 독일마을에서 이러한 기호들을 수집하고 여러 번의 사진 촬영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장소 이미지를 포착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자신의 장소경험과 연결시켜 자신만의 내러티브로 블로그에 공유·전파함으로써 독일마을의 장소성을 사회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키치적 관광은 일상에서의 장소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기호와 이미지를 통한 유희, 심미주의적 감성 소비, 구별짓기, 대리만족적 경험으로 요약되는 키치적 관광의 특성은 비단 관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카페 소비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카페를 즐기는 이들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카페에서의 정물, 그곳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사진을 SNS 계정에 수차례 올렸다. 그 자체로는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커피숍 정경일 테지만 그 날의 내 기분, 개인적인 사건들, 독특한 맥락이나 인식과 결합시켜 개별화된 장소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네티즌들이 SNS 포스팅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타인에게 공개·유포하는 이미지와 기호들은 다른 이들에게 따라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며 새로운 키치를 낳는다. 수많은 지방 도시들은 ‘인스타그램’에서 힛트를 친 서울의 카페를 모방한다. 그리고 서울은 다른 국제도시들의 위상에 뒤질세라 파리 마레지구의 ‘부트카페(Boot Cafe)’를 들여오고, 멜버른의 브런치 카페를 따라하며, 밀라노의 커피바를 흉내 낸다. 우리는 대상의 진정성을 문제 삼지 않는다. 거기서 어떤 사진을 연출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지, 어떤 경험을 통해 나만의 기억을 남기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사진 2, 3, 4, 5. 이번 여름 나의 SNS 계정에 포스팅 한 카페 흔적들.]

히프노스

짝퉁이 짝퉁을 낳는다. 노력에 따른 결과이니 당연하다. 파리를 베낄수록 파리의 짝퉁이 되고, 서울을 베낄수록 서울의 짝퉁이 될 뿐, 그 지역의 개성은 사라지고 만다. 인스타그램에서 이목을 끌었느냐—즉, 좋아요, 팔로우, 해시태그를 많이 이끌어냈느냐—의 여부로 흥망이 갈리는 산업으로서의 카페는 지역사회의 키치를 대표하는 공간이 되었다. 점포 임대료와 무관하게 가격마저 서울을 본 딴 탓에 지방 카페의 커피가격은 상대적으로 더 높다. 그저 유행하는 실내디자인으로만, 외관상으로만 ‘복붙’인 것이 아니고, 카페의 존재이유 자체가 ‘복붙’하는 인간의 온상이 된다. 카페인으로 아침잠을 밀어내는 습관과 쏟아지는 저녁잠을 다시 카페인으로 퇴치하는 인간은 그리 오래 버틸 수도, 그리 창의적일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저 잠들지 않는 생산기관일 뿐. 이처럼 키치의 발달은 산업혁명이 낳은 대량생산, 포드주의(Fordism), 현대 소비사회의 구조와 총체적으로 밀접한데, 여기에 3.5차 또는 4차 산업혁명의 총아로 여겨지는 디지털 침략자들까지 가세하여 대량생산 시대 인간의 고충을 지연시키고 있다. 넷플릭스의 CEO 헤이스팅스는 자사의 경쟁상대를 인간의 수면시간이라고 하지 않던가. 워너브라더스 같은 대형 영화배급사나 OTT 동종업계의 왓챠 같은 회사를 제끼고, ‘잠’이 지목된 것이다. 이렇듯 키치와 디지털은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인간에게 여가를 선물했고, 가장 영악한 방식으로 통치성을 띠게 되었다.

해이스팅스는 자신의 라이벌을 히프노스(Hypnos, 그리스 신화에서 잠의 신)로 공식 선언한 셈인데, 잠이야 말로 필수적인 생명활동이면서 궁극적인 여가이지 않을까? 여가가 거기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일 수 있을까? 나는 히프노스의 건재를 기원하며 카페인과 서서히 멀어질까 한다. 여전히 카페를 자주 찾지만 최소 반시간 온전히 농땡이 부릴 각오쯤은 챙긴다. 카페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일은 서재, 사무실, 연구실에서 하는 편이 위기에 처한 여가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으며.

카페사회

2018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에 걸쳐 구 서울역사(驛舍) ‘문화역서울284’에서는 <커피사회>라는 이름의 전시가 있었다. 커피를 중심으로 근현대 문화사와 각종 사회적 관계망을 모아보고 읽어본다는 취지로 열린 전시였다. 회화, 미디어, 사진, 영상, 그래픽디자인, 건축 등의 시각예술 분야를 비롯해 애청곡을 부스에 직접 신청하는 디제잉 퍼포먼스, 콘서트와 바이닐(vinyl) 큐레이션도 만나볼 수 있었다. 각 계에서 당대 최고 인기를 얻는 예술가들이 참여해 큰 화제를 모았고 뜨거운 호응으로 전시 기간이 예정보다 보름가량 연장되었다.


[사진 6. <커피사회> 전시 포스터.]

전시의 제목은 ‘커피’와 ‘社會’의 합성으로 두 단어가 나란히 붙어있으면서도 한글로 음차된 영어와 한자어는 두 언어 간의 간격을 우아하게, 또는 그들 간의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듯하다. 이 전시는 개화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음료가 향토사회에 뿌리내리며 만들어낸 과도기적·혼종적인 문화를 돌아보고, 문학 자료 등의 사료를 기반으로 경성다방들이 문화와 예술과 사회적 관계를 연결시키던 맥락을 제시했으며,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별 다방의 분위기를 복고적 관점에서 재현하기도 했다.

이 전시가 있고 난 후 내게는 오래도록 이러한 생각이 머문다, 이제 커피사회는 막을 내렸고 카페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커피사회가 마시던 ‘커피’라는 이름의 친교, 여유, 낭만 대신 카페사회에서는 같은 이름과 색깔을 가진 각성, 불면, 단절을 마신다. 커피사회에서는 커피라는 물질을 매개로 관계를 유도했지만, 카페사회에서는 형식적으로 음료를 팔면서 사실상 관계(모임) 또는 혼자 있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좌석이라는 물질을 판다. 멋없이 획일화된 카페인을 마시고 나면, 다만 몇 장의 사진이 남아 SNS를 떠돌며 키치를 부추긴다.

아직 여가로서의 커피를 마시며 커피사회를 즐기는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너무 악담을 퍼부었나? 밥 먹고 꼬박꼬박 커피숍에 들러 ‘뜨아(뜨거운 아메리카노)’, ‘아아(이이스 아메리카노)’,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용어로 음료를 주문하면서 무절제한 소비를 일삼고, 일회용 테이크아웃 잔을 받아들고 나와서 마시다가 대충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모습에 건네는 이야기다. 그렇게까지 마셔야 할 이유, 환경을 망쳐야 할 이유는? 생각에 잠길 여유 없이 습관화된 카페인 주입은 진정한 여가나 휴게와 거리가 멀뿐더러, 카페사회의 키치도 활력소가 될 수 있다는 기대마저 거두게 한다.

+ 『도시공원 조성과정을 통해 본지방정부의 여가공간 생산 기제 - 여가통치성 장치 개념을 바탕으로』 (이경은, 2021, 서울대학교)

++ 『장소의 키치화와 키치적 관광의 형성 과정 - 남해 독일마을, 부산 장림포구와 흰여울문화마을을 사례로』 (유예지, 2022, 서울대학교)

김보슬(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 공공예술 MFA)

조회수 74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