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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종의 기원>, 새 번역본이 필요할까? / 박성관

평소 호감이 있던 출판사의 대표로부터 <종의 기원>을 새로 번역해보지 않겠느냐는 의뢰를 받았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고 내는 책들을 언뜻언뜻 보며 괜찮은 출판사네 했던 정도였는데, <종의 기원>의 번역 문제를 오래 생각해왔다는 말에 이전에 갖고 있던 기본적인 신뢰에 흥미가 더해졌다.

나는 거의 새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다윈과 연애를 시작해서 약 10년 뒤인 2010년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그린비)를 출간했다. 처음엔 <종의 기원>을 새로 번역할까, 아니면 주석서 성격을 띤 해설서를 먼저 낼까 고민했었다. 둘 다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어느 쪽 하나만 해도 최소 5, 6 년은 걸릴 거 같았고, 결국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 먼저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런 판단이 맞아 떨어졌는지 <생명의 다양성과....>가 나오자 독서계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판매에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 더라면 좋았겠지만, 과히 그러지는 못했다. 그 뒤 이러이러한 출판사로부터 <종의 기원> 새 번역을 의뢰 받았지만 저러저러한 이유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종의 기원>을 읽어본 많은 사람들이 새 번역을 심히 원했다. 좋은 번역본은 커녕 기본을 갖춘 번역본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2010년까지는, 내가 당시 검토해본 것들은 그랬다. 그러던 차에 2019년 7월, 오랜 작업 끝에 <종의 기원> 새 번역본이 나왔다(장대익 역, 사이언스북스). 한 달 뒤인 8월에는 또 다른 번역본 <종의 기원 톺아보기>(신현철 역, 소명출판)도 나왔다. 한참 다른 주제들에 빠져 있던 시절인지라 일단 책만 사두고 ‘언제 시간 좀 내서 읽어봐야지’ 했지만, 그 ‘언제’는 몇 년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제 새 번역 의뢰를 받은 것이다.


반가웠지만 버선발로 뛰어나가 출판사 대표님과 양손을 꼬옥 맞맞기 전에 2010년 이후 새로 나온 번역본들을 살펴보아야 했다. 꽤 괜찮은 게 이미 나와 있다면 굳이 내가 또 (몇 년 씩이나 잡아먹을) 새 번역본을 낼 필요는 없으니까. 어제 얼굴책을 통해 대표님으로부터 의뢰를 받고 오늘 통화를 하기로 했다. 오늘이 이 칼럼의 마감날이라 시간이 별로 없어 일단 장대익 번역본과 <종의 기원> 1판만 집어 들고 카페로 갔다. 평소 중요하다고 여기는 몇 대목에 집중해 비교해봤다. 1시간 정도 후다닥 검토해본 결과,

1. 전체적으로 정확하고 유려한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훌륭하다. 다윈의 문장 자체는 소박하고 평이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빅토리아식 만연체인 탓에 읽기 쉽지 않고 번역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몇 년에 걸쳐 여러 사람들이 번역 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또 다듬고 매만지기를 반복했다는 「옮긴이 서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나보다 영어를 잘 하고 우리말 구사력도 더 좋은 게 분명했다.

2. 누군가 완벽한 번역본이냐고 묻는다면, <종의 기원> 원서도 다윈의 뜻을 완벽히 담아내진 못했을 거라고 답하겠다. 부분 부분 부족한 점이나 실수가 있는 건 사실이고, 다윈 애정자로서 보자면 아쉬운 표현도 있다. 그렇지만 거의 없었고 문제점의 수준도 극히 미미했다. 더 이상의 수준을 원하는 독자는 인터넷에도 널려 있는 원서와 간간이 비교하면서 보시면 될 것이다.

3. 내가 새로 한다 해도 개선하고 싶은 대목은 거의 없다. 그리고 개선되길 바란다는 것과 실제로 어떻게 개선할지는 또 다른, 엄청난 문제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번역본 109쪽을 보자.

“종이란 단지 뚜렷한 특징을 가진 영구적인 변종에 불과하다는 나의 견해에서 이러한 사실은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동일한 속의 종들이 많이 형성되는 곳(또는 종의 생산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이라면 어디에서나 대개 그러한 생산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과정은 느리게 일어난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특히 더욱 그러하다.”

이 대목을 내 책은 어떻게 옮겨 놓았나 보자.

“이런 사실은 종이란 뚜렷한 특징을 가진 영속적인 변종에 불과하다고 하는 견해에 입각하면 그 의미가 명백해진다. 같은 속에 속하는 종이 많이 형성되는 곳에서는, 또는 이런 표현을 해도 무방하다면, 종의 제조공장(the manufactory of species)이 계속 활동해온 곳에서는 일반적으로 지금도 그 제조가 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 139-141쪽. 앞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은 내 책에서는 옮기지 않았다).

아마 당시 일본어 번역본도 참고하면서 했기에 이 정도 나마 번역했던 거 같다. 아무튼 이 문장을 인용하고 나는 이렇게 썼다. “종이 변종과 본질상 다르지 않다는 말도 불경한데 종의 제조, 아니 종을 제조하는 공장이라니! 당시 서구인들에게 이런 표현이 무방했을 리가 없다.”(같은 책, 141쪽). 내가 어떤 점을 강조하고자 했는지 금세 눈에 들어올 것이다. “형성되는”은 form을 번역한 것이다. 두 번역의 차이는 “생산”과 “제조공장”에 있다. 나는 둘 중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쪽은 오역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두 번역 모두 역자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차이라고 본다. 그러나 차이가 있으니 상이한 의미가 작동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앞의 번역본에서 “(또는 종의 생산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곳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라고 되어 있는 대목을 나는 “또는 이런 표현을 해도 무방하다면”이라고 옮겼다. 역시나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대동소이하지만 두 번역 간 차이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대략 그런 정도다. 하나의 문제를 추가하자면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과정은”이다. 이는 “the process of manufacturing new species”를 번역한 것이다. 나라면 “새로운 종을 제조하는 과정은”이라고 했을 것이다. ‘‘탄생시키는’과 ‘제조하는’의 차이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다. 내가 역자라면 ‘탄생’은 창조론의 성분이 함의되기 때문에 피했을 것이다.

4. 이번에 주마간산식으로나마 비교하다 보니 새로운 발견도 했다. <종의 기원>의 11장 「지리적 분포」와 12장 「지리적 분포-계속」에서다(나는 <종의 기원>을 이 두 장부터 읽는 것도 좋은 독법이라 생각한다). 번역본 474쪽에서, 별 특별해 보이지 않는 몇 구절을 잠시 보여드리겠다. “남반구의 위도 35도에서 서식하는 생물들과”, “다양한 지역에 사는 생물들”, “신세계와 구세계의 거의 모든 육서 생물들”. 각각의 원문은 이렇다. “the productions of South America south of lat. 35°”, “the productions of various regions”, “nearly all the terrestrial productions of the New and Old Worlds”. 당신은 여기에 productions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우선, 내 책(211-212쪽)을 인용해 한 가지 의미심장한 지적을 해두어야겠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쓸 때 문장을 고치고 또 고쳤으며, 용어들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우선 제목부터가 그랬다. 다윈은 초판을 낸 뒤 제목 “자연 선택, 혹은 생존투쟁에서 유리한 품종의 보존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에서 보존(Preservation)이라는 단어가 영 마음에 걸렸다. ... 이후 판본에서 그는 ‘preservation’ 자리에 ‘survival’을 넣었다. ‘보존’이라는 말이 곧장 ‘보존자가 누구지’라는 질문과 함께 어떤 신 같은 존재를 떠올릴 수 있는 반면, ‘생존’이라고 하면 ‘생존자가 누구지’하는 자연스러운 질문에도 ‘유리한 품종’이 떠오르기 때문에 그럴 위험이 훨씬 적었다. 게다가 ‘보존’보다는 ‘생존’ 쪽이 그나마 생물들의 자발성을 조금은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물의 자발성을 너무 강조하는 것도, 너무 약화시키는 것도 다윈의 뜻이 아니었다. 그렇게 고심 끝에 짓고 구사한 용어들 중에는 ... 의인화된 용어들이 차고 넘치게 많았다. 예컨대 원래 태어난 장소에서 거주하는 생물을 ‘거주자’(inhabitant)라고 썼고, 태어난 곳을 ‘출생지’(birthplace)라 썼다.”

아까 말했듯이 이번 검토 과정에서 나는 productions에도 눈길이 갔다. 다윈은 생물들을 지칭할 때 inhabitant와 productions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이름들을 동원했다. 거기에는 각각의 이유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왜 productions인가?

5. 현대인들 대부분이 다윈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오해를 꼽자면, 다윈이 생물종들을 신의 창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리적, 자연적 조건에 의해 설명했을 거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이건 미진한 이해가 아니라 정반대의 오해다. 지금은 이 얘길 길게 말할 수 없으니 그냥 다윈 본인의 말을 보여드리겠다. 번역본 11장의 첫 문장이다. “지표면 위에 있는 유기체들의 분포를 감안할 때 가장 먼저 우리를 놀라게 하는 엄청난 사실은 기후 조건이나 물리적인 환경을 바탕으로 해서는 다양한 지역에 사는 생물들의 유사성이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473쪽) 먼저 자잘한 지적 두 가지부터. 우선, 이 문장에서 ‘유기체들’은 ‘organic beings’고 ‘사는 생물들’은 ‘inhabitants’다. 둘째, 여기서 ‘기후 조건이나 물리적인 환경’은 ‘기후 조건이나 여타 물리적 조건들’(climatal and other physical conditions)이 맞다.

다윈은 진화 과정에서 물리적, 자연적 조건은 극히 미미하게밖에 작용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주장했고, 책에 수도 없이 그렇게 써놓았다. 우선 <종의 기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박물학자들(naturalists)은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으로 기후나 먹이 등 외부적인 환경 조건을 든다.” 여기서 ‘일으킬 수 있는 원인으로’는 “유일하게 가능한 원인으로”로, “든다”는 “끊임없이 든다”라 옮겨야 하지만, 이제 이런 문제는 그만 얘기하겠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어서 다윈이, 그런 식의 설명은 “극히 한정된 의미에서만” 사실일 “수도 있다”(473쪽)고, 그러나 실제로 많은 경우 그런 설명은 “가당치도 않다.”(473쪽)고 썼다는 점이다.

6. 다시 11, 12장의 「지리적 분포」로 돌아가보자. 다양한 생물들이 다양한 기후 조건이나 여타 물리적 조건 속에 분포되어 있고, 또 그런 조건들과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 형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니 다윈의 주장(“기후 조건이나 여타의 물리적 조건들로는 다양한 지역에 사는 생물들의 유사성도, 차이점도 설명할 수 없다”)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가! 다윈은 ‘물리적 조건들’로는 진화의 과정과 현재 생물들의 양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취지의 말을 <종의 기원>에서 계속 반복했다. 이 사실은, 그런 구절을 20차례 정도 발견했는데도 계속 나오는 바람에 더 이상의 수색을 중단했던 내가 보증한다. 그럼 다윈은 뭘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는지가 궁금하다. 다윈이 답을 말해준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생물들의 비유사성은 자연선택을 통한 변화의 탓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는 서로 다른 물리적 조건의 직접적인 영향 탓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몇 차례 언급했듯이 생물과 생물의 관계야말로 모든 관계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478쪽).

7. 정리하자. 다윈은 ‘물리적 조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요인이 ‘생물들 간의 상호 관계’라고 주장했다(‘관계’라고 하니까 좋은 것만 떠올리실지 모르지만, 이 상호 관계의 가장 대표적이고 중요한 관계가 바로 피비린내나는 생존 투쟁이다, 그것도 주로 동종 간에 벌어진다). 그리고 이를 지리적 분포 차원에서 설명하는 11, 12장에서 생물들을 productions라고 자주 지칭했다. 이 단어의 사용 빈도가 다른 장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구체적으로 조사해봐야겠다(과연 이 ‘나중에’는 언제일까?). 그건 그렇고, 이렇게 지칭한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들 어떤 생물종을 어떤 특정 ‘지역의 산물’이라고들 부를 때, 거기에는 그 생물종의 여러 특징들이 지역의 기후 조건이나 여타의 물리적 조건들의 산물이라는 함의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다윈에 따르면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지역에 함께 살았던 생물들의 상호 관계다. productions라는 말은 이러한 주장과 복잡하게 관련있는 게 아닐까, 라는 게 오늘 든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후 이 대목을 번역할 때는 이 단어를 ‘생물’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산물’ 혹은 ‘생산물’이라고 할 것인가? 혹은 더 좋은 번역어가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8. 장대익 교수의 <종의 기원> 번역본 출간을 뒤늦게나마 크게 환영한다. 독자들께도 자신 있게 권한다. 나도 이 번역본으로 다시 한번 전체를 일독하고 싶고, 조만간 신현철 교수의 번역본도 살펴보아야겠다(이 ‘조만간’은 또 언제일까?). 그리고 이 글에서 짚었던 방식으로, 국역본에서는 온전히 살리기 무지 힘든 몇 가지 표현에 대해 해제 형식의 글을 쓰고 싶다. 이건 또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겠지만, 설령 먼 훗날일지라도 반드시 하고 싶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세세하게 해제를 쓰다 보면 한없이 길어질 수도 있는데, 그러면 그게 내가 2010년에 낸 919쪽짜리 책과 뭐가 다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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