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작성자 사진한국연구원

한국의 미개(未開) / 윤종환

세계라는 말의 세계

     

한 이십여 년쯤 됐을까. 집안에 텔레비전 보고 있는 사람 한 명 없는데 덩그러니 화면만 켜져 있는 때가 있었다. 지금은 1인 가정의 가장인 데다 텔레비전이 없이 혼자 산다. 매달 찾아오는 TV 수신료 납부 고지서를 TV 대신 뚫어져라 보며 ‘이걸 내야 돼?’하며 심리적 결투 같은 걸 하지만, 예전에는 누가 틀어놓은지도 모르는 채널을 보며 반강제로 가족들 취향을 짐작하고는 했다. 그때 마주한 방송 중 하나가 KBS1채널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였다. 2005년 11월을 시작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한 국가의 특정 도시나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식의 시사교양인데,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2024년 10월인 지금도 방영 중이다.

     

이십 년 가까이 황금 주말에 900회에 육박하는 횟수로 세계 속으로 걸어가려는 여행자의 용기와 끈기, 그리고 이 미친 강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국영방송, 아니, 공영방송에서! 열혈 애청자는 아니었지만 몇몇 프로그램을 본 덕분에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삶의 방식들을 엿볼 수 있었다. 리포터가 각국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인터뷰할 때 현지인 답변에 덧입히는 성우의 더빙과 한국어가 너무 안 어울려 웃기도 했고, 다짜고짜 원주민 부족원들에 ‘한국을 아세요?’라고 묻는 생뚱맞은 국뽕 드립에 꽤 오그라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한한 세계를 알고 이해하려는 ‘무(모)한 도전’이 있었기에 나의 세계지도가 접혀있던 종잇장에 불과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알게 됐었다.

     

당시의 나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세계가 무엇이며 그 속은 또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이 프로그램이 상정하는 세계에는 한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이 세계의 일부임에도 자기를 제외한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아름답고 모험적이며, 스스로를 세계의 ‘바깥’이라 두고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몸짓이 스펙터클의 한 이름을 얻은 것 같았다.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같은 KBS의 2채널에서 국내만을 샅샅이 여행하는 <1박 2일> 프로그램이 등장한 건 꽤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대학생일 때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세계라는 말의 세계>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여기저기 보냈는데, 돌아온 건 게재불가 통보와 내 시선이 민족적·보수적이라는 평가였다. 맙소사. 내가 보기엔 그 평가가 훨씬 보수적이었는데. 하물며 민족과 보수라는 단어를 이렇게 납작하게 잡떡처럼 눌러쓸 수 있단 말인가.

     

세계라는 말의 세계는 세계를 진실하게 재현하려는 의도보다도 세계를 빨리 아름답게 만들어내고픈 욕망이 앞선, 입술 바깥으로 발음하는 말들의 집합소 같았다.


     

2. 미개라는 말의 미개

     

이와 다르게 <걸어서 한국 속으로>의 시즌1 정도 분량의 『한국 요약 금지』(어크로스, 2024)에서 저자 콜린 마샬은 한국(인)이 오늘날 세계 내의 능동적 행위자임을 잊고 맹목적으로 서구적인 것을 추구하는 문화 풍토를 지적한다. 동시에 과장된 국뽕, 섣부른 자부심을 경계하면서도 한국이 지닌 복잡한 양식과 질서를 집요히 탐구하며 결코 요약될 수 없는 한국의 역동성을 읽어낸다. 특히 사회 구조에 대한 일가견 있는 분석은 한국의 일상성을 지탱하는 역학 관계를 잘 드러낸다. 그런 그의 글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우연히 마주할 낯선 타인에게 말을 거는 대화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맞다/틀리다로 평가받기보다는 즐겁게 읽혀야 하는 하나의 작품이다. 결코 외부자의 시선이 아니고 완전한 내부자의 시선도 아니며 아는 만큼 즐기는 자라는 뜻을 지닌 코노셔(Connoisseur)의 시선으로 한국을 마음껏 오해하고 이해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콜린이 “한국의 좋은 점은 보지 못하고 부정적인 면에만 집착하는 한국인들의 인식”을 초반부터 문제 삼은 것은 한국에서의 삶과 그 사회에 대한 구조적 통찰에서 비롯된 바이다. 실제로 한국 사람들은 자기 비하와 자조에 특화된 나머지 자기를 비롯해 이웃 사람들까지 좀비처럼 전염시키는 좀비 같은 사람(?)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반사체(半死體)로, 자기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났다. 한국인은 천성이 노예라는 어떤 어른들의 극단적 평에서부터 분야를 막론하고 떠도는 한국인들의 부족함, 천민성, 후진성, 천박함, 보수성, 낙후됨에의 비판은, ‘헬조선’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회문제의 복잡성과 역학 관계를 파악하기보다 “손쉽고 간단한 해결책으로 한국을 떠나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 모두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이다. 정말 아시아적이면서도 한국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콜린이 놓치고 있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패배주의로 질주하는 한국인들의 자발적 비관성이 그들 스스로의 문제를 전복해 낼 수 있는 중요한 동력으로도 기능한다는 점이다. 한국 안팎을 막론하고 한국인이 스스로의 미개함을 공공연하게 노출하는 발화 수행은, 언제라도 이 노출된 미개함을 갱생(更生)을 기다리는 표상으로 치환하고 그 표상에 새로운 의미를 덧입힐 수 있는 가능성을 전시한다. 꽃 피는 봄이 왔는데도 오지 않았다고 ‘우짖는’ 접동새의 비애 섞인 소리는 사실 왔는데도 안 왔다고 ‘우(기면서 울부)짖는’ 소리로 들릴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대개 그 가청범위 안에 있지만 범위 내에서의 위치소(位置所)가 각자 다르기 때문에 소리를 달리 해석해 왔다. 각자의 위치에서 영구적인 개화(開花)를 추구하는 그 목청이 한과 비애의 절규 혹은 흥과 풍류의 소리 어느 한 방향으로 환원될 수 없는 까닭이다.

     

님이 왔다고 말해버리는 순간 님과의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슬픔을 아는 시인이 님과의 이별을 다채롭게 벼려내 사랑과 이별 사이에서 고의로 길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한국을 충만히 사랑한다 말하는 순간에 빚어질 비극과 참사를 무의식적으로 아는 한국인들은 한국의 미개를 ‘우짖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맥락에서 전유(專有)되고 있는 미개(未開)는 꽃나무가 아예 없는 황무지를 전제하지도 않고 꽃이 만개한 유토피아를 꿈꾸지도 않는 단어이다. 오히려 그것은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상태를 지시하는 미개의 본디 의미처럼, 꽃이 피고지는 자리를 두고 ‘아직’ 아님을 ‘영원한’ 기다림으로 만드는 자들과 그 세계의 언어이다. 오늘로부터 약 100년 동안의 한국시를 읽다보면 ‘아직 안 핀 꽃’이란 소재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언어적 강박이 호출해 내는 ‘아직’의 파토스는 허무로 귀결될 부정의 고정점을 끊임없이 다른 위치로 이동시키는 힘을 느끼게 한다.


     

3. 한국이라는 말의 한국

     

미개한 자신의 죽음을 삶으로 전복시키며 더 나은 미개 상태로 살아가는 이 생동적인 한국의 일면은 당연 한국의 사회·문화·역사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가까운 역사에서 늘 강대국 혹은 열강의 정치와 침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국은 자신의 내외부에서 “미개하다”는 말을 들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개”를 강박적으로 쓸 때 그 신경증적 소용돌이로부터 파생되는 회전력으로 그 언어에 내재한 부정성을 해체해 전유해 온 내력―來歷이고 內力이며 동시에 耐力―도 함께 발생한다. 문학에서 그 치열한 기투(企投)를 찾을 수 있다. 앞에서 예로든 시인 한용운도 좋은 예고, 김영랑이 「모란이 피기까지는」도 좋은 예다. 시에서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라 할 때 그냥 봄이 아니라 “나의 봄”을 “아직” 기다리는 건, 봄이 왔는데도 자기에게는 봄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듯 드러내는 태도이다. 그리고 이 미개한 상태에서의 기다림은 정지된 자세가 결코 아니다.

     

문인이면서 지성인이었던 한국인들은 이 수행의 방법론을 다각도로 다져왔다.* 시인 서정주는 “괴롬 많은 역사 속을 지금까지 흘러온 전통의 바른 맥 속에 자기를 담는 일”을 강조하면서 “역사 있은 뒤 가장 고단한 역경만이 계속되어 온 대한민국 같은 나라의 일원”은 “최상의 역경은 최상의 상명당”이라 생각할 것을 권유했다. 소설가 최인훈도 「총독의 소리」와 「주석의 소리」를 통해 ‘미개한 조선인’ 표상을 둘러싼 여러 심리적 층위를 구분하며 그것의 가부(可否)를 극복할 지성을 강조했고, 평론가 김현·정과리는 이러한 미학에 주목하며 스스로의 후진성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을 현대로 밀고 나아가는 주체적 힘을 논했다. 김수영 역시 “더러운 전통”이 곧 “방향은 현대”가 되도록 “도시의 피로”로부터 사랑을 배울 것을 역설했다. 정현종은 이 미개한 한국인들의 고통을 축제의 티켓으로 만들어버리며 “고통의 축제”판을 벌여놨다. 한국은 스스로를 미개한 상태로 파악함으로써 미개를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일이 미개한 한국인에게 도무지 만족이란 없는 듯 보인다. 한국인들의 ‘자기 자신에 가혹한 태도’, ‘스스로에 만족할 줄 모르는 완벽주의적 성향’은 일면 사실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으레 논의되는 한병철의 『피로사회』식 화두처럼 스스로가 착취의 주체이며 대상이 된 현대인의 군상과 그 작동 논리는 한국만의 특징이 아니다. 따라서 그 담론을 곧장 한국만의 특수 문제로 동일시해 버리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중요한 건 지옥처럼 보이는 이 나라에서 왜 부정성과 긍정성이 동전의 앞뒤처럼 있으며, 때로 그 동전이 회전하며 우리에게 내기를 거는지에 대한 집요한 탐문이다. 한편으로는 만족과 불만족 사이의 길항은 왜 불만족이라는 부정성의 옷만 입냐는 물음일 것이다.

     

사실 부정성에도 질서가 있다. 험악하게 가지를 뻗고 서로 얽히며 가시로 무장한 식물들이 서로의 몸을 조르고 파괴하려는 듯 보이는 울창한 숲에도 생장(生長)의 질서가 있다. 하물며 서로의 피와 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생물들 사이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공생(共生)의 질서가 있다. 가령 손발 끝에 침(針)을 찔러 상처를 내어 죽은 피를 쏟아내도록 하는 전통과 같이, 현대 K-뷰티의 숨겨진 비밀이 죽은 피부에 고의로 상처를 내어 새살을 돋우는 탄력과 힘을 끌어올리는 의학 기술에 있는 듯이, 불닭볶음면을 먹을 때 느껴지는 게 매운맛이 아니라 고통임을 알면서도 굳이 흡입해서는 그것이 주는 즐거움으로 집단적 무기력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적 저항까지 모든 것에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생의 질서가 있다.


따라서 한국이라는 말의 한국에서 한국은 여전히 어떤 질서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이해된다. 한국은 미개한 나라지만 미개하지 않고, 위대한 나라지만 위대하지 않다. 앞으로도 한국인은 한국과 한국인을 미개하다 할 것이다. 한국 스스로를 세계 속에 있지 않는 듯 기획한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강박적인 세계 탐구가 다른 힘을 발명했듯이, 미개사(未開史)는 역동적으로 구성될 것이다. 한 언론사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어 ‘미개’와 밀접한 공기 관계를 맺는 단어는 ‘남성’, ‘여성’, ‘정치’, ‘문화’라고 한다. 남성과 여성이 이분화되는 문화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미개함이 느껴지는 이 때, 다시 한번 한국의 미개를 전유할 힘을 기대하는 바이다.

     


*한용운, 김영랑, 서정주, 최인훈, 김현, 정과리, 김수영, 정현종의 문학적 세계관을 잇는 다음의 내용은 필자가 2023년 2월 미국 UCLA의 「Energy in Asia」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원고―프로시딩에 보다 자세히 수록돼 있다. "Modern Poems of Korea and Kinetic Energy of Their Words", UCLA Center for Korean Studies, Claremont College Enviro Lab, Los Angeles U.S., Feb 23rd-24th 2023.



윤종환 시인. 문학연구자.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http://JonghwanYoon.kr

 


조회수 189회댓글 0개

최근 게시물

전체 보기

Comments


bottom of page