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책을 들춰볼 때가 있다. 그때의 심정은 대략 이런 거다. 지금은 21세기 하고도 20년이나 지났고 분명히 극단적인 야만에서는 여러 모로 벗어나 있다. 그런 한편, 열폭과 멘붕의 꺼리들은 어쩌면 또 그리 다채롭고도 풍성한지,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다.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그렇다. 정리가 좀 되었으면 싶고 뚜렷한 비전 같은 게 있으면 더 좋을 거 같고, 그렇다. 가령 한국에서 80년대의 맑스(레닌)주의, 90년대 이후 거의 한 세대를 풍미한 프랑스 철학(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이나 그 뒤 잠시 화제를 모았던 이탈리아 이론(네그리나 아감벤 등) 같은 거 말이다. 요즘은 영 다르다. 스타 사상가나 초강력 진영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를, 세계가 다원화되고 있다는 징표 중 하나로 좋게 본다. 이거 말고도 몇 가지 특징이 더 있는데, 그걸 보면 지금 세상이 크게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감이 좀 온다. 오늘은 이 얘길 해보겠다. 짧은 글이니 이전부터 활약해온 바디우나 지젝 같은 경우는 제외하고 신인상 후보들 중심으로.
1. 사변적 실재론
21세기 새로운 철학의 선두 주자. 칸트 이래 어제까지의 철학(200여년간의 근현대 철학 전체)이 오직 인간의 인식 체계만을 기준으로 구축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자기들은 낡고 편협한 인간중심주의를 폐기처분하러 출동한 특수공작대다. 우선 캉텡 메이야수 대원([유한성 이후] 등)은 수학을 통한 절대 지식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간이 동의하지 않아도, 심지어 인간이 지구에서 멸종하더라도 옳은 지식이 아니냐며. 그레이엄 하먼 대원([쿼드러플 오브젝트] 등)은 세상 만물이 다 자기 방식으로 다른 존재들을 변형시켜 지각한다고 본다. 변형 지각은 인간만의 특별한 짓이 아니라, 바위나 빗물 같은 사물들도 다 그렇게 지각하며 살아간다고. 안 그런 존재들도 극히 일부 있는데, 그건 어디 깊은 곳에 외떨어져 잠자고 있는 사물이라고.
2. 평평 존재론(flat ontology)
이건 특정한 어떤 철학은 아니고 마누엘 데란다가 창발론과 다른 것으로서 제시한 존재론이다. 소위 창발론에 따르면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반면, 평평한 존재론은 부분들과 그로부터 창발한 전체가 존재론적으로 모두 평등하고 또 저마다 특이하다고 본다. 스케일의 크기와 무관하게 세상 만물에는 그 자체로 우열이 없는 것이다. 신유물론자로 분류되는 데란다만이 아니라 하먼, 마르쿠스 가브리엘, 레비 브라이언트 등, 다수의 새로운 철학자들로부터 공감을 확보하고 있다.
3. 사물을 존중함
사물을 존중하는 철학자로 [존재의 지도]의 저자 레비 브라이언트를 빼놓을 순 없다. 천의 고원의 21세기 버전을 의도했나 싶은 이 책에서 그는 기존의 유물론에 물질이 없었다고 비판한다.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 등의 사회사상과 정치사상은 내용의 측면에 피해를 줄 정도로 표현의 측면에 압도적으로 집중했다.”(앞의 책 p.213) 달리 말하자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상가들이 주도했던 “포스트구조주의”는 너무 “언어에 집중함으로써 당대의 현재와 공명할 수 없었다”는 말씀. 반면 그의 존재지도학에 따르면 세상에는 기계들과 이 기계들이 맺는 관계들밖에 없다(기계란 그가 세상 만물을 부르는 이름이다).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에서는 제목 그대로 물질들이 활발하게 생동한다. 수동적인 반작용만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을 벌이는 물질들, 이름하여 ‘생기적 유물론’이다. 나는 (생기론에 반대하는) 물활론자로서, 베넷의 이 책을 격하게 환영한다. 이 두 사람과 비슷한 맥락에서 하먼은 기존의 유물론에 정작 ‘물체’가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물론 인간도 포함)들을 자연과학은 물체 이하의 부분들(원자나 쿼크들)로 환원하고,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은 다른 물체들과 맺는 관계들로 환원한다. 결국 모든 존재는 자체로 존중받지 못한 채 결론에 이르기 전 잠시 스쳐가는 경로에 불과해진다.
4. 신유물론
이러한 반성과 분석은 20세기말, 21세기초의 유물론자들 사이에서도 행해졌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신유물론인데, 딱히 누구누구라고 하기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대부분이 들뢰즈를 주요 선배로 받아들인다는 공통점은 있다. 이전 세대의 사상가 중 왜 유독 들뢰즈일까? 우선 그는 텍스트주의에 과도하게 경도되지 않았다. 둘째 자신의 존재론을 구성해 제시하였다. 셋째 역시나 다른 사상가들에 비해 맑스 혹은 자본주의 비판의 비중이 컸다. 대체로 데란다, 베넷, 브라이도티 등이 신유물론자로 분류된다.
5. 존재론?
방금 존재론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새로운 철학의 다수는 존재론이거나 최소한 존재론을 자기 사유의 일부로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돌아보면 20세기 후반의 진보적 사상들은 정치철학의 성격이 매우 강했다. 그들은 존재론이라는 것이 보편주의적으로, 더 나아가면 절대적인 진리 쪽으로 흐를 것을 강하게 경계했던 까닭이다. 그런 우려가 지나쳤던 것일까? 우리는 오늘날 상대주의와 회의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세상을 겪고 있다. 포스트 트루스 현상은 이런 분위기의 최대 수혜자다. 이런 풍조에 맞서 새로운 철학자들은 절대주의적이지 않은 보편에 대해 주장한다. 존재론 혹은 형이상학이 진보적인 철학, 사상에도 전반적으로 밀려오고 있다. 근본을 사유하면서도 근본주의적이지 않고, 보편을 사유하면서도 절대 진리로 추락하지 않는 길이 모색되고 있다. 이진경의 최근작이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와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인 것도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정치철학적 성격이 강한 저서들을 왕성하게 집필해온 그가, 존재론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하이데거와 대결하며 새로운 존재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6. 새로운 실재론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철학계의 다작 신동이자 베스트셀러 철학책의 저자다. 그의 사유는 일견 너무 소박하고 단순해 보여서 유치하다고 비판받을 때조차 있다. 하지만 그는 지젝과도 공저를 냈고, 생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사이토 고헤이와 함께 작업을 하기도 하는 등, 스펙트럼이 넓은 철학자다. 그의 생각은 비유컨대 이런 것이다. 저기에 백두산이 있다. 그에 대해 북한 사람들이 보는 상이 있고, 남한이나 외국 사람들이 보는 상이 있고, 또 거기 사는 동물들이 보는 상이 있다. 그리고 높이나 크기 등을 포함한 객관적인 상도 있다. 가브리엘은 이 각각의 상들이 모두 실재라고 본다. 단,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 모든 현실을 초월한 어딘가에 절대적으로 옳은 상이 있다는 생각이고(형이상학), 또 하나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야말로 참된 것이라는 생각이다(과학주의 혹은 자연주의). 그가 반대하는 것은 전체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이며, 그가 주장하는 바는 존재론적 다원주의와 존재론적 실재론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상들이 있고 그 모두가 실재적이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상대주의와는 다르다는 게 포인트다.
7. 철학의 풍경과 세상의 표정, 기분, 혹은 건강
대단히 상이한 개성의 이 철학들을 요모조모 깎아서 전체적인 색조를 포착해보자. 첫째, 새로운 철학들은 대체로 이름에 ‘실재론’이나 ‘유물론’처럼 현실의 존재들을 지칭하는 명사가 들어간다. 둘째, 대체로 평평한 존재론을 공유하면서 인간중심주의에는 학을 뗀다(오늘 언급하지 못한 객체지향 존재론이나 [에일리언 현상학], [객체들의 민주주의] 같은 책 제목만 봐도 확연하다). 셋째, 현실의 존재들을 모두 중시하면서 보편적인 이론을 제시하되, 철학의 체계 자체가 과도한 형이상학이나 독단적 교조주의를 불허하도록 구성한다. 넷째, 특정한 철학이 사상계에서 독주하지 못한다. 심지어 ‘존재론적 전회’가 발생한 인류학의 새 흐름도 하나의 사상으로 어엿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 글은 현재 철학이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을 보면서, 동시에 철학자들이 세계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살피려 했다. 이를 통해 지금 세상의 기분이나 건강상태가 얼마간 드러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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