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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왜 <기생충>이란 제목을 썼을까? / 서민

영화 기생충과 실제 기생충의 관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이란 제목의 영화를 만든다고 했을 때, 몇몇 지인들이 내게 그 영화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었다. “응, 내가 자문 좀 해줬어.”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면 멋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그 영화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다른 관객들처럼 나 역시 그 영화가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본 건 다른 이유였다. 영화가 개봉되고 나면 언론사 몇 군데는 내게 연락하지 않을까 싶어서. 개봉한 지 사흘만에 영화 <기생충>을 봤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영화 개봉 후 몇몇 방송에 출연했고, 영화에 관한 원고청탁도 있었다. ‘그래도 본전은 뽑았네’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 유명한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기생충>은 4개의 트로피를 거머쥔다. 다시 방송에서 연락이 왔고, 영화에 관한 원고청탁도 있었다. 영화 개봉과 아카데미상 사이에는 열 달 가까운 공백이 있었기에, 인터넷에서 영화를 내려받아 한 번 더 봤다. 그 과정에서 새롭게 갖게 된 의문은 봉감독이 왜 제목을 <기생충>으로 했는지였다.



“영화 <기생충>은 기생충이 한 마리도 나오지 않지만, 기생충의 특징을 제대로 표현한 영화입니다.” 방송에 나갔을 때 내가 했던 말이다. 그 당시 난 정말 이렇게 생각했다. 기생충의 목표는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음으로써 자기 종족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짝짓기와 알낳기는 오직 종숙주, 영어로 final host라고 불리는 곳에서만 가능하다. 기생충이 종숙주에 가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쓰는 것은 당연하다. 연가시라는 기생충을 보자. 곤충의 몸 안에서 어른이 된 연가시는 물속에서만 짝짓기 & 알낳기가 가능하므로, 곤충을 목마르게 해서 물로 들어가게 만든다. 달팽이에 기생하는 어떤 기생충은 새한테 가기 위해 새의 먹이인 애벌레 모양으로 달팽이를 변모시키며, 같은 이유로 개미를 딸기처럼 바꾸는 기생충도 있다. 이는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 (송강호 분)의 가족들과 닮은 점이 있다. 이들 역시 ‘돈’이라는, 인간 대부분이 가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한다. 학위를 위조하고, 미국에서 유학했다고 속이고, 멀쩡히 근무하던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를 각각 ‘변태’와 ‘결핵환자’로 속임으로써 박사장의 집에서 각각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유사성을 고려한다면, 기택 가족들을 ‘기생충’이라 한다면, 박사장의 집을 종숙수로 표현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제목에 낚였다


하지만 이런 해석엔 큰 문제가 있다. 단지 반지하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기택네 가족들을 ‘기생충’이라 부르는 게 가혹해 보인다는 점은 차지하더라도,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중 목표를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예컨대 대기업에 취직하려는 토익성적을 높이는 등 각종 스펙을 취득하고 감동까지 곁들인 자기소개서를 만듦으로써 자신을 실제보다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 이들마저 기생충으로 불러야 한다면, 이 세상 사람 중 기생충으로 불리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봉감독이 이 영화의 제목을 <기생충>으로 하지 않았다면, 과연 난 이 영화를 보면서 기택네 가족이 기생충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영화에 대한 내 해석은 봉감독이 붙인 제목에 낚였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봉감독은 왜 그런 제목을 붙였을까? 인터넷을 찾아보니 정말 고맙게도 봉감독이 <기생충>을 제목으로 쓴 이유가 나와 있다. “글자 하나만 바꾸면 ‘상생’, ‘공생’에서 모든 형태의 리스펙트가 없어지고, 말의 뉘앙스가 곤두박질친다. 한쪽 사이드를 비난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되는 거다. 그 곤두박질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공생은 좋은 것이고 기생은 나쁜 것인데, 누군가의 삶이 ‘기생’으로 판정되는 순간 그들은 사회의 일원이 아닌 존재가 되며, 온갖 비난에 시달린다는 의미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글자 하나만 바꾸면’이다. 공생과 기생이 큰 차이가 없다는 얘기 같은데, 내가 봉감독을 새삼 높게 평가하는 대목은 바로 이 점이다. 과학적인 견지에서 봐도 공생과 기생은 구별이 어렵다. 더부살이하는 친구도 가끔은 집 청소를 하는 것처럼, 100% 손해만 끼치는 기생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생충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기생충이 인간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지만, 길이 30센티가량의 회충이 100마리쯤 있어도 우리가 자각할 만한 증상은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기생충이 없어지고 나자 알레르기와 면역질환이 무서운 속도로 증가했는데, 이건 우리나라뿐 아니라 기생충이 없어진 모든 나라에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실제로 기생충이 면역반응을 조절함으로써 알레르기를 억제한다는 게 여러 연구로 밝혀진 바 있다. 기생충으로 인한 피해라고 해봤자 밥풀 한두 톨 정도를 빼앗기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게 알레르기 등을 막아 준다면 과연 기생충을 ‘숙주에게 피해를 준다’는 의미의 ‘기생’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기택네 식구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반지하에 살고 일정한 수입이 없다 해도, 기택 부부는 딸과 아들을 낳음으로써 저출산에 허덕이는 우리나라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게다가 그들이 놀고먹으려 한 것도 아니며, 단지 일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는 점은 그들이 박사장 집에 취직하려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이전에도 그들은 이런저런 일들을 해왔는데, 그중 하나인 피자 상자를 접는 일도 우리나라 GDP 생산에 기여한다. 반면 그들이 우리 사회에 끼치는 피해 위층 와이파이를 조금 나누어 쓰는 것 정도인데, 이걸 가지고 그들의 삶을 ‘기생’으로 정의하는 일은 좀 가혹하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봉감독의 영화가 우리 사회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리라.

실제 기생충이 나온다


영화 <기생충>에서 관객들을 가장 놀래준 순간은 이전 가사도우미 문광의 남편인 ‘근세’가 벽장, 정확히 말해서 방공호로 쓰던 공간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근세가 벽장 속으로 숨은 이유는 사채를 썼다가 갚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벽장 안에서 근세는 문광이 갖다주는 식사로 연명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다. 물론 박사장이 이렇게 이야기하긴 했다. 문광이 일은 잘하는 데 유일한 단점이 밥을 많이 먹는 것이라고 말이다. 막상 들을 때는 그냥 지나갔던 이 대사는 근세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나름의 의미를 갖게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박사장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아니다. 당장 먹을 게 없는 처지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돈이 넘쳐나는 박사장에게 하루 밥 2-3공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근세는 박사장이 자신을 살게 해준다고 생각하고, 박사장이 계단을 지나갈 때마다 머리를 벽에 부딪혀 전등에 불이 들어오게 함으로써 고마움을 표시한다.



숙주인 박사장네 식구들이 그 존재를 모르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도 거의 없는 편인 데다, 박사장에게 편리함을 제공한다? 이거야말로 실제 기생충의 정의에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는가. 게다가 근세는 이 영화의 결말이 파국으로 치닫는 데 큰 역할을 하니, 이렇게 본다면 영화 제목이 <기생충>이 된 것은 근세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많은 이들이 <기생충>을 보고 나서 ‘찜찜했다’거나 ‘불쾌했다’고 말한다. 끔찍한 참극으로 끝난 막판의 아수라장이 그런 불쾌함을 유발한 원인일 텐데, 나 역시 결말이 그렇게 돼버린 게 아쉽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기택네 식구들이 근세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발견 당시 놀라는 것이야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관객인 나도 깜짝 놀랐는데, 영화속 인물의 놀라움은 이보다 훨씬 더 컸을 테니 말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도 기택네 가족들이 근세를 적대시했다는 점이다. 근세와 충숙이 바라는 것이라 봤자 제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고, 이는 약간의 노동력만 동원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자신들이 한 가족이라는 걸 들킨 마당이었으니 근세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서로 ‘윈-윈’할 수도 있었으리라. 과거 우리나라에 기생충이 만연하던 시절, 대변검사에서 회충, 편충, 십이지장충 등 여러 기생충에 동시에 양성인 이들이 제법 있었다. 종류가 다른 기생충들이 서로 공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이 각자 다른 공간을 점유하고 있었으며, 다른 종을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반면 기택네 가족들은 그저 근세를 제거하려 했고, 이는 자신과 근세는 물론이고 숙주인 박사장마저 망가뜨리는 대참사로 귀결된다. 인터넷에 나온 봉감독의 메시지를 애써 외면하고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자.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다른 이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려는 태도다. 이것이야말로 봉감독이 영화 제목을 <기생충>으로 지은 이유다.”


서민 (단국대 의예과 기생충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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