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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생태 사상의 특징과 세계 철학적 의의 / 황종원

오늘날 인류는 심각한 수준의 생태적 재앙을 겪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빈발하는 대형 산불, 초강력 태풍, 폭염과 가뭄, 꿀벌의 실종, 인수(人獸)공통감염병의 빈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현상들을 저명한 대기과학자나 생물학자 등은 기후 위기와 생물 다양성 급감을 나타내는 명백한 징후라고 보고한다. 이에 과학을 신뢰하는 현대인들 다수도 최근에는 비로소 환경오염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 엄중한 문제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오늘날 지구 생태계가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그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여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과학자가 생태 위기의 원인을 명료히 인식하거나 그 극복 방향을 제대로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는 당연하다. 생태 위기는 다름 아닌 인간 혹은 인간사회가 초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인문학자와 사회과학자가 함께 풀어야 할 문제이며, 특히 철학 연구자가 깊이 사색해야 할 문제이다. 20세기 후반에 서구에서 태동한 생태철학은 바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 문제를 중심으로 인류가 봉착한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그 위기의 해소 방향과 원칙을 모색하는 철학 분야이다. 이 서구의 생태철학은 지난 1990년대부터 일군의 학자들이 국내에 소개하고 연구해 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와 거의 동시에 이 땅에서 한국의 독자적 특색을 띠는 생명 사상과 생태철학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서구 생태철학의 의의와 한계를 간략히 살피고, 그런 맥락에서 1990년대에 형성된 한국의 생태 사상에 어떤 독특한 특징이 있는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정리함으로써 현대 한국 생태 사상의 세계 철학적 의의를 천명하려 한다.

     


서구 생태철학의 두 가지 쟁점과 그 한계

    

환경윤리에 대해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구의 그것이 크게 인간중심적 환경윤리와 생태 중심적 환경윤리로 나뉜다는 점을 알 것이다. 서구의 환경윤리가 이 두 관점으로 갈리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쟁점은 자연의 가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문제일 것이다. 인간중심적 환경윤리에 따르면 이 지구상에서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는 인간밖에 없으므로 자연의 가치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며, 그 가치는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부여되는 도구적 가치밖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생태 중심적 환경윤리에서는 인간의 판단과는 관계없이 자연에는 본연적 가치 혹은 내재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가치의 소재 문제와 관련한 전자의 시각은 실질적으로는 상공업적이다. 예컨대 나무 한 그루의 도구적 가치는 주로 그것이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목재로 쓰일 때 생겨난다. 하지만 누군가 유용한 목재로 쓰이지 못하는 나무도 생명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치자. 그러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생명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라는 관념을 떠올리며 그 주장에 공감할 것이다. 이 점에서 위에서 언급한 후자의 시각은 자연을 상공업적으로 바라보는 데 길들여진 현대인 눈이 편견임을 일깨워 생태계 보전의 관점에서 자연의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서구 환경 윤리학은 이른바 자연의 도구적 가치와 내재적 가치 혹은 본연적 가치를 단지 대립적으로만 사고해 왔다는 데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무 한 그루는 생태 중심적 환경윤리학의 견지에서 보면 물론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것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존, 성장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태 중심적 환경윤리는 저 나무 한 그루가 생존과 성장을 위해 어떤 생명 운동을 하는지 그 실상을 철학적으로 깊이 사유하지 못한다. 바로 나무는 자신의 생장을 위해 햇빛, 물, 흙, 흙 속의 미생물 등을 이용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산출하는 산소, 열매 등이 인간과 다른 짐승들에게 이용된다는 실상 말이다. 바꿔 말하면 나무는 다른 자연물을 도구로 이용하는 동시에 자신이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즉 자연이 자체적으로 지닌 생명 가치는 타자를 도구로 쓰고 자신이 도구로 쓰임을 받는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생태 중심적 환경윤리는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인간 중심적 환경윤리는 도구적 가치 개념을 인간중심적으로만 생각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서구 생태철학의 또 다른 쟁점은 생태적 정신, 세계관, 윤리의 정립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생태적 생산, 생활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에 주력하느냐에 있다. 대표적으로 심층 생태학(deep ecology)과 사회 생태학(social ecology)은 공히 급진적 생태주의로 분류되지만, 전자가 서구 근대적 세계관을 비판하며 생태주의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강조하고 원생 생태계의 보전 운동에 치중했다면, 후자는 인간의 자연 지배와 인간사회의 서열화, 위계화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하면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생도 추구하는 공동체 건설을 중시하였다.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때로는 격렬하게 논쟁했다. 사회 생태학 진영에 선 이들은 심층 생태학을 에코 파시즘이라 공격했고, 심층 생태학 진영에 선 이들은 사회 생태학을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들의 논쟁을 살피노라면 두 가지 관점과 견해가 과연 그렇게 대립적이기만 하느냐는 의문이 든다. 우선 한 시대의 정신과 생산양식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상공업적 정신은 상공업적 기술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생태적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그 공동체의 성원들은 우선 생태적 정신을 삶의 중심에 굳건히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생태적 정신으로 충만하게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 삶의 토대인 기술, 인간의 사회적 관계 등이 공생, 협동적 성격을 띠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지구 생태계의 평형과 조화를 최우선적인 도덕적 고려 사항으로 삼는 심층 생태학의 전체론적 관점을 생태 파시즘이라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것도 온당치 않아 보인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는 전체와 개체의 분립을 절대화하는 편향적 사유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는 개체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개체가 내적으로 복잡하게 연결된 유기적 전체이다. 개체 역시 원자적 개체가 아니라, 우주 자연 전체를 자기 안에 내재한 우주적 개체이다. 소규모 공동체에서 사람들 사이의 협력과 자치에 힘쓰는 일을 인간중심적이라 비판하는 것 역시 지나치다. 사회 생태학이 자칫 인간과 자연의 관계 변화보다 인간 사이의 사회적 협력 문제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태적 생산과 생활을 함께 해 나가는 사회적 연대가 없이는 생태적 문명으로의 전환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생태 사상의 몇 가지 특징

     

현대사회에서 생태 사상은 주로 그 사회가 산업화, 즉 상공업적 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에 등장하였다. 이는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산업화가 한창이었던 1970~1980년대에 장일순(1928~1944), 김지하(1941~2022) 등에 의해 생명 사상이 형성되고 생명 운동도 일어났으며, 1990년대에는 이준모(1935~)에 의해 서구와는 다른 생태철학이 형성되기도 한다.

현대 한국 생태 사상의 ‘한국적’인 특색은 19세기 동학사상에 대한 생태적 해석에 힘입어 정립되었는데, 그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이론적으로 그것은 동서양 종교 및 철학 회통(會通)적이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1824~1864)는 하ᄂᆞᆯ님(天主)이 세상에서 신령과 기화로 계신다(內有神靈, 外有氣化)고 했으며, 최시형(1827~1898)은 이를 계승하여 이 ᄒᆞᄂᆞᆯ님의 자연 내재성을 더욱 강조했는데, 장일순은 동학의 이 사상을 토대로 기독교, 불교, 노자의 가르침을 하나로 회통시켰다. 그는 이들 종교나 사상이 각각 하느님의 뜻, 부처님의 마음, 도(道)를 삶의 중심으로 삼으라고 가르치는데, 그 삶의 중심을 가리키는 명칭은 비록 다르지만, 소아(小我, ego)의 자기중심성을 최대한 초극하라고 하는 점에서는 공통된다고 여겼다. 또 이에 근거해 이들 종교와 사상이 진지하게 대화한다면 모두 이웃을 넘어 천지만물 역시 ‘남’이 아닌 ‘나’로 여기는 생태적 대아(大我)의 성취를 지향하는 가르침으로 그 지평이 넓어질 수 있음을 역설했다. 김지하도 동학의 종교사상과 서구 신과학운동의 성과를 결합했다. 그는 ‘신령의 기화’라는 종교적 개념을 우주 생명이 자율적, 창조적으로 진화한다는 과학이론과 융합해 설명했고, 불연기연(不然其然)이라는 역설의 논리에 근거해 종교와 과학적 진리가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점은 이준모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서양 철학, 특히 독일의 칸트, 헤겔 철학이 상공업적 노동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고, 동양의 노장철학과 유학은 농업적 노동 논리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체계적으로 논증했고, 동학에 의해 그 두 대립적인 노동 논리가 생태적 노동 논리로 지양되고 있음을 밝혔다.

둘째, 실천적으로 그것은 생태 노동론적이다. 장일순은 산업사회의 생산양식이 자연 지배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생태적 농사와 그 농산물의 도농 간 직거래로 땅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한살림 운동’을 주도했다. 초기에 이 운동을 함께 주도한 김지하는 동학을 노동론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실천이론의 토대를 제공했다. 그는 한울님의 기화(氣化)를 우주 자연이 생명 살림을 목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한울님을 따르는 인간이라면 그 역시 생명을 살리는 노동을 해야 한다고 했으며, 그 노동의 ‘열매’를 나누는 일 역시 제사를 받들 듯 거룩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이준모는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설에 착안해 자연의 생명노동과 인간의 협동노동에 관한 생각을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하늘은 광의의 노동을 하는데, 그 노동은 하늘이 자신의 기운을 내어주어 만물을 먹여 살리는 자기희생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렇게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두루 섬기는 하늘에 대해 인간은 공경의 태도를 갖지 않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노동이 자연을 공경하는 거룩한 노동, 자연과 공생을 지향하는 협동노동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셋째, 종합적으로 볼 때 그것은 생태적 영성의 배양과 생태적 문명으로의 개벽(開闢)을 동시에 추구하는 경향을 띤다. 장일순은 동학과 불교의 대화를 통해 ‘나락 한 알 속 우주’라는 말로 대표되듯, 개별 자연물 하나하나가 다 우주적 존재임을 자각하는 우주적 영성의 배양을 거듭 강조하면서도, 이 영성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공생과 협력의 관계로 변화시키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고양될 수 있다고 여겼다. 김지하 역시 개인과 사회가 생명 살림을 중심 가치로 삼아 개인과 사회의 성화(聖化)를 꾀하는 영성 배양을 중시하면서도 그것은 주로 생태적 생산과 소비를 일으키는 다양한 소규모 생활 운동과 생명 살림의 대의에 공감하는 주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여 민주적 토론과 의사결정을 하는 주민 자치 운동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했다.

이준모 역시 영성과 기술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되, 인류가 역사적으로 개발해 온 대표적인 기술은 자연에서 그 엇비슷한 것이 발견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지렁이는 흙을 먹어 흙을 살아 있는 흙으로 가공하는데, 이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공업 기술이다. 또 흙 속의 수분과 영양분은 식물의 뿌리에서 줄기, 가지, 잎, 열매, 그리고 열매를 따 먹는 짐승과 사람에게로 유통되는데, 이것이 곧 자연의 상업이다. 중요한 것은 이 자연의 공업과 상업 기술은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생태계의 안정과 조화, 바꿔 말하면 생명을 살리려는 목적에 부합하는 기술이라는 점이다. 즉 자연에서 농공상의 기술은 생명 살림의 뜻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바로 자연의 기술이 알려주는 이 특징에 착안하여, 이준모는 인간의 기술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생명 살림의 영성을 기반으로 농공상이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기술로 사회적 재편을 이룬다면 인류가 생태적 사회로 전환하는 문명사적 전회, 즉 개벽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현대 한국 생태 사상의 세계 철학적 의의

     

이상으로 간략히 정리한 현대 한국 생태 사상의 특징을 다시 그에 앞서 논한 서구 생태철학의 쟁점 및 한계와 비교해 보면 현대 한국의 생태 사상에는 세계 철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첫째로 서양의 생태 윤리는 자연의 가치와 관련하여 그것의 본연적 가치를 다소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도구적 가치를 인간 중심적인 각도에서만 협소하게 이해한다. 이는 이 두 가치의 대립을 절대화하는 것으로, 서구 철학 전통 속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목적과 수단의 이분법을 절대화하는 사유의 반영이다. 반면 현대 한국 생태 사상의 첫 번째 특징에서 서술했듯, 장일순, 김지하, 이준모는 동학사상을 기반으로 이질적인 기독교, 불교, 노장철학, 독일 관념론 등을 회통시킨다. 특히 이준모는 그 진지한 대화를 통해 기독교적 신의 자기희생을 동학적인 하늘의 만물을 먹여 살리는 자기희생과 소통시켰는데, 이를 참조하면 이른바 자연의 본연적 가치가 실제 생명 운동 속에서 타자를 위한 도구로 쓰임 받는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생각을 도출할 수 있다.

둘째로 심층 생태학과 사회 생태학의 대립이 보여주듯, 서구의 생태철학은 생태적 정신, 영성의 배양을 중시하는 사조와 생태적 공동체의 건설을 중시하는 사조가 크게 대립하며 서로를 비판해 왔다. 대표적으로 생태 파시즘이라는 공격과 인간 중심적이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 현대 생태 사상의 기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지나친 대립, 비판, 공격이다. 생태적 공동체를 일구려는 사람들이 우선 생태적 정신, 영성으로 내면이 고양되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빈껍데기이기 쉽다. 반대로 생태적 정신과 영성을 개인적으로 기르는 일에만 힘쓴다면 그 영성의 지속적 고양은 어렵고 사회적 확산도 난망할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생태적 영성과 기술의 긴밀한 관련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이 둘의 연결을 주장하는 한국 생태 사상가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또한 전체를 중시하는 관점이 꼭 전체주의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는 생각에서 확인된다. 그밖에 노동 양식, 기술의 문제를 중시하는 김지하와 이준모의 사상에 주목하여 그것이 생태 위기의 문제를 극복하는 핵심 고리임을 분명히 한다면 인간 사이의 연대와 협력을 중시하는 것 역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점 또한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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