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모크리토스의 이면 / 박성관

최종 수정일: 3월 9일

1. 맑스가 노동가치설을 창시했다던가 다윈이 갈라파고스에서 진화론을 창시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아직도 꽤 있을 텐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이게 단순 지식의 차원을 넘어 꽤 해롭다는 점이다. 그들이 맑스주의라 알고 있는 것은 스탈린주의일 것이고 진화론이라 알고 있는 것은 실질적으로 창조론에 꽤나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2. 데모크리토스와 관련해서도 정도는 덜 하지만 유사한 오해가 있다. 그건 데모크리토스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라 생각하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출생 연도에는 세 가지 설이 있다(고대인이니까 이런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지?). 그중 한 가지는 소크라테스(BC 470년)보다 이전 사람이라는 거고(이건 가능성이 높지 않다), 나머지 둘은 나중 사람이라는 거다. 세 가지 설 중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건 BC 460년?이다(이렇다면 소크라테스보다 10년 뒤 출생자다). 󰡔고대 원자론󰡕에 따르면, 이건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데모크리토스를 소크라테스보다 낡은 사상가로 보이게 하려는 저의의 산물이다. 아니 누가, 왜 그런 짓을?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시라. 참고로 말해두자면 󰡔고대 원자론󰡕은 지지난해 내가 읽었던 책 중 가장 재밌고, 유익했고, 근사했다.


3.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이라는 책이 있다. 고대 사상가들의 말을 한 권에 모은 것으로 그들이 쓴 글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용된 구절들이 모여 있다. 꼭 필요했던 작업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성취했다고 해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글쎄, 이 책의 마지막이 14장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다. 책 제목에서 ‘소크라테스 이전’이라는 말을 빼든가 아니면 데모크리토스 항목 전체를 빼야 옳다. 이 문제는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로도 이어진다.

4.

“색깔이 있다고들 하지, 달콤함이 있다고도, 씁쓸함이 있다고도 하지, 그러나 정말 존재하는 것은 원자와 허공뿐”.

그의 말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이다. 감각 불가능한 원자와 허공만 실재하며,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감각들은 허상이라는 말이다. 대중 과학서에서도 다들 이렇게 소개한다. 틀린 해설은 물론 아니다. 문제는 그가 이와 반대되는, 최소한 상보적인 다른 주장을 했다는 데 있다. 이 후자의 주장이 없다면 그를 고대의 여러 자연철학자 중 한 명에 불과하다고 간주해도 억울할 게 없다. 이 세계의 근원이 이거다, 아니 저거다 선언했던 소위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말이다.

5. 여기서 잠시, ‘이전 철학자들’이 소크라테스(BC 470년)보다 (훨씬) 먼저 출생했다는 걸 확인해두자. 아르케를 물이라 보았던 탈레스(BC 624년), 아페이론(무한정자)라 했던 아낙시만드로스(BC 610년), 공기라 한 아낙시메네스(BC 585년?), 불이라 한 헤라클레이토스(BC 540년?). 시기도 그렇지만 우주의 근원을 물이다, 불이다 싸우는 스타일이 좀 되어 보이기도 한다. 데모크리토스는 그들과는 다른, 심지어는 자기의 말(원자와 허공만 있다)과 상반되는 듯 보이는 주장까지 했다. 바로 이 말이다.

6. “증거를 떠나서는 시작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이것[증거] - 이것으로부터 그가 근원들(archai, 아르케들)을 취했음에도 – 에 대해 거만하게 군다면 어떻게 신뢰받을 수 있을까? 데모크리토스도 [감각적] 현상들을 비판했을 때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 감각들로 하여금 사고에 맞서 이렇게 말하게 했다. 가련한 마음이여, 그대는 우리에게서 믿음[의 증거]들을 얻으면서도 우리를 뒤엎는가? [우리의] 전복(顚覆)은 그대에게는 몰락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 그는 이미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한 차원 높여놓은 시대에 아르케를 독단적으로 주장한 꼰대가 아니었다. 감각적 현상으로부터 아르케(근원)들을 취했으면서 그 현상들에 대해 거만하게 구는 저차원적인 사상(가)들을 비판했던, 당대의 첨단 사상가였다. 아르케라는 단어를 아는 독자라면 감각이나 현상을 ‘아르케’라 부르는 대목에 놀랐을 것이다(‘아르카이’는 ‘아르케’의 복수다).

데모크리토스처럼 나도, 현상과 감각을 절대시하는 걸 반대한다. 그렇지만 데모크리토스처럼 나도, 현상과 감각을 가상일 뿐이라고 보는 것 또한 반대한다. 이 두 가지 판단으로부터 합리적 결론을 도출해보면 이렇게 된다. “감각과 이성, 경험과 사고는 참된 인식을 위한 상호 보조물이다.”

7. 현대 과학자들, 특히 물리학자들은 흔히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은 다양한 빛깔이나 소리를 경험하지만 그것은 모두 광파나 음파의 진동수 차이의 산물일 뿐이다. 뜨겁고 차갑고 미지근하고 그런 것도 분자들의 운동 속도 차이가 우리에게 그렇게 현상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까지는 물리학자로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선을 넘는 것은 이에 입각하여 경험과 현상은 환상이고 오류의 원천이다, 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더 증세가 심한 사람은 수학만이 참되다고 엄숙한 표정으로 선언한다. 데모크리토스가 살아있다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너 지금 말한 그런 사실들을 어떻게 알았니?”, “그리고 그게 참된 사실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니?”, “앞으로 다른 경험들을 결코 하지 않을 거라 어떻게 확신하니?”

8. 과학과 경험이 대립된다고 보는 건 과학의 바탕과 토대를 스스로 허문다. 그래서 결국 과학에 반하는 사고다. 도리어 바람직한 과학이라면 사람들의 경험과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해가야 한다. 특히나 과학 및 의료 분야로만 한정될 수 없는 코로나 사태에서는 이런 발상이 더 중요하다. 단, 여기서 ‘경험’이라는 걸 개인적 차원으로만 떠올려서는 곤란하다. 집단적인 경험, 전 지구적인 그리고 미래의 경험까지 폭넓게 사고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는 아무리 좁게 잡아도 (의료 범위를 넘어) 공중 보건과 사회 정치의 문제고, 넓게는 지구 생태계와 관련된 중대한 사태다. 이걸 의료의 문제라고만, 사악한 병균을 맞아 벌이는 전쟁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사람들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한번 여기에 씌이면 다른 게 일체 안 보인다.

그들은 한국 사회의 높은 백신 접종률을 보면서도 계속 접종률을 더 높이는 것만이 대안이라고 믿는다. 백신 부작용을 염려하며 청소년과 어린이 접종을 압박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레기들에 의해 선동당한 사람들로만 보인다. 공기와 물이 갈수록 더러워지고 플라스틱으로 세상이 가득 차게 상황을 방치하면서 인류의 몸만 건강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빨리 백신 많이 맞고 코로나 사태가 걷히면 다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지구 전체와 장래를 내다보며 사람들과 함께 차근차근 나아가려는 현명한 태도가 소중해진다.

과학이 문제라기보다는 과학이 모든 걸 해결해줄 거라는 과도한 믿음이 문제다. 과학 활동은 몰라도 과학 자체는 사회나 정치, 생태와는 별도의 객관적 세계라는 비현실적인 믿음은 해롭다, 과학에도, 또 세상 전체에도.


박성관(독립연구자, <중동태의 세계>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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