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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와 나 / 마준석

군대를 전역하고 바로 자취를 시작했는데 이제 5년 차가 되었다. 그 동안 줄곧 6평짜리 같은 공간에서 먹고 살았다. 그 기간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했던 시간을 포함하고 있어서, 나는 여기서 공부를 하고, 강의를 듣고, 돈을 벌고, 또 놀았다. 내 또래의 다른 대학(원)생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방구석에서 오래 젊음을 누렸다.

자취를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일상의 공간을 지탱하는 일의 지난함이다. ‘정돈된 집안’은 마치 바닷가에 쌓아놓은 모래성과 같아서 조금만 눈을 돌려도 무너져 내리기 마련이다. 날마다 쓰레기는 쌓이고 빨래통은 넘쳐나고 먼지며 머리카락이 굴러다니는데, 집안일은 저절로 되는 법이 없어 일일이 손으로 쓸고 닦고 다듬어주어야 제자리를 찾아간다.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사실이 집안일의 지난함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 가장 지독한 것은 만들어 먹는 일이다. 빠듯한 학생 살림에 사 먹자니 끝이 없어서 직접 차려 먹는데, 차려 먹는 일도 끝이 없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재료를 손질한 다음, 만들어서 먹고 치우면 반나절이 다 간다. 그럼에도 하루 세끼 때마다 배가 헛헛하고, 이 헛헛함은 말로는 달랠 수가 없어 일일이 먹어주어야만 가라앉으니, 이 또한 생의 고됨을 이루고 있다.

이 고됨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고마운 음식이 내게는 고등어조림이다. 한 마리에 삼천 원 남짓한 녀석들을 몇 마리 데려와서 한 데 넣고 졸이면, 몇 끼를 해결할 간편한 식사가 완성된다. 겨울에는 고등어에 살이 올라와 기름지고 생물로 유통되어 살결이 단단하다. 이때는 향신채 조금만으로도 비린내를 억누를 수 있다. 그래서 고춧가루 없이 간장만으로 재료를 다스려도 거부감이 없다. 나는 고등어의 억센 가시를 좋아한다. 억센 덕분에 살을 발라내기 편한데, 그렇다고 가자미처럼 날이 드세지 않아서 씹어도 다칠 염려가 적다. 또 청어처럼 가시가 부드러워도 살에 종횡으로 박혀있으면 까다로운데, 고등어는 정갈하게 가시가 뻗어있다.


억센 가시를 보면서 나는 고등어가 바다를 강인하게 헤엄치는 모습을 상상한다. 척추가 좌우로 튕기면서 고등어는 바다를 밀고 나아간다. 떼를 지어 밀고 나아가는 고등어의 등에는 바닷물결이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다. 남해 바다에서 수천 킬로를 유영하던 고등어가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어쩌다가 내 밥상에까지 오르게 되는지 알 수 없다. 생선이 잡히고 유통되어 먹히는 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건만, 내 앞에 놓인 이 고등어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아서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퍽 생경하게 느껴진다. 고등어는 분명 부단한 몸짓으로 나날의 삶을 지탱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등어와 나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고등어는 살아서 바다를 건너지 못했고, 나는 고등어의 죽음을 내 삶에 덧대어서 삶을 늘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등어는 나와 크게 다르다.

나는 고등어를 먹고, 고등어의 죽음을 내 내부로 받아들인다. 소화란 타자의 타자성을 지양함으로써, 이를 자기-긍정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맥동하는 자립적인 생명체인 고등어는, 씹히고 으깨져서 자신의 형체를 잃어버리고, 더 이상 고등어가 아니게 된 덕분에 나의 피와 살이 된다. 나는 타자의 자립적인 타자성을 부정하여, 타자 속에서도 나의 생명을 확립한다. 그런 점에서 소화는 자유의 원초적인 형태인데, 자유란 타자 속에서도 타자를 넘어 자기 자신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먹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타자에까지 연장하는 행위이며, 그를 통해 세계에 나를 관철하는 고양된 활동이다.

소화란 타자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유지하는 자유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여기서 일종의 힘의 관계를 읽어낼 수도 있다. 분명 먹고 싸는 일은 나의 행함이고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함이기 때문에, 타자를 먹는 일은 그것을 나에게 종속시키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러나 조금 더 숙고해본다면, 여기에 보다 근본적인 지배 관계가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먹고 싸는 일을 주재하는 주인은 사실 내가 아니라 생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의 운동에 종속되어 있다. 때마다 허기지기에 우리는 먹고, 때마다 마렵기에 우리는 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생의 운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살아있는 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생 자체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나 자신의 포기를 함축하기에, 나의 자유는 언제나 내가 가닿지 못하는 곳에서만 주어질 것이다. 먹고 쌈에 있어서 지배되는 것은 실상 먹이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결국 생의 운동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등어와 나는 서로 다르지 않다.



인간이 생에 매여 있기에, 반복되는 나날의 삶의 지난함에도 얽혀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 부단한 손길로 쓸고 닦으면서 삶의 터전을 가꾸고, 주린 배를 두려워하여 벌어먹고 산다. 먹고 사는 방도는 거저 주어지는 법이 없어서, 열심히 몸을 놀리면서 살아야만 한다. 나는 이 단순한 사실이 힘겹다. 그럼에도 고등어를 다듬으면서, 나는 생을 꾸리고 버티는 나의 분주함이 고등어의 펄떡거림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 고등어가 남해 바다를 수천 킬로 유영하듯이, 나는 좁다란 방에서 내 생을 살아내고 있다. 나와 고등어는 살아있는 몸으로 죽음을 밀쳐내며 나아간다. 그것이 지난한 일일지언정, 고등어는 오늘도 바다를 건너가고 나는 이렇게 내 젊은 날을 건너가고 있다.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과정) wegmarken12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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