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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현재와 ‘멀티-버시티’의 미래 / 권두현

부산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것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나는 ‘수도권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근 10년을 묵힌 박사학위논문이 겨우 인준되던 즈음, 소문만 무성하던 강사법이 시행되었다. 운이 좋게도, ‘박사 수료’ 상태에서 강의를 이어왔던 나는, 역설적이게도, 강사법이 요구하는 박사학위를 가지게 되면서 강사 경력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전국의 각 대학들은 일제히 ‘강사 공채’를 시작했고, 나는 그 공채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렇다 할 강의 준비에 앞서, 마음의 준비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한 차례, 면접 전형에 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야 체감할 수 있었던 것은, 강사들끼리의 생존경쟁과 각자도생이 비로소 본격화되었다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불편한 감각이었다.


‘강사’로의 진입을 위한 연구자들 간의 경쟁이 가시화되고 공식화되었다는 사실은 강사법 시대의 강사가 이전에 비해 한층 더 철저히 외래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제도의 취지와 실상이 어떤지와는 별개로, 강사법은 강사를 대학교 내부의 구성원으로 품기 위해, 이들을 먼저 대학교 외부의 존재로 두는 그 전제를 기정사실로 확정해야만 했다. 내부의 구성원이었고, 여전히 그렇다 할지라도, 강사는 기본적으로 외부의 자리에서 출발하여 ‘외래’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거쳐야만 한다. 외래의 조건이 학교의 승인을 얻지 못하면, 강사는 바로 그 ‘강사’라는 신분뿐만 아니라, ‘연구자’로서의 신분을 동시에 박탈당한다. ‘강사’라는 신분을 통해 입증되는 ‘소속’이 근거가 되어 확보할 수 있는 연구 사업 지원의 기회로부터도 대부분 배제되기 때문이다. 물론 연구 사업에 ‘무소속’의 연구자를 품을 수 있는 장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결국 ‘무소속’마저도 신분으로 환원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강사에게 있어 그 신분을 확보하기 위한 분투 이상으로, 신분에 걸맞은 성원권을 갖추기 위한 분투 역시 녹록하지만은 않다. 운이 좋게도, 나는 부산에서 연구원 자리를 얻어 강의가 아닌 연구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물론, 지원과 책임의 형태가 아닌 제안과 참여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강사의 외래화는 강의와 연구를 기능적으로 분리하는 전제를 기정사실로 확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가 연구원의 신분에서 다시 한번 강사의 신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든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강의를 시작하게 된 곳은 출신학교의 ‘캠퍼스’에서였다. 예정된 강의 시간보다 일찍 출근해서 강의를 준비했고, 강의실 바깥에서 학생들이 캠퍼스를 누비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스스로 다짐한 이러한 소박한 의례는 강사로서의 고립과 소외를 타개하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강사로 ‘재진입’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뒤늦게나마 뚜렷하게 인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실은, 강사 위촉과 해촉, 그리고 재위촉의 과정에서 단 한 번도 학생들과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강사는 ‘강의계획서’를 통해 학교의 행정 시스템을 마주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아무런 개입을 하지 못한다. 학생들은 학기가 시작되고 강의실에 들어서기까지 강사와 그 강의에 대해 사전 정보를 얻기 힘들다. 설령, 어떤 강사의 강의가 ‘신규 개설’되었다면, 학생들은 그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다. 강사의 소외는 학생의 소외와 맥락을 같이하는 셈이다. 강의에 대한 학생의 개입은 제안이나 참여가 아니라 학교가 유통하는 강의를 쇼핑하는 듯한 소비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대학교가 학문적 상품을 대량 생산하는 포드주의적 모델에 따르고 있음을 환기한다. 하지만 대학교만큼 ‘신상품’이 안 팔리는 곳도 없다. 강사는 대부분 학교가 제시한 교과목에 대한 강의계획서를 제출할 수 있을 따름이며, 그 강의계획이 기존과 다를 경우에는 수강생으로부터 외면받음으로써 폐강될 위험까지도 무릅써야 한다. 강의를 개설하고 강사에게 할당한 주체는 학교이지만, 폐강의 책임은―학생들이 다른 강의를 수강할 가능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경고성 메시지와 함께―오롯이 강사에게 전가된다. 개강과 함께 강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강사는 학교와의 계약이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행정적으로 개입을 할 수 있는 이렇다 할 뾰족한 방법도 가지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전임교원’에게 부가된 강의 ‘책임시수’를 충족해야 할 책임조차 강사에게는 없다.


대학 교육의 상당 부분을 ‘비전임교원’에 해당하는 강사가 책임지고 있다는 말은 반쯤은 맞고, 그렇기 때문에 반쯤은 틀렸다. 교육은 강의를 통해서만 오롯이 소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전임교원’의 강사가 학교와의 계약을 오로지 강의 시수를 통해 이행할 것을 요구받는다면, ‘전임교원’의 교육은 마찬가지로 계약에 근거하지만, 이를 근거로 삼은 ‘돌봄’에 맞춰진다. 이들의 교육은 실상 강의실 바깥의 연구실에서 돌봄의 형태로 더욱 빈번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바로 상담을 통해서다. 돌봄의 강도가 상담의 빈도와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면, 지역 대학의 경우, 그 강도는 수도권 대학에 비해 훨씬 더 높다. 물론 강사는 돌봄의 체계에서조차 소외되어 있다. 강사와 교수는 서로를 돌볼 수 없고, 강사는 학생들에 대한 돌봄의 책임으로도 강제적으로 면책된다. 돌봄의 제도화는 이렇게 정동적 불평등을 낳는다.


학생을 돌보는 학과는 학교의 상담 대상이 되고, 학교는 기업의 상담 대상이 된다. 이 구조 속에서 오래된 분과학문들은 기업적 권력 앞에서 ‘구조조정’을 강요받고, 국가는 이 강요의 구조를 승인하고 한층 공고화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대학의 위기는 학문의 위기라기보다도, 학문을 둘러싼 사회적 위계구조의 문제다. 위계의 구조는 관계의 설정을 어렵게 만든다. 대학교, 특히 지역의 대학에서는 상담과 돌봄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는 종종 위계가 부가하는 힘으로 환원되기 일쑤다. 상호돌봄을 통해 서로의 필요와 가치를 인정하는 귀결이 아니라, 취업률, 그리고 여기에 연동하는 충원율과 이탈률 같은 수치를 통해 궁극적으로 자본의 가치를 입증하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대학은 글로벌 자본이 자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역 대학의 위기는 대학 그 자체의 위기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에 대한 대학의 역할 정립과 밀접히 관련된 문제다. ‘글로컬 대학’ 사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책적 드라이브를 통해 글로벌 문제에 대한 ‘로컬 대학’의 대응이 강제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로컬 대학’은 수도권 대학의 기능을 보완하는 역할 정도를 할당받고 있을 뿐, 지역의 대학으로서 취해야 할 마땅한 역할을 스스로 고민할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다. 지역에는 글로벌 자본이 야기한 문제라 할 수 있는 로컬의 문제들이 산재한다. 출산율 저하, 재생산 구조의 붕괴, 청년 이탈의 증가로 인한 ‘지역 소멸’의 위기감, ‘제4차 산업혁명’ 및 COVID-19 이후 산업구조 재편의 가속화 속에서 위기를 미래가 아닌 당장의 현실로 끌어당기는 경제지표의 하락 등 지역의 골칫거리는 결국 글로벌 자본의 인종화되고, 젠더화되고, 지역화된 분업의 산물인 것이다.


지역이 안고 있는 각종 문제에도 불구하고, 청년들과 주민들에게 어떤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은 부재하고, 지역의 지속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기획은 사실상 전무한 실정이다.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종종 지역의 이미지로서 고착되고, 이에 대한 혐오를 야기한다. 지역 대학에 대한 혐오는 사실 지역에 대한 혐오가 대학에 들러붙은 것이다. 대학에 들러붙은 혐오는 다시 한번 학생들에게 들러붙는다. 이렇게 혐오는 순환하고 축적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역의 대학생들은 내면화된 자기혐오로 인해 자신의 역량을 스스로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자신이 속한 지역의 대학교는 머물러야 할 곳이 아니라 거쳐 가는 곳이며, 거쳐 감으로써 낙인을 생성하는 공간이다. 지역의 대학생들에게 학교는 마냥 달갑지만은 않은 소속으로서 그들의 신체에 뒤얽힌다. 그들에게 대학교는 자신의 역량을 발견하거나 강화할 수 있는 인프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은 셈이다.


그러나 지역의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말은 반쯤은 맞고, 그렇기 때문에 반쯤은 틀리다. 지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력, 지식, 기술, 제도 등의 인프라가 바로 지역의 대학교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인프라는 무엇보다도 지역 대학의 구성원들이 부대끼고 뒤얽히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정동적인 것이기도 하다. 지역 대학의 돌봄은 그것이 어떻게 입증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환원되었는지와는 별개로,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치열하게 이루어져 왔다. 지역 대학의 강의실은 종종 강의실 바깥의 지역에서 펼쳐진다. 지역 대학은 지역이라는 캠퍼스를 외면한 적이 없다. 그 현장에는 물론 다양한 행위자들이 있고, 이들의 연결망이 있다.


멀티-버시티의 이미지. 미드저니 봇. 프롬프트 오영진.

그런 점에서 지역 대학은 ‘유니버스’ 모델에 입각한 ‘유니-버시티’가 아니라, ‘멀티버스’ 모델에 입각해 도시 공간과 상호 작용할 수 있는 ‘멀티-버시티’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지역 대학이 생존을 위해 빚어내고 있는 상호돌봄 관계 속에서 대학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재정의될 필요가 있다. 지역 대학의 구성원들이 맺고 있는 관계적이고 상호의존적인 모델은 다중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열린 자료, 열린 과학, 열린 정부로 확장될 수 있다. 도시와 대학 사이에 맺어질 새로운 계약은, ‘계약’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돌봄에 다름 아니며, 이는 이미 수행 중이기도 하다. 지역 대학의 구성원들이 열정의 소진을 각오하면서까지 만들어 오고 있는 상호돌봄 관계에는 ‘신산업’의 ‘유치’가 아니라 지역의 산업유산과 정동적 유산을 바탕으로 신산업의 ‘기획’을 함께 하는 다중의 공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잠재한다. 그 ‘다중’의 목록에는 현 체제에서 소외된 강사들뿐만 아니라, 지역의 주민, 더 나아가 비인간 행위자들까지도 모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의 가치에 가려진 정동적 불평등의 문제, 그리고 지역이 떠안고 있는 글로벌 자본의 문제는 결국 대학을 ‘소속’이 아닌 ‘매개’로 삼아, 다중의 성원권 또는 정동적 시민권을 확장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해결 가능한 것이다.


한 학기 강의를 마칠 때마다 강사로서 나는 얼마나 많은 수강생들의 사유와 고민에 접근했는지 의심하게 된다. 이는 그들의 사유과 고민을 풀어놓고 함께 해결하기 위한 자리로서 지역 대학이 얼마나 유효한 공간인지에 대한 의심이기도 하다. 지역 대학의 모습은 수도권의 그것과 다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역 대학의 모습이 유니버스의 유니버시티, 즉 보편성과는 달라야 한다면, 그것은 지역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지역이 미처 인식하지 못한 지역의 풍부한 유산 때문이다. 지역 대학은 이를 학생들에게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매개체로서 거듭나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멀티-버시티는 유니-버시티라는 단일한 모델이 축적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될 것이다. 이 역량을 활성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교수와 학생, 학생과 시민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그 필요를 돌봄으로 빚어내는 관계의 재정립이다. 지금까지의 대학이 경계를 강화하고 관계를 해체했다면, 이제는 그 반대의 힘이 필요하다. 지금 지역 대학은 바로 그 힘을 있는 힘껏 길어 올리고 있다.



권두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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