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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으로 수다 떨기: 제대로 터뜨린 폭탄 (하) [[양자역학을 어떻게 이해할까? -양자역학이 불러온 존재론적 혁명]]- / 박성관

최종 수정일: 2023년 5월 2일

(「제대로 터뜨린 폭탄 (상)」에서 계속 이어짐)

11. 2장 제목은 「고전역학」인데, 갈릴레오의 광팬이지만 뉴턴 역학에 대해서는 조금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라그랑지안과 해밀토니안을 한반도 공부할 기회가 없어 문송한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었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과라고 해도 대학에서 물리학과와 거리가 먼 과를 졸업한 독자들 역시도)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이런 경험은 과히 드물지 않다. 진입장벽이 높은 분야를 공부할 때는 너무 욕심부리지 않고, 그렇다고 권위주의에 복종하지 않고, 차분히+크게크게 따라가면 된다. 더군다나 나는 물리학을 포함한 과학 분야에 새로운 발견과 해석들이 활발히 등장해야 하고, 그 결과 지금의 과학이 크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과학에 대한 나의 뜨거운 관심에는 이런 개혁 열망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얘기 나온 김에, 혹시 라그랑지안과 해밀토니안에 대한 좋은 입문서나 해설서, 혹은 대학 교과서 중 괜찮은 챕터 같은 게 있다면 교시해주시기 바란다. 언젠가+좋은 벗들과 팀을 구성해서 공부해 볼 수 있도록 적선(積善)해주시라.

12. 3장 「상대성이론」은 나도 청소년 교양서를 쓴 바 있는 주제다([[아인슈타인과 광속 미스터리]](박성관 지음, 창비, 2017). 그런데 내가 집필 당시 주로 보았던 참고서들과는 상당히 다른 각도에서, 뭐랄까 장회익이 종종 좋은 취지에서 거론하는 메타적인 각도에서(?) 상대성이론을 해설해주니 신선하고 좋았다. 물론 어려운 대목들이 있었지만, 나의 관심사 및 문제의식을 견지하면서 읽어갔다. 처음 가보는 어느 나라의 운하에서 증기선을 타고 풍경을 멀리서 크게 바라보는 관광객처럼 여유 있게, 조급해하지 않으며 책의 내용을 감상했다.


13. 4장부터 마지막 장인 8장까지는 책의 주제인 양자역학을 다룬다. 소위 양자역학의 신비들을 자신의 새로운 존재론하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논의의 집결지는 7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양자마당이론」이다. 이 시도를 통해, 신비한 원리를 각자의 취향에 따라 자의적으로 설정해온 지금까지의 뻔한 관행과는 다른 결과가 생산되었다. 대표적으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도, 보어의 상보성 원리도 이제는 시효를 다 했다는 선고를 받는다.

14. 어떤 사람들에겐 스포일러가 될까 살짝 주저되지만, 책의 핵심 주장이자 성과 몇 가지는 그래도 짚어두어야겠다. 우선, 저 유명한 이중실틈(이중슬릿) 실험의 미스터리는 장회익의 새로운 실재론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아니, 이 실험의 신비만이 아니라 인문학자들이나 예술 작가들이 특히 좋아하는 얽힘 현상도 역시 자연스러운 귀결로 화한다. 어떤 독자들은 7장의 양자마당이론을 보며, 물리학의 기본은 더 이상 원자니 쿼크니 하는 입자가 아니라 “양자마당의 들뜸 단위다.” 아니, “양자마당의 들뜸 단위가 기본입자이다.”라는 대목에 더 흥분할 수도 있겠다. 물리학을 입자 중심 대상에서 마당 중심 대상으로 이행 및 격상시켜야 한다는 주장!

15. 좀 더 직접적인 성과를 꼽자면 푸리에 상반공간과 관련지은 대목이다. 고전역학에서 한 물체의 위치와 시각은 각각 위치공간과 시각(時刻)공간이라는 별도 공간의 요소들이다. 운동량과 에너지 역시 그러하다. 한데 장회익의 존재론적 발견에 따르면 “운동량-에너지 공간이 별도의 독립된 공간이 아니라 위치-시각 공간의 푸리에 상반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 별도의 상보성 원리를 제시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또한 이 두 상반공간의 기본변수들 사이에 성립하는 수학적 관계일 뿐 전혀 새로운 원리로 부상할 이유가 없다.”(274)

이 대목은 줄거리는 어렵잖게 이해했지만, 그가 펼쳐 보이는 물리 과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서 내가 ‘충분히’라고 한 말은, 내가 원하는 혹은 내가 필요로 하는 만큼에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내가 다른 누구보다 물리 지식이 없다고 해서 내게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열등감이나 질투심도 갖지 않는다. 관심 있는 분야가 있으면, 내게 필요한 만큼 알면 된다. 그 이상을 욕심내고 그걸 잣대로 나를 바라보면 어떤 새로운 앎과 정보에도 매혹될 수 없고 마음껏 유영해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6. 8장 2절 「양자역학을 둘러싼 실재론 논란」에서는 기존의 낡은 실재론의 관점을 벗어나 논의를 전개한다. 장회익은 이전의 많은 논의들의 문제점이자 한계가, 양자역학이 펼친 확률의 세계라는 새롭디 새로운 세계상을 낡은 실재론에 기반해 비판했다는 데 있다고 본다. 이 점은 나도 십분 동의한다. 물론 나는 그의 실재론이 내용은 새로운 면이 꽤 있지만, 유형으로는 이전의 실재론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아마 장회익 자신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며, 이렇지 않다면 도리어 불만스러워할 터이다. 나와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17. 내가 새로운 유형의 실재론이라고 이미지화하는 것은 예를 들자면 2007년에 등장한 ‘사변적 실재론’이다. 이 실재론의 강렬한 문제 의식은 [[사물들의 우주]]의 서론, 그중에서도 p.30-33에 선연히 드러나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 바란다.

또는 노버트 위너가 [[인간의 인간적 활용]]에서 윌러드 깁스(1839-1903)를 내세우며 제시한 실재론이다.


“그 이후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확률적 세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어떤 하나의 특정한 실재의 우주에 관한 양(量)이나 진술을 다루는 게 아니라, 다수의 유사한 우주들에 대해 해답이 구해질 수 있는 문제를 던지게(묻게) 되었다. 따라서 우연성은 단순히 물리학을 위해 필요한 수학적 도구에 그치는 게 아니라 물리학 그 자체 조직의 일부가 되었다.”1)

위너의 이런 견해는 굳이 실재론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기존의 실재/허상 이분법에서 벗어난 세계상이라 부르는 게 훨씬 더 정확하겠다. 아마도 장회익을 포함해 상식에 바탕을 둔 많은 사람들은 이를 실재론이라 보지 않을 터이다.


18. 방금 위너의 문장을 인용한 것은 문제 되는 것이 실재론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재론 못지않게 서양의 과학 및 철학에 깊이 뿌리내린 결정론이 문제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냐 하면 결정론에 반대하는 철학자들도 대부분은 결정론적인 요소가 너무 강할 정도다. 아마 자기 문명권에서는 그런 면이 잘 보이지 않아서 문제가 지금까지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대기독교라는 게 워낙 강하게 문화로 배어 있다 보니 그로부터 조금만 벗어나도 크게 벗어난 것처럼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문명의 우열을 따질 일은 전혀 아니지만, 그런 유형의 과도한 믿음이 전 사회적으로 퍼져 있지 않은, 가령 우리 문화권 같은 곳에서는 법(칙)에 대한 서양 문화의 과도한 (두려움이 깔려 있는) 집착도, 뭔가가 실재하고 다른 것은 대부분 가상이라는 식의 비현실적인 믿음도 참 공감하기 어렵다. 이해는 둘째치고 말이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새로 긴 얘길 시작할 수 없으니 좋은 글 한 편 공유하면서 넘어가기로 하겠다. 일본의 잡지 <思想> 2010년 7월호에 실린 니시가키 도루의 「네오 사이버네틱스의 원류 – 노버트 위너와 윌리엄 제임스의 교차점」이다. 특히 2, 3절이 중요한데, 정점은 3절 「윌리엄 제임스의 세계 인지」다. 결정론적이지 않은 실재론, 이를 나는 그냥 현실론이라 부르고 싶다. 현재이면서 실재인, 실재가 곧 현실인 그런 세계관. 그런데 그냥 짐작이지만, 이를 구성하고 또 그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꽤나 ‘사변적’이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4절도 나름 중요한데, 여기서 필자는 존 폰 노이만을 20세기 앎의 패러다임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꼽는다. 간단히 말해서 노이만처럼 일원적인 객관 세계를 나이브하게 신봉하는 한, 참으로 자율적인 존재를 상정하기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벗어나 다원적이고 자율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인물로 필자는 노버트 위너를 꼽는다. 노이만과 위너를 대조시킨 프란시스코 바렐라를 인용하면서. “바렐라는 위너와 폰 노이만의 이론을 비교하면서 전자를 자율계(자율시스템), 후자를 타율계(타율시스템) 이론으로 대조적으로 위치 짓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두 근원적 테제는 1946년 이래 신경과학, 진화이론, 면역학, 가족심리분석, 경제학, 인공지능, 경영학, 언어학 같은 다수의 영역에서 타율적인 접근법이 지배적인 역할을 맡아 왔다.”(<思想>, 2010년 7월호 p.53)

19. 스포츠도, 문화도, 경제도, 국방도 모두 선진국인데 오직 학문 세계만 후진국이라고 하는 지적들이 많다. 다른 건 몰라도 학문 사상 분야에 아쉬운 점이 많다는 건 분명 맞는 말이다. 한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패기있는 저작이 출현했을 때 이를 중히 여기고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다. 나처럼 비전문가라도 활달하게 이 이야기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들을 맘껏 논하며 널리 퍼뜨려야 한다. 새로운 관행을 내가 먼저 실천하는 것이 새로운 현실의 출발이다.

20. 다음 달엔 임소연의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을 할지 아니면 아직 번역되지 않은 [[사이버네틱 혁명가들]]이나 [[자연을 명명하기]]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뒤의 두 권 중 하나를 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은데, 이상하게 지난달에 주문한 외서들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배송 예정일보다 열흘이 지나버렸는데...... 이중 앞의 책은 내용이 넘 궁금해서 못견디겠고 뒤의 책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해 충격을 주었던 책이다. 아~ 보고 싶다, 언능!!!


1) One interesting change that has taken place is that in a probabilistic world we no longer deal with quantities and statements which concern a specific, real universe as a whole but ask instead questions which may find their answers in a large number of similar universes. Thus chance has been admitted, not merely as a mathematical tool for physics, but as part of its warp and weft. 원서 2판, p.11.



박성관(독립연구자, <분해의 철학>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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