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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4.3사건과 ‘양민 학살’의 기억 / 김헌주

최종 수정일: 2020년 4월 13일

매년 4월 3일 밤이 되면 제주도의 많은 가정에서는 제사상이 만들어진다. 수많은 사람이 같은 날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단적 고통의 기억을 일상으로 체화한 지역공동체의 삶은 어떨까. 4.3사건 72주년에 즈음하여, 우리에게 4.3은 어떻게 기억되어 왔는가를 되짚어보려 한다. 4.3에 대해 우리가 가장 가슴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된 것이다. ‘잠들지 않는 남도’란 수식어는 그 비극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학살의 피해자들을 ‘양민’이라고 부르는데 익숙해져 있다. 정치인의 발언 및 언론기사에도 ‘양민 학살’이라는 용어는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예컨대 4.3사건 70주년이었던 지난 2018년에 노무현 대통령 이후 두 번째로 4.3 추념식에 참가한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추념사를 올렸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전문] 문재인 대통령 제주4·3 희생자 추념일 추념사 노컷뉴스, 2018/04/03)

요컨대 ‘이념대립과 무관한 양민들의 무고한 학살’이라는 것이 4.3을 바라보는 국가의 공식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4.3뿐 아니라 여순사건, 보도연맹 등으로 대표되는 좌우의 극한 대립에 따른 학살 사례는 무수하게 많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에 대한 유족들의 상흔은 차마 말로 옮기기 힘들 수준이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 Ⅳ 피해상황)에 기록된 참상을 살펴보자.

(애월면 하귀리 도피자가족 살상 사례) 경찰이... 이번엔 어떤 여자를 지목해 끌어냈습니다. 25세쯤 되는 임산부였습니다. 경찰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큰 팽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찔렀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돌리자 경찰은 “잘 구경하라”며 소리쳤습니다.
(물고문 사례) 물을 코에 부으면서 고문을 했다. 안에는 사람들이 100명도 넘게 잡혀와 있었다. 방망이로 매를 차례차례 때리고 있었다. 잘잘못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성고문) 토벌대는 옷을 벗긴 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처녀 한 명과 총각 한 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짓을 강요하는 거였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차마 다 읽어나가기 힘들 정도의 참혹한 사례들에 대한 증언들이다. 공식적인 통계(제주4.3사건위원회 신고서, 2001)에 의하면 당시 사망자는 10,715명이며 행방불명자는 3,171명이다. 물론 이것은 신고된 내용일 뿐 희생자 전체를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제주도 전체에 남로당원이 이 정도 규모일리는 없다는 점에서 ‘좌익과는 무관한’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4.3에 관련된 학살의 모든 기억을 ‘이념과는 무관한 항쟁’, '양민 학살' 등으로 귀결시키는 역사상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당시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다채로운 속성들을 순백으로 인식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4.3사건은 남로당의 무장투쟁 노선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공식 진상조사보고서와 다수의 연구에 의해서도 증명되었다. 아울러 제주도에서 남로당과 인민위원회 활동이 활발한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4.3을 폭동이나 반란으로 보는 시각의 연구뿐 아니라 민중항쟁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연구들에서도 모두 인정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두고 그간 국가의 공식적인 기억은 극단적인 두 지점의 해석을 강요했다. 4.3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기 이전인 반공 군사주의 국가 시절에는 4.3을 좌경사상에 물든 ‘빨갱이’들의 폭동으로 기억했다. 반면 민주화 이후 과거사진상규명작업이 진행되면서 4.3은 이념과는 무관한 ‘순수한’ 제주도민의 단독정부 반대수립 항쟁에 대한 국가권력의 학살이라는 것이 공식적인 기억으로 자리잡았다.


전자는 이념 그 자체보다는 지역 명망가들에 대한 신뢰, 현실적 생존을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쌀을 배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지워버렸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리고 반공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점에서 극복되어야 할 역사의식이다. 그러나 후자의 기억 또한 불완전하다. 해방 이후 남로당과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고, 따라서 '양민'의 범주 또한 매우 유동적이었던 것이 당대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사적으로 벌어진 이념대립 구도는 민중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4.3과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순수한 양민'으로 설정하는 것은 당대 역사의 복잡한 경계선과 능동성을 지워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인식은 ‘순수한 양민’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 즉 ‘좌익 사상’을 가졌던 사람들에 대한 학살에는 문제의식을 가질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맹점이 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는 좌우익 사상과 정당들이 백화제방하던 치열한 이념투쟁의 장이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폭력이 발생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역동적이며 폭발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당시 주한미군사령관 정치고문 베닝호프는 “성냥을 당기기만 하면 폭발할 것 같은 화약통 … 화산의 가장자리를 걷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이러한 상황을 연구자들은 ‘해방공간의 혁명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순수한 항쟁’과 ‘양민 학살’이라는 역사상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소거시켜버릴 가능성이 있다. ‘좌익’에 대한 학살이 공론장에서 다루어지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제주도민 중 강한 좌익사상을 가지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그 사람이 군경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했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그리고 그 학살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제는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야할 시기가 아닐까. 냉전과 이념대립에 대한 진정한 극복은 역설적으로 현실을 직시해야만 가능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4.3사건 72주년에 ‘양민 학살’의 기억을 새삼 소환한 이유이다.


김헌주(연세대학교 근대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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