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테우트와 타무스 : 기억술과 관련해 ‘문자’는 독인가? 약인가?
문자사용에 대한 우려는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라는 인물의 가상 대화에서 잘 드러난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면서 문자의 위험성에 대해 말한다.
어느 날 발명의 신인 테우트는 ‘문자’를 발명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神王 타무스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보여주며 모든 이집트인들에게 ‘문자’가 알려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①테우트는 ‘문자’가 사람들의 기억을 향상시킬 것이며 자신은 기억과 지혜를 위한 파르마콘(pharmakon)을 발견한 것이라고 타무스를 설득한다. 그러자
②타무스는 문자를 쓰는 사람들은 기억을 훈련시키지 않고 잊어버리게 될 것이며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내적인 능력 대신에 문자라는 외부적인 기호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날카롭게 테우트를 비판한다.
이 가상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문자야말로 인간에게 하나의 진실성이라는 이데아를 위협하는 매개로 보았다. 위 이야기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타무스를 지지한다. 테우트가 문자에 대해 언급했듯이 문자는 기억을 고정해주고, 사고를 논리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마찬가지로 타무스의 말처럼 문자는 우리의 기억을 감퇴시킬 수도 있다.
문자가 없던 시대, 그리고 그 문자를 쉽게 옮겨 적을 수 없었던 시기에는 오로지 사람의 기억력만으로 지식이 전승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기억력이란 오늘날 우리의 기억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지 모르겠다. 문자에 대한 논쟁을 신화적으로 구성한 이 일화는 ‘문자’의 자리에 어떤 미디어를 집어넣어도 비슷한 논쟁이 유발될 만큼, 테크놀로지와 관련한 오래된 논쟁의 구도를 담고 있다.
2.필사가 대 인쇄공: 인쇄된 글에는 신성한 가치가 없는가?
필사 대 인쇄
필사 문화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 사자실(寫字室) 중의 하나를 책임지고 있었던 수도원장 존 트리데미우스는 손으로 쓴 글이 언제나 인쇄된 글보다 훨씬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인증된 텍스트를 베껴 쓰면서 필사자들은 점차 신성한 신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기적과도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손으로 옮겨 쓰고 읽는 데에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가 우리의 마음속에 보다 뚜렷하게 각인되는 것이다.
명상 대 독서
일반 대중 대다수가 본격적으로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는 18세기 이후다. 당시에 독서는 기존의 명상하는 삶에 균열을 내는 행위였다. 아래는 독서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로버트 단톤의 진술이다.
18세기 무렵에 범람하는 인쇄물은 ‘교양의 위기’의 두려움까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는 의미와는 정반대로, 독서량이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독서 과잉으로 인한 위기였다. (……) 지나친 독서는, 20세기 미국에서 지나친 텔레비전 시청이 일종의 문화적 해악으로 여겨지는 것과 똑같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 1795년의 한 논문은 과도한 독서로 인한 신체적 영향을 나열하고 있다. “감기, 두통, 시력 감퇴, 발진, 구토, 관절염, 빈혈, 현기증, 뇌일혈, 폐질환, 소화 장애, 변비, 신경 착란, 간질, 우울증 등을 유발하기 쉽다.
Robert Darnton, The Kiss of Lamourette: Reflections in Cultural History (New York: WW. Norton, 1990), pp.171-17.
3. 만년필 대 타자기: 타자기는 쓰기의 현전을 왜곡하고 지연시키는 기계인가?
펜으로 손글씨를 쓸 때, 인간은 한 자 한 자 그것의 행을 충실히 따라간다. 생각과 글자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지고, 이 모든 행위의 일체감을 손끝에 각인한다. 또한, 필체라는 개성의 흔적이 오롯이 ‘나의 생각’이 지금 여기 흰 종이 위에 글자로 현전하고 있음을 보증해준다. 만약 프로이트라면 펜이라는 남성성기가 종이라는 여성성기와 만나 새로운 존재를 잉태하는 과정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이 역시 신체와 글자 사이의 합일을 강조하는 해석이다.
대조해보면, 자판을 누르면 타이프라이터는 종이의 올바른 위치에 글자를 찍는다. 이때 글자는 작성자의 손으로 직접 만지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손이 작업하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 위치해 있다. 언더우드의 모델도 마찬가지인데, 다음 부호가 작성될 장소는 정확히 보이지 않는 곳에 놓여 있다. 타자활동이 중지되어야 작성자가 만들어낸 문장을 읽게 된다. 이러한 맹인용 기계의 도움으로 인해 사용자가 맹인인지 아닌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역사적으로 새로운 기술, 자동적 글쓰기를 습득하게 된다.
Friedrich A. Kittler, 『Gramophone, Film, Typewriter』, stanford university, 1999. pp. 203-204
주의집중을 통한 시각적 각인능력이 불가능한 맹인은 필기능력을 가진 비장애적 신체에 비해서 결여된 신체를 보유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젠 같은 초기의 타이프라이터 발명가들은 장애를 가진 이들끼리의 커뮤니케이션 속도가 어떤 점에서는 비장애인보다 빠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것을 타이프라이터라는 기계를 통해 구현하게 된다.
맹인의 신체를 비장애인만큼이 아니라 비장애인보다 빠른 속도로 바꿔 기계와 접속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초기의 타이프라이터는 맹인용이든 그렇지 않든 결과물을 바로 볼 필요 없는 구조로 디자인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쓰기 행위에서 생각과 글자의 일체감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맹인용 타자기에 의해, 기존 글쓰기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된 맹인의 신체는 단지 결여로서 머물지 않고 되레 자동적 글쓰기를 낳는 산파가 된 것이다.
기술이 인간을 해방할 수 있다면 단지 인간 신체에 대리하는 유능함을 제공하기 때문은 아니다. 기술은 오류나 과잉사용처럼 보이는 사고를 통해 기술의 진짜 욕망을 드러내고, 오랫동안 숨겨왔던 우리들 내부의 욕망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해방시킨다. 인간은 기술의 발전으로 그 전에는 억압되어 꿈꿀 수 없었던 꿈을 드디어 꾸게 된다. 기술이 인간에 주는 해방이란 더하는 일이 아니라 잠금해제하는 일이라는 관점에서 기술이 야기하는 두려움을 본다면 어떨까? 그 두려움은 해방되기를 두려워하는 두려움. 두려운 낯섦의 구조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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