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에 대한 걱정과 염려는 정권 초기부터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시국선언문으로 표출됐다. 각 대학의 교수협의회와 학생회, 노동조합과 시민단체를 비롯한 수많은 개인과 단체들이 앞 다퉈 윤 정권의 폭정과 실책에 대한 분노를 써내려갔다. 절박한 내용과 변변한 형식을 갖춘 수많은 선언들이 물밀 듯 터져 나왔다. 잘못된 방향으로 직진하는 윤석열 정권이라는 폭주기관차를 온몸을 부딪쳐 희생하더라도 막아 세우기 위한 시민들 공동의 노력이었다. 즉, 계엄과 탄핵이라는 ‘윤석열이라는 수모’를 통과하고 있는 지금, 발표된 수많은 시국선언문들은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보통의 존재들이 함께 외치는 공동의 목소리인 동시에 가장 구체적이고 정돈된 개인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시국선언문은 현재의 사태에 대한 냉철한 비판을 토대로 변화를 바라는 구체적인 의도를 담은 개인과 단체의 요구를 주장하는 글이다. 현실에 대한 분노의 태도뿐 아니라 앞으로 수행해야 할 과제와 임무를 분명하게 적시하다 보니 아무래도 파토스가 가득하거나 혹은 경직된 문장들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시국선언문은 사람들 사이로 넓게 퍼져나가는 읽을거리가 되는 일이 드물다. 비슷한 형식이거나 내가 이미 인식하고 있고 알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많은 품과 긴 시간을 들여 작성했을 각종 시국선언문들이 충실한 독자를 만나지 못하고 쉽게 건너뛰어지거나 눈여겨봐지지 않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그렇게 바람에 날려 흩어지고 벽에 붙어 찢기거나 빛바랜 수많은 시국선언문들을 보고 있자면, 윤석열 정권 하에서 민주주의의 온전한 복원과 공공성 회복을 위한 우리 사회의 다분한 노력들이 무화될까 염려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누가 썼는지 무슨 내용인지 그다지 관심이 없던 시국선언문을 사람들이 함께 읽고, 여러 곳으로 전하며, 화제 삼아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경희대 시국선언문>이라 불리는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로 시작되는 전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선언문이 우리 앞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적 없는 새로운 문법과 낯선 감각으로 쓰인 <경희대 시국선언문>은 선언문이라는 미디어가 가닿을 수 있는 최대치의 감정 격발과 공감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은 “누가 썼는지 알고 싶게 하는 글” 혹은 “교수님들 공감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대표적인 호응을 통해 알 수 있듯, 선언문이라는 글이 보통 누리지 못한 의외의 반응과 효과를 가져왔다. 발표 직후 언론사는 물론 각종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급속히 유포되고 확산됐다. 일종의 ‘선언문 팬덤’이 형성된 셈이다. 사람들은 시나 소설 같은 문학작품을 읽듯 경희대 시국선언문 시간을 할애해 한참을 읽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은 첨단 장치들이 난무하는 뉴미디어 시대에 벽보 형식의 올드 미디어가 거둔 일종의 예기치 못한 문학적-사회적 성취이기도 했다. 폄하되거나 종종 사라질 대상으로 취급받기까지 했던 시국선언문이 어떻게 다시 대중의 감정을 고양시키고 회자될 수 있는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회적 화두를 담고 있는 문학적 문장은 여전히 힘이 세다. 날선 정치 구호보다 공감하는 문학의 언어가 훨씬 더 사회적일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한다.

시국선언문은 참여하고자 하는 공통의 뜻을 가진 단체의 명의로 발표된다. 개인이 초안을 짜더라도 여럿이 함께 쓴 글로 봐야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대학 주변에서 일을 하고 살다 보면, 교수들의 공동선언문이 어떤 과정과 절차를 통해 발표되는지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로 국문학과 초임교수 혹은 교수협의회의 간사 급 실무 교수가 초안을 잡고 회람을 해 뜻에 동의하는 더 많은 참여자들을 모으고, 연대서명을 받는 형식을 거친 뒤에 참가자 몇 명 식으로 전체 성원의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병기해 발행한다. 즉, 공동이 쓰지만 주도적으로 글을 쓰는 누군가의 문학적 취향이나 글쓰기 능력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략 어느 대학의 어느 단체 협의회의 선언문이 나왔을 때, 알 만한 사람들은 과연 이 선언문은 누가 썼는지 충분히 짐작하거나 좁혀 나갈 수 있다. 이 선언문을 쓴 사람은 예상대로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장문석 교수였다. 그는 40대 초반의 젊은 교수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소설과 비평을 비롯한 현대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선언문이 화제가 되어 계엄 이후에는 국회에 불려가 선언문을 쓴 경위와 의미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경희대 선언문>에는 비정상적인 세계 속으로 청년세대를 밀어 넣은 어른들의 죄책감과 미안한 감정이 다분히 표현돼 있다. “나는”으로 시작되는 이 선언문의 문장과 내용들은 절제되었으나 격앙되기 충분하며, 잔잔한 듯 하나 큰 여운이 남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담담하면서도 처연한 문장들은 윤석열 정권 하의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느낄 수밖에 없는 막막하고 참담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부조리한 시대를 견디며 살아왔던 선생이 느끼는 비애와 부끄러움의 정서가 이토록 투명하게 여과 없이 전달된 선언문이 있었던가.
<경희대 시국선언문>의 발화자인 교수들은 지금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어지러운 시대 속에서 길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다. 주로 1990-2000년대 대학을 다닌 현재의 대다수 대학 교수들은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과제를 수행하는 동시에 청년들의 몫이 사라진 시대를 최초로 경험한 세대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세속적 욕망 성취와 공공적 임무 수행 사이의 긴장과 갈등 국면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하고 개인과 사회의 균형추를 찾기 위한 분투를 거듭해 온 존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언문을 쓴 선생들은 2024년 윤석열 정권 하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의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태도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의 대학은 개인적 성취만이 중요하게 취급되며 사회적 과제에 대한 관심은 일방적으로 약화돼 온 게 사실이다. 개인의 성취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조건들이 너무나 강고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적 가치의 훼손이 심각해진 윤석열 정권이 돌연 출연하면서 학생들은 공적 자아로서의 역할을 새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10대 시절 세월호 참사와 20대 시절 이태원 참사를 겪은 현재의 대학생들은 겉으로는 철없고 사회적 과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보이지만 실상 “이 사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오랫동안 품고 살아온 세대이기도 하다. 즉, <경희대 선언문>이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개인의 성취와 시민-됨의 임무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고민과 방황에 깊이 공감하고 위로를 건네며 먼저 반성하는 어른의 태도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담담하고 조용하게 사과와 회한을 늘어놓은 선생의 말이 꼰대의 언어가 아닌 동료 어른 시민의 말로 인식되는 순간, 학생들은 눈과 귀를 스스로 활짝 연다. 무참한 시대의 도래를 막아내지 못한 어른으로서의 미안한 마음을 진실하게 표현하는 선생과 자신들이 여기 구렁텅이에 빠져있다며 손을 놓지 말아달라고 외치는 학생들이 함께 있을 때, 비로소 대학은 제대로 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 공감과 연대의 지점에 올라섰을 때 대학에서 우리는 개인의 세속적 욕망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공적 의무가 늘 결렬되지만은 않을 수 있다고 비로소 힘주어 말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역대 가장 낮은 목소리로 표현된 교수들의 이 선언이 윤석열 정권이라는 혼돈 속에 학생들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선생들의 가장 또렷한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진 이유이다.
그렇기에 내내 “나는”으로 시작해 술회된 문장들의 말미에 주어를 “우리”로 바꾸어 힘주어 주장한 마지막 단락의 문장들이 더욱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 질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이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면서 만들어갈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일지 토론한다. 우리는 이제 폐허 속에 부끄럽게 머물지 않고, 인간다움을 삶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말과 현실을 발명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낸다.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무관심하며,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무지와 무책임으로 제멋대로 돌진하는 윤석열은 즉각 퇴진하라!”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즉각 퇴진하라!>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
나는 매일 뉴스로 전쟁과 죽음에 대해 보고 듣고 있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 전쟁에 연루되려고 하고 있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평화와 생명, 그리고 인류의 공존이라는 가치가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가치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는 역사의 아픔이 부박한 정치적 계산으로 짓밟히는 것을 보았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보편적 인권과 피해자의 권리를 위해 피 흘린 지난하면서도 존엄한 역사에 대한 경의를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는 여성과 노동자와 장애인과 외국인에 대한 박절한 혐오와 적대를 본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지금 우리 사회가 모든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사회라고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는 이태원 참사 이후 첫 강의에서 출석을 부르다가, 대답 없는 이름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알지 못했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학생의 안녕을 예전처럼 즐거움과 기대를 섞어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는 안타까운 젊은 청년이 나라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어도, 어떠한 부조리와 아집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알지 못한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군휴학을 앞두고 인사하러 온 학생에게 나라를 지켜줘서 고맙고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 격려하지 못한다.
나는 대학교 졸업식장에서 졸업생이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팔다리가 번쩍 들려 끌려나가는 것을 보았다. 더 이상 나는 우리의 강의실이 어떠한 완력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절대 자유와 비판적 토론의 장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나는 파괴적 속도로 진행되는 대학 구조조정과 함께 두 학기째 텅 비어있는 의과대학 강의실을 보고 있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지금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 교육의 토대가 적어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지탱되기에 허망하게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는 매일 수많은 격노를 듣는다. 잘못을 해도 반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격노의 전언과 지리한 핑계만이 허공에 흩어진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잘못을 하면 사과하고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도록 다짐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존중의 첫걸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는 매일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가 무너지며 공정의 최저선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고 듣는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공정을 신뢰하며 최선을 다해 성실한 삶을 꾸려가는 것이 인간다운 삶의 보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나는 매일 신뢰와 규범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자발적으로 규범을 지키는 것이 공동체 유지의 첩경이라 말하지 못한다.
나는 매일 수많은 거짓을 목도한다. 거짓이 거짓에 이어지고, 이전의 거짓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더 이상 나는 강의실에서 진실을 담은 생각으로 정직하게 소통하자고 말하지 못한다.
나는 매일 말의 타락을 보고 있다. 군림하는 말은 한없이 무례하며, 자기를 변명하는 말은 오히려 국어사전을 바꾸자고 고집을 부린다. 나는 더 이상 강의실에서 한 번 더 고민하여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말을 건네고 서로의 말에 경청하자고 말하지 못한다.
나는 하루하루 부끄러움을 쌓는다. 부끄러움은 굳은살이 되고, 감각은 무디어진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나는 하루하루 인간성을 상실한 절망을 보고 있고, 나 역시 그 절망을 닮아간다.
어느 시인은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앞자락에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리라는 미약한 소망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어두었다.
나는 반성한다. 시민으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나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나는 취약한 사람이다. 부족하고 결여가 있는 사람이다. 당신 역시 취약한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는 취약하기 때문에, 함께 목소리를 낸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인류가 평화를 위해 함께 살아갈 지혜를 찾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역사의 진실 앞에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모든 사람이 시민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갖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서로의 생명과 안전을 배려하는 방법을 찾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이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럼없이 표현할 권리를 천명하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우리가 공부하는 대학을 신뢰와 배움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잘못을 사과하는 윤리를 쌓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신중히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정한 규칙을 찾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서로를 믿으면서 우리 사회의 규칙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진실 앞에 겸허하며, 정직한 삶을 연습하고 싶다.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존중과 신뢰의 말을 다시금 정련하고 싶다.
우리는 이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면서 만들어갈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일지 토론한다.
우리는 이제 폐허 속에 부끄럽게 머물지 않고, 인간다움을 삶에서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말과 현실을 발명하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낸다.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무관심하며, 거짓으로 진실을 가리고,
무지와 무책임으로 제멋대로 돌진하는 윤석열은 즉각 퇴진하라!
2024.11.13.
경희대학교 ·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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