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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관하여 / 김동규

과거에 낭만주의라는 예술사조가 있었다. 그 낭만주의는 사라진 지 오래다. 서구 지성인들이 한때 열광했던 것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아쉬움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낭만적 아이러니 수사법) 낭만이 사라진 시대는 왠지 허전하다. ‘낭만이 없다’는 말은 여전히 순수를 상실했거나 드높은 꿈과 이상을 잃었다는 의미로, 아니면 삶의 멋과 여유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일까? 낭만주의는 사라졌어도, 낭만만큼은 우리 곁에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낭만주의는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그와 함께 낭만까지 사라지고 말았다.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린’ 격이다.


독일 낭만주의 전문가 최신한 선생에게 배운 것인데, 과거 낭만주의의 중심 테마는 크게 1) 무한성에의 동경, 2) 거룩한 슬픔, 3) 개성적 보편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초기 독일 낭만주의자들 중에는 노발리스, 쉴레겔 형제, 셸링, 슐라이허마흐 등이 있었다. 독일 낭만주의는 칸트의 지적 유산, 즉 인식 가능한 현상계와 인식 불가능한 물자체의 이원론을 극복하려 했다. 이 점에서 낭만주의는 피히테, 쉘링, 헤겔로 이어지는 독일 관념론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관념론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관념론이 이성의 개념적 앎을 통해서 유한과 무한의 단절을 통합하려 했다면,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적 이성의 독단과 오만을 비판하며, 감성과 직관, 상상력과 개성적 삶의 역동성을 통해 무한에 다가서려 했다.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oil painting by Caspar David Friedrich, 1818.

낭만주의는 한편에서는 인간의 유한성을 철저히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무한에 대한 동경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바꿔 말하면, 무한에의 도달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불가능성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승인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무한과 합일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의 존재이자, 동시에 무한한 동경을 품고 끊임없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거룩한 존재임이 밝혀진다. 절대자에 대한 절대 지식이 아니라, 유한한 이해와 해석만 가능하다. 오직 해석의 무한한 열림을 통해서만, 인간은 무한과 접속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무한과 유한, 성과 속, 기쁨과 슬픔, 영원과 순간 등등의 역설적 구조로 엮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자의 관심사는 무한의 어두운 심연 속에서 어떻게 청량한 샘물(유한)을 길어 올릴 수 있는지로 압축된다. 낭만주의가 두레박으로 삼은 것은 아름다운 가상을 창작하는 예술적 직관과 종교적인 절대 의존의 감정, 그리고 무한히 열린 철학적 이성이다.


과거 독일 낭만주의자는 그렇다고 치고, 우리의 낭만주의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게는 시인 임화의 「해협의 로맨티시즘」이 떠오른다.

“바다는 잘 육착한 몸을 뒤척인다./해협 밑 잠자리는 꽤 거친 모양이다./…아마 그는/일본 열도(列島)의 긴 그림자를 바라보는 게다./흰 얼굴에는 분명히/가슴의 ‘로맨티시즘’이 물결치고 있다.//예술, 학문, 움직일 수 없는 진리……/그의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동경(東京),/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청년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레었다./… 청년! 오오, 자랑스러운 이름아!/적이 클수록 승리도 크구나.//삼등 선실 밑/동그란 유리창을 내다보고 내다보고,/손가락을 입으로 깨물을 때,/깊은 바다의 검푸른 물결이 왈칵/해일처럼 그의 가슴에 넘쳤다.//오오, 해협의 낭만주의여!”

이 시에는 임화 자신이 시적 화자로 등장한다. 한 조각의 ‘희망’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절망의 시대에 한 ‘청년’이 유학을 떠난다. 거칠게 뒤척이는 바다 건너 ‘진리’가 빛나는 희망의 나라로 말이다. 어두운 ‘고향’을 밝게 비추는 ‘별’이 되고자 청년은 설레는 마음으로 배에 오른다. 해협을 건너는 청년이 임화 자신이라면, 그는 (프랑스 혁명의 자식이었던) 18-19세기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20세기 한반도에서 러시아 혁명을 꿈꾸던 혁명가다. 그렇지만 시의 제목은 물론이고 시에 등장하는 주요 (작은따옴표로 표시된) 시어들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아닌 낭만주의의 핵심 모티브를 담고 있다. 로맨티스트는 현실의 한계에 깊이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한계 돌파의 의지를 불태우는 젊은이다. 그는 생물학적인 젊은이가 아니라, 젊은이의 마음을 가진 자다. 낭만은 사람을 젊게 만든다.


김복진이 그린 임화 소묘

너무 쉽게 낭만주의자들을 싸구려 감상에 빠진 소아병적 비-현실주의자로 속단해서는 안 된다. 로맨티스트는 동경의 대상이 허물어지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계속되는 실패와 좌절에 단련된 자이다. 그가 무서워하는 것은 다만 자기 근원의 순수한 목소리, 고향의 목소리, 어머니의 ‘남도 사투리’ 뿐이다. 그는 단지 무한히 깊어만 가는 절망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희망을 붙들고 싶은 자일 뿐이다. 인간의 존엄은 꿈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좌절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꿈꿀 수 있다는 점에 있다고, 그는 믿는다. 이렇듯 낭만의 본질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현실적 한계를 돌파하려는, 아니 최소한 돌파에의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에 있다. 그렇다면 낭만주의는 사라졌어도, 청춘이 존재하는 한, 낭만은 사라질 수 없다. 사라질 수도 없고 사라져서도 안 되는 것이 낭만이다. 저마다의 가슴에다 ‘젊음의 불꽃’을 지펴 준다는 점만으로도 낭만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예나 지금이나 꽃다운 청춘은 세상에 가득하다. ‘꼰대-되기’를 거부하고 회춘을 갈망하는 이들은 전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낭만은 없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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