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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어서오세요 환상의 나라에 / 마준석

최종 수정일: 9월 25일

주변 사람들과 인스타그램에서 릴스를 주고받다가 흥미로운 영상을 하나 보았다. 영상은 온라인 쇼핑 플랫폼 테무에서 구입한 크로와상 모양의 조명에 대한 것이었다. 조명에 자꾸 개미가 꼬이는 것을 기이하게 여긴 촬영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명에 구멍을 내어 보았고, 조명이 빵 부스러기처럼 부서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크로와상 조명은 크로와상 모양의 플라스틱 조명이 아니라, 진짜 크로와상에 전구를 넣고 레진으로 감싸 덮은 조명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변증법적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세밀한 기술과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점차 진짜에 가까운 가짜를 만드는 자는 바보다.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진짜를 가짜의 자리에 두는 것, 진짜를 가짜로 내세우는 것이다. 가짜는 정교한 모방을 통해 진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 사이의 구분선 자체를 흐림으로써 진짜의 지위를 획득한다. 


 

같은 논리가 K-Pop의 아이돌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이 아이돌과 아티스트를 구분하고 전자가 후자를 모방한다고 생각하는 한, 즉 “저 아이돌은 립싱크를 하면서 가수인 척을 한다”고 비판하는 한, 아이돌이 진짜 아티스트가 될 가능성은 결코 존재하지 않고 아이돌은 언제나 가짜 가수로 남을 뿐이다. 이는 오늘날 대중음악 산업의 구조적 문제인데, 아이돌은 기획사의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하기에도 벅차서 전문 보컬만큼 노래를 연습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은 해결책이란 끊임없는 노력과 투자로 아이돌을 아티스트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돌과 아티스트 사이의 구분선 자체를 흐리는 일이다. 그러니까 아이돌은 나름의 방식으로 ‘이미’ 아티스트인데, 매력적인 비주얼을 지닌 멀티 엔터테이너로서 팬들을 열광시키는 우상(Idol)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때때로 부르지 않는 마이크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고 스틱을 떨어트려도 드럼 소리는 울리는데, 이 모습이 쇼츠가 돼서 조롱거리가 될지언정 아이돌 커리어에 치명적이지는 않다. 그 누구도 얼간이처럼 아이돌 무대가 그 아이돌의 실제 실력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는 진실에 반쯤 눈 감음으로써만,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아이돌의 환상적인 세계에 입장할 수 있는 것이다.

 

가짜 혹은 환상과 관련하여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살펴볼 수 있다. 프랑스어로 모사물, 흉내, 모의 그리고 우상을 뜻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는 보드리야르에게 단순한 모사물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현실성을 지닌 가상을, 즉 하이퍼리얼리즘 이미지를 뜻한다. 그가 시뮬라크르를 설명하기 위해 ‘디즈니랜드’를 예시로 들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디즈니랜드에서 사람들은 미키와 함께 사진을 찍고 백설공주의 성에 초대받으며 아이언맨과 함께 빌딩 사이를 날아다닐 수 있다. 이 모든 이미지들이 진짜라고 믿는 바보는 아무도 없다. 다만 우리는 마찬가지로 진실에 반쯤 눈 감음으로써, 설령 이러한 외면을 스스로 자각하고 있더라도,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환상적인 꿈의 나라에 속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가 시뮬라크르로 뒤덮인 가상의 세계다’라는 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디즈니랜드의 진짜 효과는 그 안에서 환상적인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라 마지막에 출입문을 나설 때 비로소 발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디즈니랜드는 여기가 현실 너머의 환상적 공간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디즈니랜드 바깥의 현실 세계 또한 시뮬라크르의 공간이라는 사실을, 원본 없는 가상 이미지들로 채워진 하이퍼리얼리즘적 공간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바로 이 점이 디즈니랜드가 발휘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디즈니랜드는 실제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존재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실제 사물이 아니라 사물이 주는 가상적 기호를 소비하고, 가상적 기호는 원본의 자리를 차지하며, 여기서 진짜와 가짜의 이분법은 흐려진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보드리야르에 동의하면서도 그의 주장을 전도시켜서 이해해야 한다. 환상은 현실 자체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은폐하지만, 반대로 현실 자체가 현실일 수 있는 것은 환상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전도된 독해는 우리가 칸트를 보다 충실히 읽음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

 

칸트는 가상을 경험적 가상과 초월적 가상으로 나누는데, 전자는 감각 기관에 의해 야기된 가상이다. 예컨대 물컵에 담긴 빨대가 실제로는 반듯해도 눈으로 보기에는 굽어 보이는 현상이 한 가지 예시이다. 철학적으로 보다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후자의 초월적 가상이다. 초월적 가상은 이성이 경험적 인식에서만 사용해야 할 개념과 규칙들을 경험 너머에까지 적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이성의 가상이다. 이는 경험에 근거하지 않기에 객관적 실재성이 없는 “환상”(B354)에 불과하지만, 이성의 소질 때문에 뿌리 뽑을 수 없고 계속해서 어른거리는 환상이다. 칸트는 그가 이념이라고도 부르는 가장 근본적인 초월적 가상 세 가지를 도출하는데, 바로 영혼, 세계, 그리고 최고 존재자로서의 신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이 세 가지 이념에 근거를 둔 기존의 형이상학(각각 영혼론, 우주론, 신학)이 초월적 가상에 근거를 둔 체계들이며, 이 형이상학들이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성 비판을 통해 폭로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칸트를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그의 인식론에서 반쪽만 건져낸 것이다. 이념은 객관적 실재성을 결여한 경험 너머의 환상이지만, 그럼에도 경험을 확장시키고 경험에 체계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규제적 원리’(B699)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객관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초월적 가상에 준거하는 한에서만 일관적이고 유효하다. 예컨대 영혼의 성질이나 실재성에 대해 결코 이론적으로 입증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영혼 이념 자체를 폐기해 버린다면, 우리는 모든 경험을 하나로 통일하는 인격적 동일성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행복한 삶의 가능성도 잃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영혼이라는 정체불명의 환상을 참조하는 한에서만 가능해진다.

 

현실이 환상에 근거하는 한에서 현실일 수 있다는 관점은 칸트만의 기이하고 우스꽝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우리는 곧바로 다른 예시를 찾을 수 있다. 형법은 ‘법률의 부지(不知)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대원칙에 근거하는데, 이는 “그런 법이 있는 줄 몰랐어요”라는 행위자의 무지가 처벌을 면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관련된 구체적 법을 정말 몰랐던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억울한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법률에 대한 무지가 위법성 조각 사유가 된다면 누구나 법정에서 무지를 호소하게 될 것이고 형법 자체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법은 하나의 인격이 법 전체에 대한 모든 지식을 이미 지니고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이러한 환상을 통해 형법 자체를 보존한다. 형법은 모든 주체가 법에 전지(全知)하다는 환상에 근거하는 한에서만 현실적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환상은 헛된 공상이나 일상의 백일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하는 장막인 것도 아니며, 실제적인 현실에 대한 대립 개념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환상은 현실이라 불리는 그 무엇을 규제하고 통일성을 부여하며, 심지어 현실을 구성한다. 여기서 진짜와 가짜의 구분선은 지워질 뿐만 아니라, 양자가 서로를 향해 변증법적으로 전도된다.

 

마지막으로 정치 영역을 살펴보며 글을 마무리하자. 공정한 경쟁을 (또는 실상 이와 구분되지 않는 능력주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채택하는 이준석 의원은 ‘좋은’ 정치인인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는 ‘시스템의 공정함과 기회의 평등을 철저히 믿는 개인들과 그 개인들의 능력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사회’라는 환상을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들의 궁핍하고 비루한 하루가 나의 무능력과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불공평한 사회구조의 불가피한 귀결이었다는 진실이 밝혀진다면, 우리들은 더 이상 자신을 착취하지 않을 것이며 시장에 스스로를 매물로 팔아넘기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이준석 의원은 공정한 경쟁과 기회의 평등이라는 실체 없는 환상을 전파함으로써, 현 정치 체제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수행하고 사회의 현실성을 보존한다. 그렇기에 그는 (적어도 기존 지배 질서에 대해서는) ‘좋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이준석 의원이 좋은 ‘정치인’은 아니라는 말을 덧붙여야 하는데, 근본적인 의미에서 정치란 은폐된 사회적 적대를 새롭게 드러내고 이에 근거하여 사회를 재구성하는 활동이지(예컨대 민주화 운동), 이미 표면화된 적대를 공고히 하고 그에 기생하는 활동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윤석열 대통령은 ‘나쁜’ 정치인인데, 그에게는 현실을 직조하기 위한 어떠한 구성적인 환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정치적 수행을 규제하고 통일할 일관적인 철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참조하는 대립항은 “사회 곳곳에서 암약하는 반국가세력”인 것으로 보이는데, 반국가세력이 누구를 지칭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대한민국 정체성을 아주 부정하는 사람들”이라 답하면서, 이에 대한 예시로 “6.25 때의 종북 세력”이나 “간첩”을 든다. 전자의 답변은 하나 마나 한 동어반복이고, 6.25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후자의 답변은 빈곤하다.

 

아니 정확히 말해 윤석열 대통령은 ‘바보’인데, 여기서 바보란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환상적 속성을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실재적 자질로만 착각하는 사람을, 그러니까 환상을 배제하며 현실만을 붙잡는 사람을 일컫는다. 인간 윤석열이 대통령인 것은 국민들이 ‘주권’이라는 상상적 재화를 허구적으로 위임했기 때문이지, 그가 그 자체로(an sich) 대통령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자신의 본질적 속성이 지도자인 것처럼, 그리하여 자신의 말과 행동이 그 자체만으로도 권위를 지니고 따라서 국민을 일깨울 수 있는 것처럼, 단 한 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앞으로도 국민들을 반국가세력의 허위사실에 선동된 우중으로 취급하는 이상, 그래서 지지율과 여론에 얽매이지 않고서 스스로를 십자가를 진 영웅으로 간주하는 이상, 그는 영원히 바보로 남을 것이다. 실상 벌거벗고 있는데(인간 윤석열 그 자체는 대통령이 아니다) 여전히 옷을 입고 있다고 믿는 임금님처럼 말이다. 그는 환상에 속지 않을 만큼 너무 똑똑하기에, 그래서 바보가 된다.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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