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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으로 수다 떨기: [[첫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 – 과학적 사고의 탄생]] / 박성관

최종 수정일: 2023년 7월 24일


1. 세계적인 베셀 [[모든 순간의 물리학]]을 읽고 ‘아! 까를로 로벨리, 잘 쓰긴 잘 썼구나’ 했고, 이어서 번역된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역시 읽어보니 좋았다. 배우는 바도 많았다. 고리(루프)양자중력 과학자인데, 이 생소한 분야는 쉽게(?) 말하자면 최신 우주론의 양대 산맥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바로 브라이언 그린이 [[엘러건트 유니버스]] 등을 통해 정력적으로 소개했던 초끈이론이다. 고리양자중력 이론의 상세한 사항은 기억이 거의 안 나는데, 기억나봤자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얘길 시작하자마자 바로 빠이, 빠이 하며 나를 떠날 테니 기억나나 안 나나 별 상관 없다. 그러니 그 내용은 그냥 패스!


2. 두 권 연속 여러 면에서 만족도가 높았지만, 이 두 권 사이에 번역된 [[첫번째 과학자 아낙시만드로스]]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아마 출간 당시에 내 무의식이 제껴준 거 같다. 왜 그랬을 거 같냐고? 사실이 그렇잖아. 아낙시만드로스라면 고대 철학자 중에서도 가장 까마득한 연배에 속하는 사람 중 한 명 아닌가? 기원전 610년경에 태어났다는데, 무려 기원전 7세기 출생자라는 거잖아.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70년경에 태어났으니까 기원전 5세기 출생자다. 소크라테스보다도 무려 150년 더 이전에 태어나 활동한 사람이라면 자료인들 변변히 있겠는가! 그리고 그 옛날에 철학이나 자연학이 발달하면 얼마나 발달했겠는가? 기껏해야 후대의 누구 책에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한 언급이 있다든가, 또 다른 사람은 뭐라고 논평했다든가 하는 정도의 얘기만 남아 있겠지. 그런 사람일 텐데 책 제목이 ‘첫 번째 과학자’라니, 게다가 부제는 ‘과학적 사고의 탄생’이란다. 저자가 철학자도 아닌 과학자인데, 철학 분야에 대해 이렇게 심한 제목과 부제를 막 날려도 되는 건가? 대략 이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급하게 읽어야 할 책들 리스트에 늘 깔려 지내는 처지라 이 책과의 인연은 꽤나 멀리 있었다.

3. 갑자기 좀 파고들 이유가 있어 미셸 세르의 󰡔기하학의 기원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직 번역은 안 되었고 우연히 사놓은 일역본이 있어서 읽고 있는데, 여기서 기하학의 기원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바로 아낙시만드로스였다. 그리고 그가 주장했다는 ‘아페이론’, 그러니까 다른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한정되지 않는 그 무엇, 요컨대 ‘무한정자’야말로 기하학의 기원이란다. 이 얘길 세르가 길게, 아주 길게 설명하고 있었다. ‘페이론’은 어떤 것에 의해 한정된다는 뜻이고, ‘아페이론’은 ‘페이론’에 부정 접두사가 붙은 꼴이다. 자른다는 뜻의 ‘톰’에 ‘아’가 붙어 ‘아톰’이 더 이상 잘게 자를 수 없는 ‘원자’라는 뜻이 된 거랑 똑같다.

4. 나 사실 이거 좀 관심 있었다. 서양철학사 책에 보면 반드시 밀레토스 학파, 혹은 이오니아 학파가 제일 먼저 나온다. 이들이 자연의 근본 원리를 탐구했다고, 그걸 최초로 신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 자체에 의해 설명하려 했다고. 물론 그 수준이라는 게 탈레스(BC 624 – 545)는 물이라 했고,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아페이론), 그리고 아낙시만드로스와 이름이 헛갈리기 시작하는 아낙시메네스(BC 585-525)는 공기,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요, 엠페도클레스(BC 490? - 430?)는 지, 수, 화, 풍이라고 했다는 구절. 많이들 들어보셨을 거다.

5. 뭐 좋은 얘기다. 의의가 크다고 철학사가들은 너도나도 이구동성인데,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우리 땅에서 이 시기에 철학이나 사상이 어땠는지 떠올려보시라, 아니 그런 수준 이전에 무슨 책이나 인물조차 하나도 안 떠오를 것이다. 우열이 어쩌느니 동양과 서양이 저쩌느니 하는 골치아픈 차원 말고 그냥 생각해 보자. 그럼 최소한 인정할 수 있을 거다. 서양인들이 자랑하는 ‘뮈토스에서 로고스로의 전환’이 과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요컨대 탈레스에서 시작되는 이 계보는 최초의 철학자들 혹은 철학자들의 조상들인 거 맞다. 인정한다. 그보다 약 200년 전에는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 같은 장대한 서사시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나날]]이나 신의 계보 혹은 법통을 그린 [[신통기]] 같은 책들을 휘갈겼다. 이것이 소위 뮈토스, 즉 신화의 세계였다. 그런 이들의 텍스트 바로 뒤에 신을 쌩까고 그 자리에 물, 무한정자, 공기, 불 등을 앉혀 놓은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인정한다. 그런데 당신도 좀 궁금하지 않았는가? 이중에서 가장 튀는 ‘아페이론’(무한정자)이 무슨 내용인지, 돈과 시간이 얼마 안 든다면 알고 싶지 않았는가?

6. 예전부터 알고 싶긴 했는데, 좋은 책과 좋은 선생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고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 결론부터 말하자. 카를로 로벨리는 좋은 선생이고 이 책이 좋은 책이다. 로벨리는 철학사가의 입장에서 이 책을 쓰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철학 개념사랄까로 우리를 좀 휘곤하게 했을지 모른다. 한데 로벨리는 현대 과학자의 입장에서 인류 역사 5천 년 정도를 한눈에 굽어보면서 이 책을 썼다. 이번에도 로벨리가 로벨리 했다, 까르르!

7. 내가 다른 분야들에 정신이 좀 팔린 사이에 고대 사상사 연구가 꽤 진전된 거 같다. 아마 고대의 텍스트들만이 아니라 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구들도 활발했던 듯 싶다. 이 책을 보면 그 성과들이 이해하기 어렵잖게 잘 정리되어 있다. 예전부터 가끔 크고 작은 충격들을 받긴 했다. 가령 I. F. 스톤의 [[소크라테스의 비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 등. 스톤의 책은 왜 소크라테스가 별 시답잖은 이유로 목숨을 잃기까지 했는지, 그 배경을 잘 설명해주어 크게 도움을 받았다. 이정우 선생은 이 책을 ‘사악한 책’이라고 부르시던데,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암튼 내겐 유익했다. 다카시의 [[에게]]는 다른 거 다 떠나서 그 책에 실려 있는 지도가 가장 중요했다. 고대 철학자들의 출생지와 활동무대가 대부분 식민지였다는 것. 당시 식민지랑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떠올릴 때의 식민지는 사뭇 달랐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밀레토스는 그리스인들이 세운 수많은 식민지 중 하나로 당시 가장 번성했던 도시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고진은 [[철학의 기원]]에서 바로 그런 땅들이 여기저기 많았던 곳, 즉 이오니아에서 역사상 최초로 강력한 철학과 철학자들이 분출했다고 얘기해주었다. 당시 가장 국제적이었고 인적 물적 교류들이 가장 활발한 그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게 당연했다고. 자기 민족이나 자기 도시 국가가 세계 최고라든가, 자기 국가나 자기들이 믿는 신이 최고라든가 하는 얘기는 씨도 안 먹히는 곳이었다고. 인간이 최고의 존재라든가 하는 얘기도 수준 낮아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오래전에 읽어 기억이가 잘 안 나지만 대강의 요지는 이랬다). 그러면서 소들이 종교를 갖고 있다면 그들의 신은 코가 소처럼 생겼을 거라고 (아~ 이거 누가 말했더라) 하는 고대 철학자를 인용해주었다. 그런 반면, 이 뒤를 이어받은 아테네나 스파르타는 기본적으로 척박한 곳이어서 맨날 쌈박질만 일삼았다고 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기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도시국가들끼리 치고박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냐고 했다. 밀레토스 학파는 모두다 동등하다고 하는 ‘이소노미아’(동권(同權))를 핵심으로 하면서 인간중심주의 따위는 발도 못 붙였는데, 이렇게 광활하고 생동감 넘치던 에게해 이오니아의 사유 분위기가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로 가면서 분위기는 일변했다. 오직 인간의 문제에만 골몰하고 우주니, 자연의 근본원리니 하는 문제는 도외시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통상적인 철학사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그 이전의 (비록 커다란 의의는 인정하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해 뜬 구름 잡는 식의 이오니아 학파와는 달리, 소-플-아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정면으로 직시했다고, 이것이야말로 본격 철학의 시작이라고.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은 이런 철학사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는 시각을 보여주었다. 그 책이 벌써 2012년 작품이고 번역된 것은 2015년이었으며 나는 이 번역 원고가 연재되던 중에 읽었던 거 같다(책 속지를 보니 읽은 건 2018년 5월이라는 메모가 남아 있다).

8. 로벨리의 [[첫번째 과학자 ......]]는 2015년 작품이고 번역은 2017년에 되었는데, 나는 이제 읽었다. 그리고 강추한다(바로 앞에서 열거한 몇 권의 책들과 함께). 타겟 독자는 고대 문명에 대해 알고 싶은 분, 지난 인류 역사 5천 년을 한 큐에 꿰뚫어 보고 싶으신 분, 인간이 알고 배우고 점점 더 현명해져 간다는 게 크게 보아 어떤 과정인지 진솔하게 생각해 보고 싶으신 분, 과학이나 철학에 관심 있으신 분 등이다. 근데 왜 이케 쓰고보니 좀 재미없는 사람들에게 권한다는 느낌적 느낌이 들지? 암튼 나는 로벨리 덕분에 아주 좋은 시간 여행을 했다.

9. 이 책은 아낙시만드로스가 왜 지난 2600년 동안이 인류사를 이끌었고 예언해왔는지, 왜 이런 위업을 달성한 사람이 탈레스가 아니라 (또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사람이 아니라 콕! 찍어) 아낙시만드로스인지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답을 말하자면 그는 지구가 우주 공간에 붕 떠 있는 공 같은 거라는 충격적인 우주상에 도달했고 이를 대범하게 공표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높이 사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천체론]]에서 아낙시만드로스의 우주상이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라고 평했다. 칼 포퍼는 이케 말했다. “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이 생각(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은 인류 사상사를 통틀어 가장 대담하고, 혁명적이며, 비범한 생각으로 꼽힐 만하다고 생각했다.”

10. 단, 로벨리의 아페이론에 대한 설명에는 짚어둘 점이 있다. (번역본은 장 번호를 매기지 않아 불편해 내가 막 붙였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네 번째 장에 해당하는) 4장은 아낙시만드로스의 ‘혁명적 우주론’에 대한 해설이고(아주 좋다), 5장은 로벨리의 ‘아페이론’ 해설이다. 여기서 로벨리는 ‘아페이론’이 무슨 뜻인지만 말한다. “이 문제는 폭넓게 논의가 되었는데 의견은 그리스어 ‘아페이론’의 뜻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한계가 없는 것(무한, infinite)’ 그리고 ‘규정되지 않는 것(무규정, indefinite)’이다. 한데 로벨리는 이것 자체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다고 한다. 그보다는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기 위해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개념을 발명한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행위였다고 하는 견해를 제시한다. 로벨리의 견해는 훌륭하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왜 ‘아페이론’이어야 했는지는 역시나 중요하다. 왜 다른 이들은 물, 불, 공기 같은 걸 꼽았고 엠페도클레스는 지, 수, 화, 풍 이렇게 네 가지를 다 꼽았는데, 아낙시만드로스는 기이하게도 ‘무한정자’라 했는지, 이것이 문제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 세르의 [[기하학의 기원들]] 중 (아~ 왜 세르도 이 책에서 부와 장 번호를 안 붙인 거야, 휘곤하게스리. 그래서 내가 붙였는데 초반의 서론격인 세 챕터를 지나 약 100쪽 정도부터 약 150쪽 정도까지 한 장 전체를 할애해 ‘아페이론’ 문제를 해설한다. 관심있는 분들은 일독하시길. 이걸 상술할 시간은 없으니 답만 얘기하자면 ‘아페이론’은 ‘아무것도 배제하지 않는 공간’이며, 이것이야말로 어떤 특성도 없고 어떤 제한도 없는 공간, 바로 기하학의 장의 탄생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아낙시만드로스가 낳은 이 장이 지난 2600년 간의 역사의 장이었다는 얘기다.

11. 참고로 [[기하학의 기원들]]은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한 논의 이후 탈레스, 디오게네스, 피타고라스, 제논에 대한 논의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책 마지막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기하학의 기원 이야기가 나온다. 즉 큰 강(가령 나일강)이 범람한 후 토지 경계선이 흐려지고 그래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발달한 토지 측량술이 바로 기하학이라는 설 말이다. 과연 세르는 이 설에 대해, 그 설이 적혀 있는 [[역사]]의 저자 헤로도토스에 대해 무슨 얘길 들려줄까? 궁금하시면 나와 함께 두 손을 모으시라, 그리고 너무 머지않은 미래에 이 책이 번역되기를 기원하시라!


박성관(독립연구자, <분해의 철학> 번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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