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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를 지내야 할까? : 할머니에 대한 기억 / 김동규

최종 수정일: 2022년 12월 8일

수십 년 전 초등학교 4학년 꼬마가 할머니랑 밭일을 나갔다. 뙤약볕에서 풀을 뽑는 고된 일이었지만, 놀이와 노동을 구분하지 못했던 아이는 그다지 힘든 줄 몰랐다. 배가 출출해지자 할머니는 가지고 온 새참 꾸러미를 푼다.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거친 음식이지만 시장을 반찬으로 맛있게 먹는다. 여기까지 좋았는데, 할머니는 마실 물을 챙기지 않았다. 대신 큰 주전자에 막걸리를 가득 담아 가져왔다. 어쩔 수 없이 손자도 할머니와 함께 막걸리로 갈증을 해소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맑은 하늘에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취기가 남았는지 앞서가는 할머니는 갈지자 행보를 하다가 논길 옆 도랑에 여러 차례 빠진다. 뒤따라오던 손자는 행여 할머니가 넘어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다. 그때 노을빛보다 더 빨간 꽃뱀이 도랑물을 따라 내려오는 모습을 발견하고서 꼬맹이는 얼른 할머니의 손을 꼭 부여잡는다.


이 이야기는 내 어릴 적 삽화다. 오랜 시간의 풍화작용에도 또렷이 남아있는,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진 이미지다. 석양 들녘을 배경으로 할머니와 손자가 손잡고 가는 풍경,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빛나는 명장면이다. 이미지가 또렷하고 실감나건만, 최첨단 IT시대 도심의 생활에서 돌이켜보니, 당최 비현실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거주지를 울산으로 옮기면서 이삿짐에 제기(祭器)를 담았다. 그 제기들은 50년 가까이 우리 집 제사를 주관하셨던 어머니가 고이 모시던 것들이다. 거동도 쉽지 않은 어머니의 어깨에서 제사상 차리는 책무를 이제야 덜어낸 셈이다. 제주(祭主)로서 이젠 내가 책임지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 맡은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늘 그렇듯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선다. 유교 신자도 아니고 전통 의례에 그다지 애정과 신뢰를 가지지 못한 내가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 치고, 앞으로 우리 아이들도 이 일을 하게 될까?


언젠가 제사 지내는 일로 숙부님들과 부딪혔던 적이 있다. 나는 시대에 맞게 간소화하자는 입장이었고 작은아버지들은 원래대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숙부들의 뜻대로 되었다. 내 마음대로 일을 관철하지는 못했지만, 이 일로 제사 의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집안 어르신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다음엔, 제사를 어떻게 할 건가? 아예 폐기해 버리는 건 어떤가? 조상을 제대로 모시지 않으면 화를 면치 못한다든가 죽은 자들로부터 해코지를 당한다는 믿음은 내게 없다. 그렇다고 제사를 폐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선뜻 찬성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제사를 지내야 할까?


근본적으로 제사란 사랑하는 망자에 대한 애도작업이다. 일상의 삶에 침전된 이별의 슬픔을 슬픔으로 걷어내는 일이다. 그것은 죽음으로 중단된 사랑을 이어가는 길이자, 반복적인 의례로 사랑의 기억을 보존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제사가 이런 것일진대, 제사를 폐지할 수는 없다. 폐지해서는 안 된다. 제사의 폐지는 애도작업의 실패로 이어지고, 사랑을 중단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나의 일부가 된 연인을 망각함으로써 자기를 상실하는 꼴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장손이 제주가 되어야 한다거나, 기제(부모부터 고조까지, 즉 4대까지 망자가 돌아가신 전날 자손들이 모여 제를 올리는 것)는 물론이거니와 시제(오대조 이상의 조상님께 각지의 후손들이 모여 제사 지내는 것)까지 지내야 한다거나, 홍동백서의 차림새로 제사상을 꾸며야 한다는 것 등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사라지는 사랑을 애타게 기억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살아남은 자들끼리 사랑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다. 제사상 위에 피자가 올라와도 좋고 딸이 제주여도 상관없다. 1년에 한 번이라도 망자의 빈자리를 중심으로 사랑의 행렬을 이루는 게 중요하다.

칼럼의 내용을 입력해 얻은 인공지능 삽화, Midjourney+프롬프트: 오영진

나는 할머니를 기억한다. 그녀와 노을 진 들녘을 함께 걸었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워한다. 그렇기에 나는 제사라는 의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 내 마음속 진풍경(珍風景)과 잘 어울리는 시 한 편이 있다. 정현종 시인의 「꿈결과 같이」이다. 할머니와 함께 걸었던 석양 들판이 3D 입체영상보다 실감나지만 동시에 꿈결 같이 느껴지는 이유가 이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맑은 저녁 석양에

하늘의 구름이 발그레하여

너무 이뻐

그 빛깔 하나로

이 세상이 액면 그대로 딴 세상인데,

다시

그 우주적 숨결의 가락

그 자연의 채색의 비밀 아래로

인간 석양 하나 걸어가면서

오래된 시간의 속삭임을 듣는다

오랜 시간의 지층이 그 스스로를 듣는 듯이.

그 속삭임은 깊은 눈동자

그 눈동자는 깊은 속삭임이거니

그러한 오래된 시간의 육체가 느끼는

마음 안팎 사물의 실감이여.

보는 일이 광활하여 아득하고

듣는 일이 또한 심연이면은

그 실감에 닿을 수도 있으리.

그렇게 안팎이 모두 아득한 데를

나는 걸어간다 꿈결과 같이.



김동규(울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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