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밤에 나는 칸트의 자기의식에 대한 논문을 읽고 있었다. 잘 읽히지 않았으나, 수업 시간에 발제해야 했기에 밤새워 읽을 심산이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로부터 혹시 이태원에 있느냐고 연락이 왔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어머니는 내 여동생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묻어나왔다. 여동생은 친구들과 이태원에 종종 가곤 했으며, 핼러윈을 즐기러 가기도 했다. 나는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서 어렵지 않게 이태원 거리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날것의 영상은 참혹했다. 연락은 밤늦도록 닿지 않았고, 친척들까지 여동생을 찾았다. 어머니는 자꾸만 안 좋은 생각이 든다고 불안해하셨다. 그럼에도 항상 행선지를 밝히는 아이니, 너무 걱정할 것 없다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이윽고 연락이 닿았고, 친구 집이라기에 우리는 안도했다. 여동생이 나중에 알려주기를, 전화를 받았을 때 어머니는 아주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고 한다.

새벽까지 나는 논문이 잘 읽히지 않았다. 아직 독일어가 낯선 것인지, 글의 논증이 어지러운 것인지, 내 마음이 혼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문장은 거듭하여 흩어지고, 내 번역은 연신 빗나갔다. 칸트는 감성적 다양이 하나의 자기의식 아래 통일되는 한에서만 앎이 성립한다고 말한다. 나는 궁금했다. 그러면 고통 또한 하나의 자기의식 아래 종속하는 한에서만 고통이 되는 것인가. 자기의식이 통일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고통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하지만 고통이 자기의 찢김에 대한 경험이라면, 찢어진 나는 고통을 어떻게 지탱하고 통일하는가. 내가 찢기면 고통 또한 찢기는가, 찢어진 내가 고통이 나를 찢도록 통일하는가, 찢는 고통이 나를 찢어진 나로 통일하는가... 나는 당최 알 수 없었다. 참사 앞에서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이 하등 쓸모가 없어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위대하다는데, 왜 나는 새벽까지 쓸데없이 철학을 붙들고 있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서로 안부를 물었다. 연락이 뜸했던 중고등학교 동창들이 메시지를 보내왔고, 나도 되물었으며, 수업 시간에도 학생들끼리 마주치면 서로와 그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살폈다. 철학과 후배 한 명이 당시에 그 골목에 있었고, 손목 인대만을 다쳤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그 거리에 내가 혹은 내 친구가 누워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참사는, 대형 콘서트에서, 경기장에서, 대학 축제에서,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느꼈다. 그런 점에서 재난은 보편적이다.
증상은 개체의 병리적 구조를 표현한다. 이는 우리가 때때로 아프고, 그 아픔이 내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암시한다는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개체 자체는 처음부터 병리적 구조로 구축되며, 증상은 그 주체의 진리에 다름 아니다. 부연하자면 먼저, 언어는 사물을 살해한다(“모든 규정은 부정이다”). 우리는 언어가 야기하는 상실을 승인하는 한에서만, 언어가 매개하는 일상의 세계 내에 거주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결코 이름할 수 없는 이 상실을, 이름할 수 있는 환상들로 대체해가며 나날의 삶을 꾸려나간다. 이러한 소외의 구조는 병리적이지만, 이는 옳고 그름 너머의 거부할 수 없는 실존 조건을 이루며, 우리의 삶은 언제나 상실을 중심으로 끼고 돈다. 증상이란 그 상실이 일상의 언어 규칙들을 뚫고 현전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진리는 증상적이다.
참사는 사회의 증상이라는 점에서, 참사 또한 사회의 진리를 열어젖힌다. 참사는 상처를 열어젖히는 고통 속에서, 세상은 안전하고 합리적이라는 환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우리는 언어가 매개하는 환상 위에 일상의 터를 잡기에, 환상의 균열은 곧 우리가 믿어왔던 일상의 무너짐이다. 환상 너머에는 차마 이름할 수 없는 끔찍한 공백이 놓여 있다. ‘도대체 왜’라는 공백. 어째서 단지 친구랑 놀고 싶었던 젊은이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어야 했는가. 이 재난 속에서 우리가 상실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것이 의미 있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 상실은 언어 질서 속에 위치 지어져야만 한다. 이름할 수 없고 밝혀낼 수도 없는 상실은, 그저 익명의 공백으로만 남을 뿐이다. 그리고 익명의 공백은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애도는 언제나 특정한 어떤 것에 대한 슬픔이다. 애도는 상실된 어떤 것을 자신의 대상으로 필요로 한다. 그 점에서 상실된 것은 애도의 주체에게 아직 상실되어 있지 않다. 주체는 그 대상을 상실의 형태로 여전히 지니고 있다. 이 상태에서야 비로소 애도가 가능해지는데, 애도란 상실된 대상을 진정으로 상실된 대상으로서 놓아주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애도는 아직 상실하지 않은 상실된 것을 비로소 상실해 내는 노동이다. 애도는 대상을 두 번 잃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떠나간 이의 시신을 기어코 찾아내서, 내 손으로 떠나보내야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애도 기간을 정해주고 그동안 조용히 슬퍼하라고 해도, 애도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도를 위해서는 상실된 대상이 필요하며,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단순히 공백으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언어 내에 위치시킴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번 참사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묻는 것이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는지, 왜 무수한 신고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처가 없었는지, 왜 구호 인력이 부족했는지, 어찌하여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지 묻는다. 관리자들의 무책임과 묵묵부답은, 우리의 상실이 언어화되는 것을 지연시킴으로써 애도 작업을 가로막는다. 언어화되지 못한 상실은 끝내 봉합되지 않은 상처로 벌어져 있다. 그 상처의 불가해한 빈 중심은 차마 쳐다보기 두렵다.
많은 이들이 조급한 말들을 내뱉는 것은 그 끔찍한 상처를 외면하기 위함이다. 흠 없는 사회라는 환상으로 되돌아가 일상을 다시 복원하고자 그들은 초조하다. 사망자들은 스스로 이태원에 갔으니 그 자신의 책임이고, 그들을 말리지 못한 부모 책임이며, 서양 아동들의 축제를 클럽이나 가는 날로 변질시킨 젊은이들의 책임이다. 이렇게 희생자들과 유가족은 사회의 끔찍한 여백을 봉합하기 위한 희생물로서 버려진다. 물론 상실은 사회 속에서 언어화되어야 하나, 그것이 상실을 사나운 말로 뭉개고 가파른 말로 내지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상실을 언어화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의 부재를 언어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10월 29일의 참사는 수많은 말들의 덧씌워짐을 감내하고 있다. 사회는 자신의 살길을 찾으려고 희생자를 다시금 희생시킨다. 어째서 사회는 유가족을 시체팔이란 치욕의 길로 내모는가. 유가족은 사랑하는 이를 애도하기 위해서 정녕 그 시체를 팔아내야만 하는 것인가.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할 길이 겹쳐 있고, 유가족이 그 길을 어떻게 감내해야 하는지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삶은 살아지기에 삶일텐데,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이 어떻게 삶이 되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철학이 여기서 제 역할을 찾는다면, 그것은 상실을 조급하게 메워버리는 저 초조한 말들을 흐트러뜨리는 것일 터이다. 초조한 말들은 재난이 드러낸 공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성급한 노력을 이루고 있다. 반면에 철학은 끊임없이 말을 말로 지워내면서 공백을 말하고자 하는 지난한 참을성이다.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듯이, 철학은 처음부터 앎이란 환상 너머의 공백을 밝혀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일상의 그 어떤 것에도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철학은 분명 쓸모없다. 철학은 성실하고 생산적인 사람들의 하루에 붙어먹는 벌레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철학은 공백을 공백으로 그려내며 말할 수 없는 것을 기어코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보잘것없는 철학의 언어는 매번 중언부언하고 웅얼거린다. 다만 철학의 무력한 웅얼거림이 마치 등에의 앵앵거림처럼 성가시기를 나는 희망한다.
자, 밤이 깊었다. 잠을 자자. 그런데 밤에는 기괴하고 하등한 벌레들이 살살 기어나오는데 이름조차 모를 것들이 찌르르 부르르 운다. 한 마리도 아니고 수없이 와글와글 우글우글, 침대 밑에서 들려오는 바스락바스락 기는 소리 파드득파드득 비벼대는 소리 수많은 다리로 드르륵드르륵 긁어대는 소리, 일어나 조명을 비춰보아도 벌레는 보이지 않고 무시하고 자자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아도 계속해서 소리는 커지는데 이제는 이불 안에서 들리는 것 같고 머리맡에서 슬슬 기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나 보아도 도무지 보이질 않는데, 앵앵대며 귓전에 점점 다가오는 것 같지만 막상 오지도 않고 이제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에 잠을 포기하고 딴짓을 해보아도 귓속을 거대하게 웅얼웅얼 사각사각 딸각딸각 끼익끼익 덜그럭덜그럭 소음으로 가득 채워 도무지 잘 수 없는 불면의 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깨어있어야 하는 끝없는 기다림의 밤.
이 참사에 책임 있는 이들이 잠 못 들기를 바란다. 아니 우리 모두가 편히 잘 수 없기를 바란다. 서글프게 수런거리는 소리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우리가 상실한 것들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치지 않는 중얼거림으로 세계의 공백을 그려내는 끈질김만이, 철학이 지녀야 할 윤리라고 나는 믿는다. 그 끈질김 속에 우리가 함께 모여 다 같이 중얼대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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