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페미니스트가 김수영을 읽는 방법 / 노혜경

2월 22일 업데이트됨

한동안 도통 시를, 아니 시집을 읽지 않았다. 쓰는 일을 게을리하면서 읽는 일도 덩달아 게을러졌다. 그 반대인가? 시를 통해 자기자신을 한 주체로 구성해내는 시인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할 일이 없을 텐데.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너무 광활한 백사장에 흩뿌려진 이 시인들을 나에게 매개하는 출판사, 잡지, 서평, 문학상 등등이 가리키는 방향이 그야말로 취향에 미감에 맞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찾아읽는 시가 대체로 김수영이다. 한 편 한 편의 시가 아니라, 모든 시와 모든 산문을 합쳐서 한 사람의 시인으로 스스로 발명된 사람. 내가 박사논문의 주제로 사용한 용어인 서정적 주인공을 우리 시문학사에서 찾는다면, 첫줄에 김수영이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운명이자 한계이다. 한국문학사 속의 많은 시인들이 처해버린 운명이기도 하다. 하여간 김수영의 줄에 서 있는 시인들을 대체로 나는 좋아한다.


그런데 이 양반 때문에 나는 지난 몇 년간 고생을 하고 있다. “여편네를 우산대로 때려눕”하고도 “우산 잃어버린 것이 더 아깝다”라는 어이없는 소리를 시로 늘어놓은 ‘가정폭력배’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지고 남성 문인들의 너절한 행패가 폭로되는 시대에 이 시로 말미암아 김수영은 흡사 여혐시인의 원조쯤 되는 듯이 지탄을 받고 있다. 만만치 않은 형이상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문제의 시 [죄와 벌]은 1963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시인데, 당시는 물론이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시를 독해하는 방식은 “때렸다”에 방점이 찍힌 적이 없었다가 최근 발견되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그 시뿐이 아니다.


김수영에게 여혐시인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일이 싫은 것은 아니다. 60년대 당시 한국의 소위 문인들치고 종삼(성매매 집결지가 있던 종로3가를 당시는 종삼이라 불렀다)을 드나들고 혼외정사를 벌이는 것에 경각심이 있거나 수치심을 느낀 남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김수영이 그런 대다수들보다 좀 더 나은 점이 없어서 아쉬울지언정, 변명해줄 이유는 없다.


다만, 내 괴로움은 구조적으로 잘 짜여진 시에서 오로지 “여편네를 두들겨패다” 라는 언술 한 줄만 건져내는 독해가 납작한 데서 온다. 나는 내 문학의 ‘거대한 뿌리’가 김수영이라고 느끼는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는 시인인 나의 자양분이 김수영으로부터 왔다는 이 사실을 독자들에게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는지가 너무 어려운 숙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통은 어떤 것이라도 좋다”라고 말한 김수영을 흉내내어 “김수영은 여혐이라도 좋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시 [죄와 벌] 뿐 아니라 시와 산문의 구석구석에서 지나칠 정도로 솔직히 이야기하고 있는 가정폭력과 성매매와 외도와 통음. ‘먹여살리려는’ 가상한 노력에도 잘 되지 않는 경제적 무능 때문에 아내에게 빌붙으면서 불평하는 등의 그의 모습이 싫고 불편하다. 다만, 시인이 삶을 시 속에 이렇게까지 박아놓았는데 그의 전기적 사실로부터 독자인 내가 시를 훼손시키지 않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난감할 따름이다. 그의 시가 전기적 사실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시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나는 이미 잘 알기 때문이다.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문학은 여혐해도 되나? 2018.11.16 10:06

그래서 페미니스트가 김수영을 읽는 법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내가 써야 할 주제라고 생각하면서도 심하게 부담을 느꼈다. 한때 한국문학을 뒤흔든 표절 주제라든가 친일문인 문제라든가 하는 주제로 말하게 되었을 때와는 또 다른 부담이었다. 표절과 친일이 문단권력구조를 직격으로 비판하는 정치적 주제였다면, 김수영의 시를 페미니스트로서 읽는 일은 보다 근원적 정치성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정치성을 잘 설명할 공부가 아직은 미진하다는 생각 때문에 부담스럽다.


시인인 나는 김수영적 문학관과 그의 시학과, 무엇보다 그가 써서 제공한 언어들이, 그가 시를 조직해내는 그 힘이, 시와 산문의 유기적 결합으로 구축된 그 언어로부터 살아나오는 그 주인공 시인이 너무 필요하다. 그 모든 것들을 써놓아버린 김수영이 구축하는 문학의, 시적인 것의 세계는 거의 혁명적이라 할 만큼 여전히 새롭다.


이 정도 밑자락을 깔고 김수영을 이겨내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내가 보기에 김수영은 한국문학의 근대성 그 자체다. 이상에서 싹트고 후반기 동인들로부터 이어지는 모더니즘의 긴 계보가 김수영에 와서 매듭을 지었다고 본다. 김수영이 문학사의 한 경계를 돌파했다는 주장은 이제는 특별하지 않고 비교적 동조를 받는 생각이다. 오히려 김수영이 신비화되거나 새로운 정전이 되어갈까봐 걱정이다. 태어난 지 백년이 되는 이 시인, 사망한 지는 52년이나 된 이 시인을 뚜렷하게 넘어서는 시인들이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이 어두운 탓도 있지만 김수영의 실험이 그만큼 ‘모던’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이것도 어릴 적에 읽은 글이지만 작고한 김윤식이 한국문학엔 모더니티 지향성과 전통지향성과 리얼리즘이 계속 ’꽈배기를 꼰다‘(꽈배기는 내 표현)고 말한 것을 아직도 반박하기 어려운 탁견으로 지니고 있다. 이 중 김수영은 이상을 물리치고 모더니티 지향성의 첫머리에 섰으며, 한편으로는 ’소시민‘으로 불리는 60년대의 새로운 근대인의 모델로서도 첫머리에 섰다. 강력한 리얼리즘 지향의 시들을 제외한다면 김수영의 세례를 받지 않은 시는 지하철시 밖에 없지 않나 싶을 지경이다. 미당은 여성시의 선배가 아니지만, 김수영은 분명히 선배 반열에 든다. 그런데 과연 어떤 점에서 그럴까.


그는 아무리 현대적이라 해도 60년대의 시인이다. 특정한 시대를 살다 간 시인의 어떤 대목은 시대의 소산으로 양해하고 어떤 대목은 비판하고 지양을 해야 할까. 어떤 대목은 이어받고 어떤 대목은 영원까지 모시고 갈까를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새로 점검해야 한다. 그는 내가 1차 계몽주의라 부르는 휴머니즘적 근대의 남성중심 바로 그 휴먼으로서, 여성시인들이 타도하고자 하는 바로 그 ’생각하는 사람‘이다.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단언하자면 매우 정치적인 일이다. 시를 정치텍스트처럼 읽는 일을 포함하여, 시인의 시적 실천의 정치적 함의를 발견하기. 정치적 실천이란 김수영의 경우는 어디까지나 시적 실천이었다. 그는 자신의 시를 현실 정치의 도구로 삼은 적이 없다. 그가 <김일성 만세> 라든가 <신년시> 같은 것을 쓸 때조차도 그의 시는 그 자신의 생활과 사유의 사소함과 구체성의 산물이고 의식과 무의식의 싸움의 결과물이지 특정한 정치적 주장은 아니었다.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가는 것이 시라는 그의 시론은 어느날 공중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시를 쓰면서 닭을 키우면서 돈과 씨름하고 여편네와 드잡이를 하면서 육성해온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의 정치성은 김수영 시의 또 다른 본령이다.


진은영은 어떤 글에서 김수영의 문학을 가리켜 “우리가 끝내 버리지 못하는 문학” “도통 계통없는 삶”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진은영, [김수영, 계통없는 삶], <문학동네> 2008 여름호) 하지만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가는 문학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국면에서 시의 실천을 정치화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면, 김수영의 시를 이어받은 것은 분명 페미니스트 시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두번째 계몽주의를 실천하려는 페미니스트 나의 주장이다.


여혐적 무의식을 말하자면,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다른 것이다. 김수영은 시 속에서 “거리의 돈을 버는 부인들” 좀더 노골적으로 매춘부를 자주 등장시켰다. 그런가 하면 아주 노골적으로 성매매를 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60년대의 소위 ‘매춘’의 현실은 이미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여성이 종사해야 했던 억압과 착취, 폭력의 일종이라는 점은 밝혀져 있다. 그런데 그는 흡사 여성들의 ‘매춘’이 직업의 일종인 듯이 다루고 있고, 그 구조적 모순과 폭력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의 인식이 여성을 성속으로 이분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계급적 측면에서 그가 “거리의 돈을 버는 부인들”의 옆에 있다고 읽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변명해주는 일이 되는 것 같다. 서정적 주인공 시인 김수영이 아니라 60년대의 너절한 남성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 나의 걸림돌이다. 그 모든 너절함을 포함하여, 그를 나라는 시인의 시적 기원으로 재정립하는 일이 나에게는 숙제다.



기분 전환을 위해 이렇게 말해보자.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그는 스스로를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옹졸하고 비겁한 존재라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붙잡혀간 소설가”가 있고 “언론의 자유”가 억압당하며 “월남파병”이 반대해야 하는 것이라는 진술을 하고 있다. 이 애교스러운 문장 앞에서 어느 날 내가 배운 유머는 이런 것이다. 나는 고상한 사람이라 차마 너에게 이런 개자식이라는 욕은 할 수가 없어서 ‘너절하다’라고 하고 만다. 나는 욕을 한 걸까 아닌 걸까.

노혜경(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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