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가는 바람 / 김동규

미당의 절창 가운데 하나인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는 이렇게 시작한다.


“섭섭하게,/그러나/아조 섭섭치는 말고/좀 섭섭한듯만 하게,//이별이게,/그러나/아주 영 이별은 말고/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연꽃/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엇그제/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 두 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막 연인과 헤어진 상황이다. 애틋한 사별일 수도 있고 흔하디흔한 이별일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시적 화자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에 진저리치고 있다. 긴급한 애도작업이 요청된다. 애도작업이란 쉽게 말하면 견디기 힘든 이별의 슬픔을 견딜만하게 다듬는 마음의 작용을 뜻한다. 그럼 애도작업을 어떻게 수행하는 것이 좋을까?


당연히 슬픔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 아주 큰 것을 ‘좀’ 작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슬픔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슬픔을 부정하거나 없애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거부하거나 부인할수록, 슬픔이 사라지기는커녕 속수무책으로 더 옥죄기 때문이다. 그래서 맨 먼저 ‘섭섭하게’ 그리고 ‘이별이게’라고 진솔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슬픔을 긍정하는 것, 이것이 애도작업의 첫 단추다.


비유컨대 이별의 슬픔은 내게 찾아온 일종의 손님이다. 주인은 손님을 외면하지 말고 일단 환대해야 한다. 물론 그 슬픔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손님이다. 당장 내쫓고 싶은 불청객이다. 하지만 내게 당도한 이상 환영해야 한다. 그런 다음, 사려 깊은 ‘그러나’를 내뱉을 수 있어야 한다. 해일 같은 슬픔이 찾아왔다. 손님치레는 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손님은 강도로 돌변할 수 있다. 무시무시한 그 감정이 나를 잠식해 주인행세를 할 수도 있다.


미당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견딜만하게 만드는 두 가지 비법을 전해 준다. 먼저 고통스러운 현실을 떠나 가상의 세계로 진입하는 방법이다. ‘섭섭한듯만 하게’라는 감각적 가상이든 ‘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라는 믿음의 가상이든, 아무튼 가상세계에 들어가 슬픔을 완화시킨다. 망망대해 돛단배에서 만난 폭풍과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폭풍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현실과는 다른 세계에 들어가 현실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는 방법, 이 방법을 두고서 사람들은 기껏해야 ‘정신 승리법’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피할 수조차 없는 인생은 얼마나 끔찍한가.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비명은 일종의 구조신호다)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오락가락 넘나드는 것을 타박할 수 없는 법이다. 황급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일이지 비난할 일은 결코 아니다.


다음으로 슬픔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연인에게서 받는 슬픔의 상당수가 연인에 대한 기대에서 온 것(기대의 좌절)이기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과거로 시간을 맞춰놓는 것이다. ‘만나러 가는’ 기대를 아예 ‘만나고 가는’ 추억으로 전환시킨다. 통상 추억이 아름다운 이유는 추억이 직접적인 고통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기대의 배신’을 염려할 필요가 없으며, 시간의 거리를 두고 사태를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까마득하고 아련하게 슬픔이 저만치 떨어져 있다. 이렇게만 되면 이별의 슬픔은 견딜만한 것이 된다. 심지어 간직할만한 것까지 된다. 어느덧 아름답게 변모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당에게 애도작업이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슬픔을 아련한 추억으로 가공해 내는 슬기로운 체념을 뜻한다.


한이 맺히다가도 풀리는 것이라면, 멜랑콜리는 애초부터 풀리는 감정이 아니다. 멜랑콜리는 맺고 푸는 실(관계)이 아니라 체액의 색깔(실체)이라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서양식 애도작업의 모델은 알렉산더 대왕의 고르디우스 매듭 자르기에 가깝다. 애도작업의 성공은 상실된 대상으로 향하는 리비도의 집중과 고착을 싹둑 잘라내는 데 있다. 바꿔 말해서, 상실 대상을 ‘단념(斷念)’하는 것이다. 반면 한에서는 다른 방법이 동원된다. 「원한의식과 원령의식」이란 글에서 김열규는 달관과 체념을 그 방법으로 꼽고 있는데, 특히 단념과 체념을 구분하는 대목이 주목할 만하다. “자신에게 눈먼 사람일수록 한은 짙어간다. 아집의 강도와 한의 농도는 정비례한다. 한의 통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달관이 있어야 한다. 달관이 어려우면 단념이라도 있어야 한다. 체념은 단념보다 높은 경지라서 더욱 소망스럽다. … 따라서 체념이란 달관의 상념, 깨닫는 마음, 사물과 세계를 심리(審理)하는 마음이다. 묘체(妙諦)나 진체(眞諦) 또는 요체(要諦)라고 할 때의 체(諦)는 모두 이(理)나 도(道)에 통해 있다.”


자기집착에서 벗어나야만 고통의 질곡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런데 벗어나는 방식에 있어서 단념과 체념은 서로 다르다. 단념이란 사랑 대상으로 향하는 욕망을 과감히 끊어버리는 것이다. ‘정(情)을 떼는 것’이다. 단순 명쾌한 방법이기는 한데, 이것은 사랑 자체를 거부할 위험이 있다. 사랑 대상을 쉽게 바꾼다거나 실연 이후 과도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이 사랑의 무능력자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에드바르트 뭉크의 '멜랑콜리'

반면 체념이란 깨달음을 통해 도달한 초월의 공간에서 한의 고통을 견뎌내는 방법이다. 즉 긴 호흡으로 뒤엉킨 감정의 실 꾸러미를 하나씩 풀면서 자신의 깨어짐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요컨대 단념이란 사랑 주체의 ‘뜻대로’ 관계를 정리하려는 능동적 행위인 데에 반해, 체념이란 ‘뜻대로는 안 된다’는 뼈아픈 각성을 기저에 깔고 있는 달관을 가리킨다.


헝클어진 사랑의 끈을 싹둑 잘라내는 일은 위험하다. 한 오라기 실처럼 보이는 것도 알고 보면 (물레로 자아낸) ‘꼬인 실들’의 집합체다. 관계의 끈은 원래부터 꼬일 수밖에 없다. 감당못할 정도로 뒤엉킨 관계는 단절하기보다는 풀어내는 것이 현명하다. 물론 오랜 고통의 시간이 요구된다. 엉클어진 것을 풀려면, 긴 시간 말고도 냉정히 사태를 직시하면서 자기를 내려놓는 체념이 요구된다. 예로부터 한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결국 애도작업에 있어서 한국인과 서양인은 다른 길을 걸었다. 한국인이 오랫동안 한을 삭이면서 깨달음을 얻는 ‘체념’의 길을 택했다면, 서양인은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과감한 ‘단념’의 길을 택했다.


김동규(철학자, 한국연구원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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