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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와 예술 / 마준석



이탈리아 설치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은 바나나를 덕트 테이프로 벽에 붙인 간단한 작품이다. 리움미술관에 전시된 이 작품은 최근 한 명의 배고픈(?) 젊은이에게 먹혔다.1) 그리고 미술관 측이 새로운 바나나를 구해 바꿔놓을 때까지 바나나 껍질이 ‘코미디언’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 젊은이의 호기로운 공명심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오만 욕 다 드셨으니 꼭 장수하길 바란다. 여하튼 그 젊은이가 4년 전에 먼저 ‘코미디언’을 먹어치운 행위예술가 다투나를 따라한 까닭은, 벽에 테이프로 붙어있는 바나나가 과연 예술인지, 만약 예술이라면 그 바나나를 먹는 행위나 혹은 바나나 대신 붙은 껍질도 예술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묻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Ist das Kunst oder kann das weg?”(이거 예술인가요? 아니면 갖다버려도 되나요?) 독일에서 널리 쓰이는 예술에 대한 농담이다. 그리고 사실 농담만은 아닌 것이, 청소노동자가 현대 설치 예술을 말끔하게 정리해 버리는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 2016년에는 독일 만하임의 한 교회에 설치된 로마나 멘체 쿤의 작품 ‘Behausung(거처) 6/2016’의 일부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금색 호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쉴 곳 없는 이들과 그들을 위한 거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청소노동자가 보기에 앞쪽에 널브러진 호일 조각 세 개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 호일 세 조각은 쉴 곳 없는 이들을 상징하는 부분이었으니, 오갈 데 없는 이들이 쓰레기통에서야 비극적인 안식을 찾았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멘체 쿤은 작품의 훼손에 크게 상심했으나, 호일이 처박힌 쓰레기통을 통째로 끌고 와 다시 작품의 일부로 만들었다.

*Romana Menze-Kuh은 작품 <Behausung 6/2016>를 쓰레기통과 통합해 <Behausung 6a/2016>로 재명명했다.


2015년에는 이탈리아에서 ‘Where shall we go dancing tonight?(우리 오늘 밤 어디로 춤추러 갈까?)’라는 이름의 설치 작품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빈 샴페인 병, 담배꽁초, 색종이 조각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청소노동자의 성실함 앞에서는 그저 난장판에 불과했다. 2014년에는 살라 무라트의 작품이, 2011년에는 마르틴 키펜베르거의 작품이, 2005년에는 미하엘 보이틀러의 작품이, 2004년에는 구스타프 메츠거의 작품이, 2001년에는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이, 그리고 여타의 수많은 작품들이 청소노동자들의 눈을 피하지 못해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아이고 이게 다 뭐람” 중얼거리면서 성실하게 치웠을 청소노동자의 마음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뒷맛이 찜찜하다. 도대체 예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예술을 예술이게끔 하는가? 어째서 같은 대상이 누군가에게는 예술작품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그냥 치워야 할 난장판으로 보이는 것인가.


*Goldschmied와 Chiari의 작품 <Where shall we go dancing tonight?>를 청소부가 깨끗하게 치운 모습. 전후.


만약 상황이 이렇다면, 예술이란 어떤 한 사물이 담지하고 있는 속성이나 성질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물이 예술성이라는 속성을 예화하는 한에서만 예술작품이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만약 그랬더라면 작품의 예술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모두 일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예술임’이라는 속성이 분명히 있고, 어떤 사물이 그 속성을 가지거나 가지지 못하거나 할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사람마다 예술작품을 다르게 대하는 상황은 그저 인지적 결함이나 착각과 관련된 인식론적 문제인 것이다. 그 경우에 어떤 사람이 더 많은 예술적 지식을 획득하고 동시에 분명한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는 작품의 예술적 의미를 명석하고 판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작품을 예술적 의미를 전달하는 수동적 매체로서만 간주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다시 말해 매질이 있어야만 소리가 전달되는 것처럼, 작가는 예술성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작품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작품이 지닌 예술적 의미와 작품의 매체적 성격 간의 확고한 이분법이 작용하고 있으며, 후자는 전자에 비해 부차적인 위치만을 점하고 있다.

그보다 상황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다시 소리의 예시를 들어보자면, 공기와 같은 매체가 있어야만 음파는 전달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음파와 공기가 확고하게 분리되어서, 공기는 단지 음파의 전달이라는 수단적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음파가 먼저 존재하고, 그다음에 음파가 공기 위를 타고 지나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음파는 공기의 압축과 팽창, 즉 공기의 진동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음파는 매질의 움직임과 실재적으로 구분(distinctio realis)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개념적으로만 구분(distinctio rationis)된다. 음파는 오직 공기의 움직임으로만 존재할 수 있고, 또한 바로 그 움직임 자체이기 때문이다.

전달되는 것과 전달하는 것이 실재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예술창작의 맥락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작품의 의미가 먼저 존재하고, 그 후에 작가가 이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매체를 찾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예술작품의 의미란 그것이 의지하고 있는 매체 자체의 움직임이며 또한 매체와 이미 공속하고 있다. 매체는 의미 전달을 위한 수동적인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의미작용의 효과를 산출한다. 매체가 산출하는 효과는 창작자가 의식적으로 의도했던 일차적인 의미를 넘어선 심층의 의미 혹은 기저의 의미를 이룬다. 따라서 매체가 발산하는 이러한 이차적인 의미는 창작자의 의식적인 자아가 완전히 통제하고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다. 예컨대 카텔란의 ‘코미디언’이 두 차례에 걸쳐 뜯어먹힐 수 있었던 까닭은 그 작품이 진짜 바나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관람객에 먹힌 일은 카텔란의 의도와 예상을 벗어나 있는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으로 제기되는 예술에 대한 의문은 바나나라는 매체가 스스로 산출해 낸 자율적인 의미 지평인 것이다.

애초에 리움미술관은 작품의 ‘신선도’를 위해 주기적으로 바나나를 교체하고 있었다. 작품 ‘코미디언’의 실체는 거무죽죽해지는 바나나가 아니라, 벽에 테이프로 바나나를 붙인다는 관념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나나가 먹히든 썩어 뭉그러지든 작품 ‘코미디언’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바나나는 언제든 교체 가능하다. 그러나 이 사실은 ‘코미디언’이 관념적 의미로만 이루어져 있으며, 매체로서의 바나나가 부차적인 위치만을 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나나가 그 고유한 성질로 인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다는 점이 작품의 관념성을 지탱하고 강조한다. 만약 카텔란이 초기에 구상했던 바와 같이 실제 바나나가 아니라 플라스틱 혹은 금속 모형 바나나가 사용되었다면, ‘코미디언’은 모형 바나나와 동일시되었을 것이며 작품의 관념성은 결코 강조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의 관념성은 작품의 매체적 물질성에 의존하며 그에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창작 과정에서 작품의 매체는 자신들의 고유한 리듬으로 꿈틀대기 시작하고, 어느새 창작자를 뒤로 내다버린 채 또 다른 의미의 층차를 직조한다. 작가는 어느새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밀려나오고, 작품이 스스로를 펼쳐내는 것을 목격하고야 마는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창작자의 권능이란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다. 매체가 자율적으로 운동하는 한에서, 어떠한 창작자도 자신의 작품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통제를 획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코미디언’이 야기한 일련의 모든 사건들은 작품의 자기 전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제 ‘코미디언’은 핸드폰, 아보카도, 가지, 신던 양말의 온갖 모습으로 오만 기이한 곳에 다 붙어있다. 카텔란의 손을 떠난 ‘코미디언’은 사람들의 유머를 매개로 계속해서 더 풍부한 외연과 의미를 획득한다.


인스타그램 #cattelanbanana

우리가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는 매체의 자율적 힘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예술창작에서 작가의 자아와 권능을 중요시하는 좁은 관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예술작품은 창작자가 독립적으로 제조하는 제작품이 아니다. 창작 과정에는 작품의 매체 자체가 하나의 다른 주체로서 개입하고, 수용 과정에서는 관람자라는 또 다른 주체가 등장하며, 이것들이 함께 의미를 산출한다. 덧붙여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과 소개되는 방식, 작품에 덧씌워진 사회 문화적인 배경과 타인들의 논평 전부 저마다의 매체로서 기능하며 작품의 의미를 산출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의 작품이란, 무수한 맥락 속에서 끊임없이 파괴되면서 동시에 창조되는 운동 자체를 일컫는다. 따라서 때때로 작품이 뜯어먹히든 쓰레기통에 버려지든 우리가 너무 심각해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술이란 모두 재미없는 ‘코미디언’의 하염없는 중얼거림에 불과할 테니까.

관심과 칭찬을 기대했건만 욕만 거하게 드신 그 젊은이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본인의 행위를 스스로 작품이라 여겼으니, 그 작품이 자신의 손을 떠나 본인을 조롱하는 이 사태 또한 하나의 작품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작품은 작가의 모든 의도와 예상을 배반하며 작가를 내던지고, 이러한 비극은 작가가 언젠가 맞이해야 할 필연적인 운명이다. 부디 그 운명을 즐겁게 감내하기를!

1) “‘1억짜리 바나나’ 먹은 서울대생...작가는 괜찮다는데 네티즌 싸늘, 왜?”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3/05/03/CFNFZAM4R5GD7BZ3PN6JDFJEKQ/)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과정)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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