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엔 생략이 많다? / 박성관

1.

중학교 때 처음 영어를 배우는 중에 이런 논리에 접했다. 영어는 문장 처음에 자신있게 자신을 주어로 내세운다, 서양인들은 그래서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에 대해 책임있는 주체로서의 의식이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주어나 상대방을 가리키는 지칭을 생략하는 문장이 너무 많다. 이렇게 되면 생각과 언어, 행동 모두 무책임하고 불명료하게 된다. 대략 이런 이야기를 영어 샘한테 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과목 샘한테 들었는지는 기억 안 난다. 그 이후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던 얘기도 오버랩되어 더 그런 거 같다.

2.

주어를 앞에 내세우는 게 주체적인 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역으로 그런 언어 생활을 하다 보니 자주적인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근데 참 이상한 것이, 그런 중요한 판단을 어떻게 그리 간단히 내릴 수 있지? 딱 봐도 벌써 중간에 여러 단계들을 밟아야만 할 거 같지 않나? 그런데도 누구나 쉽게 그런 얘기들을 떠드는 건, 아마도 서구 문명에 대한 열등감과 서양인들의 자뻑이 그 공백지대를 튼튼하게 메워주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영어권 문화(소위 서양)가 정말 자주적인지, 주체적인지부터가 문제지만 그런 수준의 질문은 언감생심!

3.

두 해 정도 󰡔자본󰡕과 󰡔정신현상학󰡕 등을 가지고 독일어 강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언어 감각이 상당했던 한 친구가 이런 얘길 했다. 독일어 책은 nicht(영어의 not에 해당)가 대부분 문장 끝에 오기 때문에 졸라 힘들다! 도대체가 문장을 다 읽기 전엔 이게 긍정문인지 부정문인지를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자기는 딱 봐서 분위기 좀 껄적지근하면 문장 맨 뒤로 가서 nicht가 있는지부터 확인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불평했다, 대체 왜 어순이 이케 불편하게 되어 있는 건지....

4.

이 친구의 말에 나는 두 번 놀랐다. 우선, 그는 ‘아니다,’ ‘... 지 않다’ 등 부정을 표시하는 말이 맨 마지막에 오는 언어를 평생 써왔고, 그러면서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온 장본인이다. 둘째는 더 놀라운데, 그 친구의 불편함이 실제 불편함이었다는 거다. 그의 판단이 착각이나 오해일지라도 실제 짜증날 정도로 무지 불편한 것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이건 웃긴 거, 아니 웃픈 건데), 우리가 그럼 영어를 읽을 때 편하냐? 딱히 그렇지도 않다. 심지어는 처음부터 뒤로 가서 거기서부터 거꾸로 올라오면서 해석해야 하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앞쪽부터 순서대로 읽는 사람들이야 물론 있겠지만 그들도 앞 내용을 잊지 않으려 애쓰면서 이후 구절들을 읽어간다.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런 지적을 하고 또 사람들이 이 지적들에 공감한다 해도, 그는 계속해서 독어 텍스트를 읽을 때 자꾸 뒤로 가서 nicht(혹은 kein 등 부정을 표시하는 몇몇 다른 단어들)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게 될 거다. 왜? 그렇지 않으면 불편하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말을 읽거나 들을 때는 전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왜? 안 불편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4.

실제로, 현실적으로, 리얼하게 체험하는 일일지라도 그로부터 도출된 판단에는 중대한 착각이 포함될 수 있다. 자, 이를 결코 잊지 않으면서 정말로 우리말에 (주어를 포함해) 생략이 많은지 정색을 하고 자문해보자. 첫째, 생략이 많다는 게 과연 사실일까?(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원래의 문장, 생략되지 않은 문장은 어떤 것일까?) 둘째, 만일 그렇다면, 그 문장 때문에 우리가 불편한가? 셋째, 그 때문에 우리의 문화이든 문명이든, 혹은 사회의 발전 수준이든 아무튼 매우 중요한 무언가가 서양권보다 불명료하고 뒤져 있을까?

여러분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모르겠으나 하나 거의 확실한 건, 당신이 생각하지 않는 돌멩이가 아니라면 어떤 판단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참 동안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지쳐서 이 문제를 그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의 기존 생각(우리말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거의 변경되지 않은 채 당신 안에서 이후에도 계속 작동하게 될 것이다.

5. 우리말로 철학은 불가능하다?

인문학 버전으론 이런 것도 있다. 서양어는 굴절어라 동사의 다양한 변형태들이 있고 그래서 깊고 다양한 사유가 가능한데 우리말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말만으로는 철학 같은 고도의 사유는 불가능하다는 소리. 과연 우리말로 철학하는 게 어려운지는 오늘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판단을 섣불리 내리거나 그 밖의 생각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수준높은 어려운 문제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내 고교 시절의 기억에 따르면 교착어로 분류된다. 명사에 조사가 아교처럼 찰싹 붙는다고 해서 그런 호칭이 붙었던 거 같다. 반면 서양어는 굴절어라 했다. 한데 우리말을 잠시만 떠올려봐도 이 말에 잘 안 맞는 대목이 많다. 보는, 볼, 봤던, 보다, 본다 등 대부분의 동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말에 동사 변형(혹은 동사 활용)이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물론 서양어보다 다채롭지 않은 건 사실이다. 재밌는 건, 일본어 쪽은 우리말보다 동사 변형이 훨씬 더 다양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일본어로는 우리말을 통한 것보다 훨씬 더 고도의 사유가 가능할 거냐는 문제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말을 지금도 교착어라 하는지, 우리말에는 동사의 굴절이나 활용이 없다고 아직도 주장하는지 궁금해져서 잠시 검색해봤다. 놀랍게도 한국어는 고립어(또는 위치어)로 분류되는데, 고립어란 “단어가 변화하지 않고 단어의 순서로 단어의 문법적 기능을 나타내므로 어순이 바뀔 수 없는 언어”라고 규정되어 있다. 흠....

6.

당연히 이런 반론들이 나올 것이다. 서양어는 단지 그런 것만이 아니라 성, 수, 격 별로도 동사나 명사, 형용사 등이 다채롭게 변형되지 않느냐? 맞다. 그렇지만 그 기준에서라면 영어는 독일어나 프랑스어에 비하면 다채로움이 거의 다 없어져버렸다. 명사, 동사, 형용사 모두 격에 따른 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거의 고립어 수준이 되었다. 한국어보다도 동사 변형 등이 잘 안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럼 영어가 독어, 불어보다 사유의 수단으로 열등하겠네. 거꾸로 불어나 독어도 같은 논리라면, 산스크리트어나 라틴어보다 훨씬 열등한 언어다. 라틴언가 산스크리트언가는 글쎄 단수와 복수 외에 쌍수도 있고 목적격 외에 당연히 여격이 있으며 아무튼 그래서 결국 동사 하나에 변형이 12종륜가 24종륜가 있더라. 그럼 정말 좋을까? 아니면 나쁠까?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만일 언어가 복잡한 변형태를 많이 가질수록 좋다면, 뭐야 그럼, 인류는 갈수록 퇴화되는 거야? 그리고 중국어는 무슨 언어도 아니겠네!

독어나 불어를 영어와 비교하여 무지 다양하고 다채롭다고 할까, 아니면 매우 둔중하고 불편하게 걸리적거리는 언어라고 할까?(독어나 불어를 보면 성, 수, 격에 따른 어미 변화를 번거로울 정도로 덕지덕지 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지 않던가). 또는 문자를 기준으로, 중국의 한자를 너무너무 다채로워 미칠 지경이라고 평가할까, 둔하기 이를 데 없이 비효율적이라고 해야 할까?(참고로 나는 언어를 비교해선 안 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언어를 비교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보면 통념이나 선입견에 지배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7. 다시 생략 문제로

최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읽다가 놀랍고도 반가운 대목과 마주쳤다. 건축가와 조수가 건설 현장에 있다가 건축가가 조수를 향해 외치는 저 유명한 상황이다. “벽돌!” 그럼 조수가 저리 가서 벽돌을 가져 온다. 단어 하나만 말했는데 어떻게 저런 상호 작용이 가능하지? 이 질문을 던진다면 누구나 쉽게 답할 것이다. “벽돌!”은, “조수! 저리 가서 벽돌을 내게 가져와!”가 생략된 문장이라고. 그런데 비트씨는 이케 묻는다. “그러나 거꾸로는 왜 안 되나? 왜 “나에게 벽돌을 하나 가져오라!”라는 문장은 “벽돌!”이란 문장을 연장한 것이라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러고는 이를 둘러싸고 엄청 복잡한 문제들을 잔뜩 던진다. 한 5초 정도 생각하고 금세 결론 지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8.

“그렇지만 어쨌든 우리말에 생략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그게 명료함보다는 불명료함을 초래하리라는 건 당연히 사실이고!” 이렇게 볼멘 소리를 하는 사람도 여전히 있겠지만 다소 격하게 반론을 가해오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것은 아마도 언어에 희한하게도 불안의 문제, 미신의 문제, 적대의 문제가 늘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트씨의 리얼한 표현을 보라. “이 가상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아무래도 그건 이렇지가 않은데!” 하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그건 이러해야 해!”(󰡔철학적 탐구󰡕 112번 중에서). 그 뒤 125번엔 수학이 우리를 뒤흔든다는 문장도 있다. “수학적 또는 논리-수학적 발견을 통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철학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trouble) 수학의 상태...”. 그리고 110번. “언어(또는 생각함)는 독특한 어떤 것이다” - 이는 문법적 착각들이 낳은 하나의 미신(오류가 아니다!)으로 판명된다.” 언어에서 발생하는 착각들 중에는 미신들이 있으며, 이는 (올바른 지식과 설명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오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9.

그래도 여전히 “여자한테는 자지가 없잖아, 동물에겐 이성이 없잖아, 식물한텐 의식이 없잖아, 광물에겐 생명이 없잖아” 등등을 외치고픈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허접한 반론은, 스스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동물의 특성에서 부분적으로 기인할 것이다. 식물들은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박테리아들은 광합성은 물론이고 다양한 화학 합성을 통해 수많은 것들을 생산하는 걸 떠올려보라.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결여를 빌미로 타자를 배척하고 폄하하고 짓누르고자 하는 지배욕에서도, 또 그 지배자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도 기인할 것이다.

10.

공원을 함께 걷다가 기분좋게 어둑해졌을 때 한쪽이 파트너에게 말했다. “사랑해”. 이 말에 파트너가 “누가?”, “누구를?”이라고 답했다....고 한다면, 이게 과연 정상적인 상태인가? 현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0.76%도 안 된다. 길에서 친구를 만나서 “학원 가?”라고 했더니 친구가 “학원 가.”라고 답했다. 여기에 무슨 결여나 불명료가 있는가?

우리말에 결여나 불명료가 없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모든 언어에는 그런 면모들이 있으니 우리말이라고 없을 수 없다. 또 어느 언어에나 과잉도, 과소도 있다. 그러니 어떤 언어에 이러저러한 결여가 있고, 그것이 그 언어의 특징이라고 판단하고 싶다면 그 전에 무척 신중한 단계들을 밟아야 한다. 그런 판단은 대부분 숙고의 결과가 아니라, 다른 어떤 단어를 이상적인 언어라고 무의식중에 상정한 결과일 것이기 때문이다.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번역자)

조회수 64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